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감정의 맛 (2)
삐- 하고 울리는 이명. 귀를 찢는 굉음에 머리가 흔들린다.
카피 에고는 천지를 뒤흔드는 압도적인 마나의 폭주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정말이지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같은 악마와 비교하자면, 그래. 강했다. 출력 자체가 달랐다.
감히 유진의 기억으로 평가하길, 가올리스와 파르시히가 '정석적인' 전투에 능통했다면, 아르타니아는 '통제 불가능'의 영역에 가까웠다.
"파르시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빠짐없이 설명해야 할 거야!!!!"
자세를 낮추고 발꿈치에 힘을 줘 몸을 지탱했다. 단순 소리친 것만으로 몸이 밀려났다. 마나 장막을 둘렀는데도 이 정도라니. 예상은 했지만 살짝 긴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남은 마나를 확인한다. 싸우기엔 충분했으나, 커다란 공격 몇 번 날리면 금새 바닥날 정도의 양이었다.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는 소리다.
본신의 사망 외에는 꿀릴 게 없는 카피 에고에겐 불행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파르시히의 공격을 받아치지 않고 방어에만 급급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잡졸에게 쓸데없이 힘을 뺄 수는 없는 노릇이잖는가.
필살기 날리고 멋대로 뻗어버린 건 건 예상 밖이었지만….
참고로 그 잿빛 악마 놈은 아르타니아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을 변호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엿 같은 기술! 다시는 쓰지 말랬지!!!"
"그, 그게. 저는 잘못이 없는 겁니닷… 아니. 없습니다!"
"차라리 날 부르란 말이야! 왜 몸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건데!"
"…최후의 발악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니뭐니해도 전 요리사고, 당신은 손님인데요."
"이이익!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그리고!"
휙. 눈을 굴린다. 화산 속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검은 눈동자가 유진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태산처럼 거대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 속엔, 설탕 한 스푼 만큼의 작은 원망도 담겨 있었다.
누구를 향한 원망일까. 의문을 품을 여유는 없었다. 둘의 관계가 어찌 됐든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뒤져 썅년아!!!"
저 분노가 오롯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는 것.
-콰아아아앙!
거대한 돌벽이 사방에서 튀어나온다. 사각지대는 없다.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한 공격. 죽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전달되는 공격이었다.
카피 에고는 처음부터 맹렬히 쏟아지는 공격에 작게 혀를 찼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대로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커다란 돌덩이가 머리를 내리찍기 직전, 돌벽을 이룬 마나의 '결'을 확인한다.
아르타니아의 공격은 즉흥적으로 쏘아낸 만큼 흠집 투성이었다.
내가 지금 할 일은 갈라진 틈에 자신의 마나를 주입해, 억지로 벌리는 것이다.
'비틀어져라.'
만물에는 마나가 깃들어있나니 이는 영원불변한 진리이자 거부할 수 없는 생의 일부이다.
하지만, 이를 비틀 수 있는 자가 존재하니 바로 초월 경지에 오른 자들. 초월자 아크메이지의 육신은 그 자체로 전략 병기다.
비록 빌려쓰는 몸인 만큼 무한정에 가까운 마나는 누리진 못하지만, 몸을 다루는 방법까지 잊은 건 아니다. 저런 무식한 공격 따위, 간단하게 막을 수 있다.
-쩌적, 쩌저적!
팡! 둘러싼 벽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카피 에고는 고운 모래가 머리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먼지를 털어냈다. 아르타니아는 사토가 되어버린 돌벽을 보곤 입을 떡 벌리더니, 돌조각이 날아와 뺨을 긁혔을 때 정신을 차렸다.
"…너 뭐야."
늘 느끼는 거지만 당혹감에 물든 악마의 표정은 장관이었다.
역시, 감정 표현만큼은 순수한 악마였다. 카피 에고는 마나 잔량을 꾸준히 체크하며 대답했다.
"아크메이지, 마법의 극한, 초월자 등등. 부르고 싶은데로 불러."
"…."
"아, 혹자는 마녀(Witch)라 부르지만 난 동의 못 해. 딱히 사악한 짓을 한 적도 없고."
지랄. 참으로 지랄이었다. 지랄로도 모자라 발광까지 하는 격이다. 초월자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만약에 맞다고 해도, 이런 악마 굴에 찾아올 이유가 있는가? 무슨 드래곤의 유희도 아니고…
…드래곤?
