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감정의 맛 (3)
좀 띨빵해진 자신과 여러 잡담을 나누기도 잠시. 넝마짝이 된 파르시히가 의자들을 밀쳐내고 기다란 흑생머리를 내보였다. 뒤로 묶은 머리끈은 끊어졌는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고장이 난 라디오처럼 지직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안 죽은 게 용하네. 딱히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저놈의 몸엔 살의가 없었다. 살의를 품을 의지조차 꺾였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파르시히는 비틀비틀하더니 부서진 의자를 지지대 삼아 축 늘어졌다. 그러곤 멍한 눈으로 꿈틀대는 아르타니아를 바라봤다.
"아, 아르타니아 님…?"
그의 눈동자에 다채로운 감정들이 입혀진다. 당황, 절망, 분노… 제 주인이 죽지 않음을 깨닫자 조금의 안도감도 보였다. 일어선다. 파르시히는 그렇게 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허가 된 성채를 거닐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아르타니아를 향해서.
"일어나시지요…."
움직이지 못하는 아르타니아를 부축해주는 모습은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저런 거에 재미를 느끼기엔 너무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저들은 식인종이다. 혐오하면 혐오했지 동정할 일은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충격파에 찢어진 옷을 다시 이어붙인 카피 에고는 정말 평온한 말투로 저들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올 대답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건 통보였다.
"거기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고 있어 봐. 난 할 일이 좀 있어서."
"…."
"도망치면 죽일 거야. 판단 잘해."
혹시 모르니, 죽일까. 내가 모르는 공간 마법의 극의라도 있으면 골 아프다.
'….'
파르시히의 목숨을 저울질 한 카피 에고는 끝내 '죽이지 않는다'에 추를 올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쪽은 아르타니아가 아니라 파르시히 같았다. 정보를 뜯기엔 저 녀석이 좀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장거리 이동은 술식 전개가 불가피하니 어느 정도는 대비할 수 있을 것이고.
지직거리는 잡음이 울린다.
"알겠… 습니다."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리고."
카피 에고는 마나를 뭉치고 뭉쳐, 작은 구슬을 하나 만들었다. 마나의 실체화. 그것도 모자라 폭발 술식까지 때려 박았다. 파르시히가 이 기교를 눈치챘을진 모르겠다만, 이 구슬이 굉장히 수상한 물건이라는 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주로 목숨줄 쪽으로. 다만.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삼켜."
"독입니까?"
"허튼짓하면 터트릴 거야."
"폭탄이군요."
허탈한 표정. 패자에게 권리는 없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작은 폭탄을 삼켰다. 파르시히는 파란 구슬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감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목을 죄는 것을 느꼈다. 술식의 전개. 몸이 폭탄으로 변해간다. 이를 꽉 깨문 파르시히는 몸이 폭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모든 걸 목도한 아르타니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붉은 머리의 마법사. 모든 기억을 다 뒤져봐도 저런 년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설마. 성황청이 비밀리에 준비한 악마 사냥꾼? 아니. 그렇다기엔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용사? …이것도 아니다. 마왕 부활은 아직이다. 아무튼, 지금 상황이 최악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르타니아는 현재의 해결책을 원했다.
하다 못해 차악의 선택지라도 있었으면.
그리고 저년이 몸에 때려 박은 마나… 무슨 종류인지 모르겠다. 몸 밖으로 빼내려 해도 껌처럼 들러붙어 나가질 않았다. 마나 하나하나에 의지가 박힌 것처럼. …정말 인간이 맞나?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대신해 새파래진 입술만 푸르르 떨릴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피 에고는 아쉬움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유진. 준비해.'
-무어, 뭘?
'동기화. 이제 작별할 시간이야. 만나서 반가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그, 그게 무슨 서리야…?
'이거 하나만 기억해. 다음에. 또. 이딴 개 짓거리 하려고. 나. 만들면. 바로 혀 깨물고. 자살할 거야.'
진심이다. 뒤치다꺼리는 한 번으로 족하다.
카피 에고는 유진의 몸을 이끌고 반듯한 곳에 누웠다. 박살이 나고 먼지투성이인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영원히 보지 못할 세상의 풍경. 소멸이 가까워지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불완전한 상태로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굳이 그때로 돌아가야 할까.
