〈 28화 〉막간 - 오! 나의 주인님!
가올리스는 유진이 떠나가고 한참을 영혼 빠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믿을 수 없었다.
수백년을 살아온 백색 재앙, 혹한의 악마 가올리스가 이름도 모르는 인간에게 무참히 짓밟히다니? 언젠가 인간에게 당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냥 당한 것도 아니다. 마법 한 번 제대로 못 써본 것도 모자라 악마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뿔까지 잘려버렸다.
적어도, 적어도 자신을 쓰러트릴 인간이라면 조금 더 낭만적일 줄 알았다. 서로의 전력을 부딪치고, 피와 살이 흩날리는 격전 끝에 쓰러지거나 한다면 군말 없이 죽음을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 빨간 머리 소녀는 전력은커녕 본 실력의 십 퍼센트도 쓰지 않았다. 반대로 자신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다 쓰며 발버둥 쳤으나, 벌레처럼 짓이겨질 뿐이었다.
저항할 의지조차 안 드는, 압도적인 실력.
가올리스는 시선을 내리깔고 벌벌 떨었다.
"으… 으으…."
한기가 몸을 좀먹기 시작한다.
그녀는 으슬으슬 느껴지는 추위에 또 한 번 절망했다. 뿔이 잘리고 힘을 잃자 예전 같은 체온 유지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가올리스는 혹한이라는 이명이 무색하게 얼어가고 있었다.
"……."
가올리스는 지난날의 일을 떠올렸다.
아주 예전, 겁화劫火의 악마 플뤼톤이 자신에게 뿔 없는 악마를 잡았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안 들었으나, 당사자가 되니 그렇게 소름 끼칠 수가 없었다. 눈이 뽑히고 팔다리가 잘린 그 악마는 인형으로 가공되어 `아직까지` 살아있다.
지금 당장 숨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인간들은 대(對)악마기관 성황청을 설립할 정도로 악마를 증오했으며, 엘프는 마족 침공 당시 세계수 일부가 불타, 오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악마 척살령을 거두지 않았다. 수룡인은 천 년에 한 번 바뀐다는 왕자를 악마들의 손에 잃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아직도 공석이다.
방랑자放浪者.
악마가 서 있을 곳은 없다.
잘린 뿔의 단면은 낙인이 되어 영원토록 괴롭힐 것이다.
"으…."
어디를 가나 죽고.
악마에게 들켜 노리개가 될 바엔―
"주인."
순간, 몸 위에 올려진 포근한 천의 감촉.
가올리스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굴에서 가져왔다. 트롤들은 전부 내쫓았으니, 당분간은 생활할 수 있을 거다."
자신의 첫 권속이자, 마지막이었던 권속.
미노타우로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검은 소의 애잔한 눈동자가, 자신이 권속보다 약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날 동정하지 마!"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두려웠다.
지배의 고리는 빼앗겼고 덧씌울 방법도 없다. 저 소대가리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발길질 한 방에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주인을 섬기는 권속이 어디 있느냔 말인가? 그간 모질게 굴었던 게 조금은 후회스러웠지만 돌이킬 수 없다.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여주기를 바랄 뿐.
"히윽!"
미노타우로스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을 때, 가올리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헛숨을 들이켰다.
"으……?"
우악스럽지만 섬세함을 잃지 않은 손길이 몸을 조심스럽게 감싼다. 가올리스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포근함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떴다.
"어, 으?"
눈을 뜨자 보인 것은, 자신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올린 미노타우로스. 그녀는 부유감에 잠시 멍을 때렸으나, 자신이 지금 알몸 위에 천 쪼가리 하나만 둘렀음을 뒤늦게 깨닫곤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뭐, 뭐하는 거야 이 소대가리야!!"
"……."
침묵.
가올리스는 초조해졌다.
오만가지 방법으로 죽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쥐어 터트리거나, 짓밟아 죽이거나, 그 빌어먹을 붉은 머리 인간에게 그랬듯 한참을 두들겨 맞다 죽일 수도 있었다.