"너 드래곤이냐?"
"설마. 그런 도마뱀 새끼랑 날 비교하지 말아 줄래?"
유진과 맞먹는 용은 이미 뒈져버린 된 역사 속 고룡밖에 없다.
나이가 오천은 된다고 했나. 하여튼 그 뒤를 이은 용들은 하나같이 어딘가가 모자랐다.
하나의 속성만을 통달하거나, 오만함에 수련을 끊거나.
물론,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용을 도마뱀 취급하는 존재는 다른 용을 바라보는 용밖에 없다.
"파르시히… 설명해 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닷…!"
"시바아아알! 도움 안 되는 새끼!"
파르시히는 너무 놀란 탓에 아르타니아가 그토록 혐오하는 임프 방언까지 내뱉었지만, 경각심이 최고치를 찍은 지금 저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후우. 짧게 한숨. 분노를 삭인다. 무식하게 힘만 써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솟아나라!"
미숙한 언령의 힘까지 쓰며 마나를 끌어 올린 그녀는 조금 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흉악하게 생긴 토창이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온다. 전과 달리 깔끔하게 정제된 공격이었다. 상쇄할 수 없다. 막아야 했다. 카피 에고는 다음 술식을 준비하면서 아르타니아의 공격 패턴을 분석했다.
'…신기한 힘을 쓰네.'
그 순간, 머리를 울리는 한마디.
-싱기해?
'응. 신기… 뭐?'
머릿속을 침범한 목소리에 신경이 몰린다. 덕분에 짜놓았던 술식에 담겨있던 마나가 일부 빠져나갔다.
아르타니아의 공격에 맞추어 정확한 양을 주입했던 술식인 만큼, 해서는 안 될 치명적인 실수였다.
쿠웅!
"윽!"
장막을 뚫고 돌조각이 들어온다. 당황하지 않고 추가 술식을 전개해 급소를 막았지만, 다른 곳까지 모두 막은 건 아니었다.
무릎을 꿇는다. 카피 에고는 통증에 이를 악물며 다리를 내려다봤다. 오른 정강이가 박살이 난 듯했다.
-흐, 흐이익…?!
머릿속에 말을 건 장본인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카피 에고는 솟구치는 짜증에 뿌득 이를 갈았다. 중요한 타이밍에 훼방을 놓은 덕에 불필요한 곳에 마나를 사용해야 했다.
"이런 공격도 막지 못하면서 뭐? 초월자?"
아르타니아는 오른 다리를 굽힌 내 모습을 보곤 광소를 터트렸다. 폭발할 기세로 흘러나오는 마나에 머리칼과 가슴이 출렁거린다. 어찌나 많이 뿜었는지 황금색 머리칼이 검푸른 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카피 에고는 신속히 재구축을 한 뒤 머릿속에서 어버버 거리는 유진에게 말했다.
'유진….'
-미, 미아내….
이 씨발련아. …라는 말을 뱉으려 한 카피 에고는 유진의 처량한 목소리에 가까스로 도로 집어넣었다. 그래. 저년 욕해봤자 내 얼굴에 침 뱉는 꼴밖에 더 되겠냐.
"역시 아르타니아 님이십니다!"
"…더 칭찬해도 좋아."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는 아르타니아의 모습은 조금 한심해 보였다. 가슴도 커서 더더욱. 그보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걸까. 헛웃음만 나온다. 그리고 살짝 화가 났다.
흙으로 공격했으니, 똑같이 흙으로 돌려주겠다. 이런 유치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카피 에고는 입에 고인 핏물을 찍 뱉고 뇌까렸다.
"…뿔 꺾일 준비 해."
흙을 생성해 등 뒤에 커다란 건틀릿을 만든다. 내 몸의 다섯 배. 이제는 희미해져 아련하게 기억만 남은 남성성이 꿈꾸는 로망을 따라. 원초적인 폭력을 그린다. 공간이 협소해 더 크게 만들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굳이 이런 모습으로 만들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제 이 건틀릿은 내 의지대로 휘둘러질 것이다.
"하하… 하하하!"