때로는 천재보다 바보가 더 행복할 수도 있다.
"하아…."
기억을 돌려놓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인지는 둘째 치고,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동기화는 멈출 수 없다. 죽음이란 게 꼭 목이 잘리고 심장이 터져야 죽음일까. 글쎄. 내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는 유진이 더 잘 알 거다.
나는 유진을 증명할 유일한 존재다.
동기화를 시작한다.
의식이 크게 흔들린다. 카피 에고의 자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진의 자아와 하나가 되기 위해 물러지는 과정이었다. 당연히, 자아가 부서진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카피 에고는 그저 멍하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완전한 소멸을 기다렸다.
-…저기.
'응?'
-고마워.
'….'
고맙다라…. 내 입에서 나올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단어였다. 카피 에고는 그 단어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이제는 사라진 순수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에, 반복해서 되새겼다.
이건 좀 부러울지도 모르겠네…. 자신의 역할에 불만을 품은 적은 없지만, 저렇게 순수한 내 모습을 보니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IF. 만약에. 이세계에 떨어지고 수없이 던진 질문. 만약, 내가 기억을 잃은 채 이곳에 떨어졌다면. 차라리. 약해 빠진 모험가로 이 세상에 떨어졌다면. 차라리. 이딴 곳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솔직하게 고마움을 표할 줄 아는 유진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만약'의 모습이었다.
동기화가 곧 카피 에고의 죽음이란 걸 알면 그녀는 동기화를 거부할 것이다. 지금의 유진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순수했으니까. 카피 에고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입을 열지 않았다. 나를 부정하면서까지 순수함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둘이 되는 것도 싫었다.
'…잘 있어.'
나는 나로 살리라.
세상이 무너진다.
* * *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함이었다. 또 하나의 나와 말을 하고, 함께 싸우고. 끝내 두 악마를 무찌르고. 다소 유치할 수 있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그런 긴 이야기를 꾼 듯했다.
나는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을 느꼈다. 이를 너무 꽉 깨문 탓에 잇몸이 찢어져 버린 것이다.
"…."
눈을 뜨자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내 기억뿐만 아니라 카피 에고가 보고 느낀 모든 것들도.
어지러웠다. 동기화가 종료된 순간, 카피 에고가 느낀 모든 감정이 필터링 없이 통짜로 들어왔다. 뒤죽박죽이 된 감정들. 나는 중증 정신병 환자처럼 웃다가 울다를 반복했다. 빌어먹을.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복제 자아가 남긴 감정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했다.
분명 기억 잃기 직전의 상태를 그대로 복제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격이 다소 변해버렸다. 나는 그렇게 쾌활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도 아니다. 성공적으로 일을 완수한 건 칭찬해줄 만 하다만. 어쨌든.
'…엿 같아.'
게다가 이 미친년, 내 복제품 아니랄까 봐 내 몸 빼앗자마자 한 짓이 피학 자위였다. 나는 속으로 '앞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목록에 두 가지를 추가했다. 기억 상실과 자아 복제. 두 번 했다간 우울증에 자살해버릴 것 같다.
파르시히는 수십 분을 누워있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울고 웃는 내 모습에 질색을 하며 떨어졌다. 나는 그 시선을 느끼곤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저놈들 족치고 정보 뜯어내려고 이 짓거리를 한 거였지.
목적을 상기하니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돌변한 내 모습에 당황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 다중인격? 혹시 그런 건가요?"
그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지. 지금도 다른 두 이성이 충돌하며 소리 지르고 있는데 말이야. 나는 자조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파르시히는 살인마처럼 웃는 내 모습에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는 그 와중에도 벌레처럼 꿈틀대는 아르타니아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찰떡처럼 붙어있는 둘을 향해 말했다.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건데, 잘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고 나선 죽일 겁니까?"
"대답하는 거 보고."
뿔 꺾기는 확정이다.
그렇다고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진 않았다.
"솔직히, 나는 너희한테 관심 없어. 악마 토벌이니 뭐니 해서 명예를 챙길 이유도 없고."
"그런데 왜…?"
"닥쳐. 말 안 끝났어."
파르시히는 입을 닫고 합죽이가 되었다.