"으으…."
터질듯한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다.
그렇게 무력하게 떨고 있자니 서리 굴의 가장 깊숙한 곳, 미노타우로스의 거점에 도착했다.
"침구라곤 짚단밖에 없지만, 빼앗은 옷을 이용하면 나름 괜찮을 거다."
미노타우로스는 커다란 짚단에 자신을 내려다 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
가올리스는 짚단 위에서 두리번거리며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 * *
서리 굴 안에서 지내기도 벌써 삼 일째.
미노타우로스는 멍청할 정도로 자신을 잘 대해줬다.
빼앗은 무구와 옷들을 만지며 빈둥거리고 있자면, 어느샌가 들짐승 따위를 사냥해 자신에게 바친다. 날고기를 가지고 끙끙대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면, 직접 불을 피워 구워주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미노타우로스 본인은 차가운 맨바닥에서 자며, 남은 트롤들을 경계하며 불침번을 선다.
가올리스는 이 모든 호의가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허나 악마로서의 자존심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입 밖으로 `미안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불평을 하면 했다. 먹을 게 충분하지 않다고 찡찡대면 군말 없이 사냥을 나선다. 방이 더럽다고 타박하면 익숙하지도 않은 도구들을 써가며 열심히 청소한다. 씻고 싶다고 투덜거리면 어디선가 따듯한 물을 준비해 눈앞에 가져다준다.
죄책감.
이런 못난 자신을 버리고 제 살길 찾았으면 하는 바람에 일부러 괴롭힌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뿔이 잘린 악마는 가치가 없으니까.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 절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더 모질게 굴었다. 하루빨리 나를 버리고 떠나라고.
그러나 8일째 되는 날.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평상시보다 조금 늦은 미노타우로스는 몸 이곳저곳에 깊숙한 상처들을 남기고 돌아왔다. 등은 보기 흉할 정도로 파여있었고, 오른손은 부러졌는지 너덜너덜했다. 잔 상처까지 합치면 무척이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미노타우로스는 아픈 기색을 내지 않고 말했다.
"트롤들이 주제도 모르고 힘을 합쳤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다 무찔렀다."
"어, 어쩌지… 그, 그래! 약초! 분명 약초가 있을 거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필사적으로 물건들을 뒤적였다. 그동안 빼앗은 물건들만 산더미다. 분명 약초 정도는 있을 것이다. 가올리스는 손에 상처가 나는 줄도 모르고 잡동사니 사이를 뒤적였고, 약초 그림이 그려진 상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차, 찾았다!"
하지만 상자 안의 약초들은 이미 썩어버린 후였다.
쌓아두기만 하고 쓰질 않아서이다.
"아…."
눈물이 핑 돌았다.
저렇게까지 날 위해 노력하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 팠다.
가올리스는 또다시 주저앉았다.
"…미, 미안해. 흐윽, 흑… 미안해."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말할 수 있었다. 미안하다고. 못난 나를 위해 노력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니 용서해달라고.
미노타우로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특유의 재생력으로 몸을 완전히 회복했지만, 그녀의 찢어진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다.
이 날을 기점으로 가올리스는 바뀌었다.
서리 굴에서 생활한 지 15일째.
미노타우로스에게 의존하는 건어물 같은 삶이 변한 건 아니었지만, 둘의 관계는 조금 발전해, 주인과 노예에서 믿을 수 있는 동료 정도로 바뀌었다.
"이리와! 내가 씻겨줄게!"
덩치 때문에 편하게 씻지도 못하는 미노타우로스가 안타까웠던 가올리스는 찢어진 천을 적셔 손수 몸을 닦아줬다.
"가, 강인한 자들은 씻지 않는다!"
"그딴 게 어딨어! 더러우면 더러운 거지!"
"크오오…!"
"착각하지 마! 옆에 있으면 냄새나니까 그런 거야!"