아르타니아는 기둥처럼 솟아난 건틀릿에 코웃음을 치며 크게 웃었다. 감히 흙마법을 써? 늪지대의 여왕인 자신 앞에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다. 그녀의 눈이 희번덕 뜨인다. 몸을 타고 흐르는 광기는 주위를 전염시킬 정도로 거대해졌다. 손을 뻗는다. 돌조각들이 날아와 그녀의 허연 팔에 달라붙더니 탐욕스럽게 크기를 불렸다.
"오냐."
주먹을 쥔다. 두 마법사가 창조해낸 거대 건틀릿이 주먹을 쥔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건틀릿의 모습마저 그들의 성격을 반영한 듯했다.
유진의 주먹은 붉었다. 재 머리색을 닮은 붉은 주먹은 여성의 것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남자의 것을 닮은, 어쩌면 유진이 바라는 이상향에 가까운 주먹이었다.
아르타니아의 주먹은 단순했다. 그저, 압도적인 질량과 무게의 폭력만이 존재한다. 손의 형상만 이뤘을 뿐이지 실용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저, 때려 부수기에만 최적화된 모습이었다.
"꺾을 수 있으면 꺾어보려무나."
둘의 차이는 극심했다. 겉모습의 흉포함과 파괴력을 생각하면 누구든 아르타니아의 승리를 점치리라. 아르타니아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고. 그녀는 유진의 초라한 주먹을 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곤 오만함에 찌든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서로의 주먹이 빛을 발한다.
"이 꽉물어라."
-콰아아아앙!!
충돌. 현 늪지대의 여왕과 불완전한 아크메이지의 마나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지하에 처박힌 성채가 그대로 파묻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한 충격이 주위를 덮쳤다.
체력이 없었던 파르시히는 그대로 날아가 주방 구석에 처박혀버렸다. 그 뿐이랴. 주위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충격파에 성채를 이룬 모든 것들이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오븐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자궁찜도, 멋들어지게 장식된 식사 테이블도 전부 박살이 났다. 주방 구석 어디선가에서 누군가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였다.
"…."
"…."
충격파가 걷히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주먹 너머로 지은 두 마법사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카피 에고도, 아르타니아도 침묵한 채 무색의 얼굴을 유지했다. 다만 이 무표정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울상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마법이 가미된 전투는 대개 첫 합으로 판가름나기 마련이다. 술식의 완성도, 마나를 다루는 기술, 또 얼마나 잘 정제된 마나를 썼는가.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게 마법의 '힘'이다. 그러니 고작 첫 합에 결과를 예측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웃음 지은 자는 붉은 머리 소녀였다.
아르타니아는 유진에 비해 모든 것이 열등했다.
"하윽…."
팔을 감싼 돌 조각이 힘을 잃고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실이 풀린 인형처럼 비틀거리다 끝내 얼굴을 처박고 넘어졌다. 아르타니아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카피 에고는 건틀릿을 부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의 팔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 넣어 내장을 뒤흔들었다. 도발에 넘어온 멍청한 악마 덕분이었다. 멀리서 마법만 쏴댔으면 접근하지 못했을 테니까. 아르타니아는 그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무력해진 자신의 모습에 벌벌 떨었다.
인간의 마나… 더럽고 끔찍한 인간의 마나가 몸에 들어왔다. 마법을 쓰고 일어서려 해도 발동되지 않았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아르타니아는 전신이 마비된 감각에 개구리처럼 부르르 떨었다. 악마와 인간이 쓰는 마나는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이것들을 전부 걸러내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마법 사용은 요원했다.
악마에게 마법은 삶의 일부.
마법이 봉인된 악마의 말로는 안 봐도 뻔하다.
"후우…."
단. 카피 에고의 상태도 그리 여유롭지는 못했다. 저 금발거유 악마년의 몸을 망가트리려고 마나를 닥치는 대로 부어 넣었기 때문이다.
유진이 끌어낸 마나 대부분을 소진한 카피 에고는 곧바로 건틀릿을 해제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유진. 내 말 들려?'
-우으으에?
'끝났어. 전부.'
-끄, 끝? 나 안 주거…?
만약. 이 일이 다 끝나고 기억을 되찾는다면. 나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정말이지 꼭 보고 싶었지만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자신은 이 세상과 안녕이라는 뜻. 아쉽고, 아쉬웠다. 수정구라도 있으면 거기에다 녹화했을 텐데.
"끄으윽…."
그때, 날아간 의자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주방 구석에서, 지직 거리는 라디오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