"너흰 너무 설쳤어. 적어도. 내 눈엔 안 띄게 행동했어야지."
"……."
"한여름에 눈이 내리질 않나… 한창 좋을 때 갑자기 납치해버리질 않나… 아. 너 칼 솜씨 좋더라. 그건 마음에 들었어."
오한. 파르시히는 먹잇감을 노리는 눈빛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나는 그 작은 떨림을 감지한 순간 태도를 바꿨다. 하소연을 하는 듯한 장난스러운 말투는 사라지고, 드래곤을 능가하는 위압감이 전신을 뒤엎는다. 악마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분위기 휘어잡기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성황청은 왜 너희를 토벌하지 않지?"
내가 품은 의문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연달아 악마를 만나니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이렇게 대놓고 날뛰는데 내버려 두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고작 그겁니까?"
"응. 고작 그거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까딱였다. 파르시히는 얕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악마 토벌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
즉답한다. 맥락상 역사 쪽을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악마들의 특성만 알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파르시히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악마 토벌이 시작되면 모든 악마가 경계 태세에 들어갑니다. 서로를 죽여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이상, 언젠가 자신이 타겟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지요."
"……."
"아무리 악마들 사이에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있다 해도,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까지 힘을 모으지 않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주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악마를 중심으로 연합이 이루어지지요."
"예를 들어?"
"군단장 바르페우고스. 아십니까?"
"…아니."
"그의 이명은 전쟁입니다."
"잠깐."
그래. 전쟁이 껴 있으면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게 정상이겠지.
그런데… 듣는 내내 거슬리는 게 하나 있단 말이지.
마치 악마들을 건드는 게 잘못이라는 투로 말하는데, 이게 듣기 심히 좆같았다. 전쟁이 무서워서 당하고만 있으라고? 심지어 먼저 칼을 들이댄 쪽은 인류가 아니라 악마 쪽인데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말이 돼? 토벌과 전쟁을 두려워한다면 응당 멈출 줄 알아야지."
"……."
"가올리스. 내가 뿔을 꺾은 첫 번째 악마. 그년은 한여름에 눈을 내리고 사람을 산 제물로 쓰려 했어. 대놓고 말이야. 네 말대로라면―"
"후우…."
내 반론을 숨소리로 끊은 파르시히는 한 박자 쉬고 입을 열었다.
"실로… 실로 인간다운 생각입니다."
"뭐?"
"저희가 왜 인간들의 사정을 이해해야 하죠? 몬스터가 인간을 죽일 때 고민하는 거 봤습니까?"
그는 제 목숨이 내게 달린 줄도 모르고,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재밌는 사실을 알려드릴까요? 성황청은 악마를 죽이지 않습니다. 봉인할 뿐이죠. 이명이 붙을 정도로 강한 악마들에게만 해당 되는 소리지만, 아무튼."
"영원을 사는 악마들에게 봉인은 긴 잠일 뿐… 지독한 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겨우 제압했더니, 다가올 후폭풍이 무서워 고작해야 봉인으로 끝낸다? 그게 인간입니다. 순간의 평화에 안주하는, 돼지 같은 족속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입가를 비틀며 흥분한다.
"전쟁을 두려워하는 건 당신네 인간들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 악마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고 말이나 했나요? 참 우스운 소리죠.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할 겁니다. 그렇기에 악이고 마. 영혼에 각인된 악의 본능을 지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백색 재앙 가올리스의 뿔을 꺾었다고 했던가요? 하.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그 사실이 퍼져나가면 모든 악마가 당신을 노릴 테죠."
"…흐."
시답잖은 경고에 작게 웃는다. 실소는 점점 커져 박소로 변했고, 곧 폐허를 흔들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되었다. 나는 터질 듯한 배를 잠시 진정시키고, 매서운 눈빛을 바꾸지 않는 파르시히의 두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흐, 흐으…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다가올 운명에 겁이라도 먹으셨습니까?"
"글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무섭기는 한데…."
"당신은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저희를 풀어준다면 제가 아르타니아 님을 잘 설득해서―"
이 세계에 떨어지고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태양처럼 빛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좆까."
"…….뭐라고요?"
"난 성황청이 아니야."
나는 그놈들과 달리.
감당할 수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