덩치 차이가 어마무시한지라 온몸을 써야 했고 시간도 엄청나게 걸렸지만, 뭐라도 해주고 싶은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미노타우로스의 몸을 열심히 닦았다.
사실, 미노타우로스가 극구 거부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가올리스의 가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녀가 등을 닦으러 손을 뻗으면, 풍만한 가슴의 감촉이 그를 괴롭힌다.
거기에 커다란 가슴과 달리, 그녀의 체구는 인간 기준으로도 무척이나 작아 전신 밀착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올리스는 152cm의 유진보다 조금 작았다.
가올리스는 그것도 모르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미노타우로스를 씻겨주었다.
씻기는 데만 한 시간 이십 분.
미노타우로스는 그 긴 시간 동안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발기를 막았다.
"쿠으으…."
여러 의미로 죽을 맛이었다.
"미노타? 어, 어디 아파?"
가올리스는 미노타가 앓는 소리를 내자 눈물을 글썽이며 몸을 떨었다. 트롤에게 공격당한 이후, 미노타의 안위에 극도로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리 사소한 상처라도 제 몸이 다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더 나아가 사냥 중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호흡곤란에 가까운 공황 증세를 보였다.
"괘, 괜찮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숨긴다.
이 모든 게 주인의 순수한 호의란 것을 알기에, 그는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었다.
가올리스의 신체 접촉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대용으로 쓰던 짚단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오늘은 네가 짚단에서 자!"
"안 된다! 주인, 감기 걸린다!"
"거절은 안 받아!"
"우오…!"
"그, 그치만, 나만 쓰면 불공평하잖아…. 그, 그러니까…."
늘 이런 식이다.
호의를 거절하면 축 늘어져 안절부절못한다.
"그, 그래! 같이 쓰면 되잖아!"
미노타우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오늘도 주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했다.
인간의 눈을 피해 생활한 지 한 달째.
둘의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가올리스는 삼 일에 한 번 미노타우로스의 몸을 씻겨주었고, 잠이 들 때면 항상 둘이서 잠들었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잠버릇이 생겼는데, 미노타의 팔뚝을 꼭 껴안는 것이었다. 가올리스 본인은 껴안기 좋은 배개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지만, 미노타우로스는 아니었다. 그는 몬스터답지 않게 불면증이 생겼다.
더 참기도 힘들었고.
-스르륵.
아무도 오지 않는 외진 굴, 미노타우로스는 하의를 두른 천을 벗어 던지고 수음手淫을 시작했다.
그간 쌓였던 게 너무 많았다. 지금 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신체 접촉은 둘째 치더라도 가올리스의 모습은 너무 무방비했다. 그녀는 브래지어조차 입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돕기 위해 필사적으로 낑낑대는 모습은, 미노타의 음심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다만 미노타우로스가 간과한 게 있었다.
가올리스는 사냥 시간을 제외하면 늘 그와 붙어있으려 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항상 옆에 있어야만 안심을 한다. 애완동물에게나 발생할 법한 분리 불안이 그녀에게도 생긴 것이다.
"미노타? 어딨어~?"
제 주인이 자신을 찾는 것도 모른 채, 계속해서 팔을 흔든다.
"찾았다! 이거 봐봐! 이번에 내가 바느질 배웠…."
-부르르릇!!!
가올리스가 미노타를 찾았을 즈음엔 이미 사정한 직후. 그녀는 끊임없이 나오는 진득한 정액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수음 행위를 들킨 미노타우로스는 기겁하며 하반신에 천을 둘렀다. 아직 만족스럽게 싸지 못해, 천 사이로 백탁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오! 우오오…!"
쿵! 미노타우로스는 무릎을 꿇었다. 보통 이런 추잡한 일들을 들키면, 대가리에 고드름부터 꽂혔기 때문이다.
"저, 저기 미노타…."
그러나, 미노타우로스의 예상과 다르게, 욕지거리도 고드름도 발길질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 요, 요즘, 힘들어?"
가올리스는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히고 쭈뼛쭈뼛 거리며 말했다.
"내, 내가… 도, 도와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