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둘의 무대 (1)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오른다. 53층에서 찾아온 휴식시간.
굳이 미궁의 구조 변화가 아니더라도 최정상에 가까워졌다는 건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못해도 3층… 빠르면 바로 다음 층에 미궁의 코어를 지키는 악마들을 만날 수 있다고 예상 중이다. 무엇보다, 몸을 타고 오르는 거멓고 불쾌한 기운… 슈리엘이 마기魔氣라 설명한 검은 기운이 몸을 감싸 오르고 있었으니까.
인간은 물론이고 어느 몬스터와 비교해도 일치하지 않는― 오직 악마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마나 파장. 특히 인간의 마나 파장과는 극상성이라 서로가 독으로써 작용했다.
아르타니아를 족칠 때 사용했던 기술이기도 했다. 악마의 몸에 내 마나만 주입할 수 있으면 굳이 현란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으니. 다만 무조건 근접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고, 아크메이지 정도가 아니면 주입은커녕 술식을 짜는 것도 버거워 실전성은 없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부조리하게도, 악마는 아니었다. 그들은 존재만으로 주변에 독기를 뿌린다. 술식을 짤 필요도, 굳이 근접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마나를 흩뿌리기만 해도 인간들은 죽어 나가니까.
슈리엘은 마기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작게 기도문을 올렸다. 나 하늘에 목숨을 맡기어, 당신의 영원한 종이 되어 세상에 검으로써 봉사하겠나이다. 대행자의 공용 기도문이었다.
나를 개처럼 따먹은 자가 이리 경건한 기도를 올리니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겨우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그는 잠깐의 묵념 후, 눈을 뜨고 내게 말했다.
"긴 시간 마기에 노출된 인간은 눈이 붉게 물들고 피부가 검게 변해버린다. 또, 폭력성이 증가하고 같은 인간을 증오하게 되지."
"……."
"그래. 내가 정신을 잃고 널 범한 것처럼."
망토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시선이 갔다가 곧바로 거둬진다. 그 불순한 의도가 다분한 시선에 픽 웃은 나는 망토를 조여 매곤, 근 한 달 동안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해진 그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 마기에 침식된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새하얀 얼굴.
"하지만… 도련님의 피부는 새하얗지 않습니까."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음…."
…정말로? 그리 난폭하게 박아댔으면서? 하긴. 죽이진 않았으니 반쯤은 맞는 말인 걸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 미덥지 않아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이런 내 시선을 보기는 한 걸까. 그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네 덕분이다."
"…아닙니다."
내 덕이라 해봤자 질펀하게 강간당해준 거밖에 더 없지 않나. 성처리 장난감이 되어준 게 뭐가 대수라고… 아. 음. 단어 선정이 좀 천박했나. 나는 낯간지러운 칭찬에 볼만 긁적였다.
"아니. 네 덕이 맞다. 덕분에 욕망이 나아가는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으니까. 채 풀지 못한 욕망이 쌓이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지.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엔 부끄럽다만, 내세울 자존심은 뭉개져 바스러진 지 오래구나. 그러니까."
짧은 침묵 이후 침을 꿀꺽 삼킨다. 그 분위기가 퍽 숙연해 쉽사리 입을 열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무거운 공기가 서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눈을 감는다. 답지 않게 입까지 우물쭈물한 슈리엘은…
"…고맙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답지 않게. 정말로 그답지 않게. 날 강간했을 때보다 더 고민하고, 진지한 얼굴로 내뱉은 말이.
…'고맙다'였다.
"…푸흡."
결국.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망토 자락으로 입가를 가리고, 헤실헤실 입꼬리를 올리며 능청맞게 웃는다. 손에 쥐여 올라간 망토 자락에 정액 마개가 끼워진 하반신이 과감히 노출되었지만, 부끄러움보다 실소가 먼저 올라왔다.
"푸흐, 후흣…."
"…뭐가 그리 웃기지?"
솔직히, 깼다. 그가 내게 보여준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귀족'이었다. 아랫사람을 험하게 굴리면서도 맡은 바에 책임을 다하고, 타인의 잘못을 질책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칼같이 인정한다. 그게 슈리엘이었다.
그런 남자가. 세상 짐이란 짐은 다 어깨에 올려놓은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다가도, 내가 아양 떨면 성욕의 화신으로 돌변해 귀축처럼 허리를 흔드는 남자가. 숙맥마냥 고맙다 한마디에 이리 고민을 하는데 안 웃길 리가 있나.
"하흐... 도련님."
"……."
"그럴 필요 없습니다."
처맞거나, 강간당하거나, 팔다리가 잘리거나 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웃은 적이 있던가. 아마 없을 거다. 나는 웃음을 멈추고 슈리엘을 바라봤다. 그는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표정을 굳혔다.
"…통찰력이 부족해 네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제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속에서 썩어만 가던 이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가 있었는지 알기는 한가."
조금은 무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에 이를 꽉 깨문다. 그는 빈정상한듯 뾰로통하게 입술을 구겼다. 그 모습이 철없는 남자애처럼 느껴져 또 한 번 웃음이 몰려왔다. 올라가는 입꼬리는 막지 않았다. 슈리엘의 표정이 빈정상하다 못해 험악하게 구겨졌지만,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왜 속으로 썩히십니까. 제게 전부 쏟아내면 되는데."
이미 볼 장 다 본 사이 아닌가. 내 성벽을 알아내 온전히 머리에 담은 자는 슈리엘, 네가 유일할 거다. 아그네스는 마지못해 알게 된 거라 살짝 달랐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지 말고 손을 뻗어라. 내 알면서도 당해줄 테니까
"…쏟아내라고?"
"도련님이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채 풀지 못한 욕망만큼 위험한 게 없다고."
"그랬, 었지."
"그런데도 아직 그러고 계십니까."
"뭐… 음?"
답답하기는. 얼굴을 찌푸리고 슈리엘을 책망하듯 노려본다. 그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내 태도에 적잖이 당황한듯했다. 정말 순수해서 그런 걸까. 수십 초가 넘도록 바라봤지만 그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자기혐오가 섞인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면… 말을 바꿔볼까요."
하아. 이 말은 제정신으로는 하기 싫었는데. 분위기를 타서 그런 건가. 왜인지 부끄러움을 감수하더라도 그를 골리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졌다. 나는 몰려드는 부끄러움을 걷어차고 머리칼을 쥐어 올려 보였다. 처음엔 약에 취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이거… 손잡이로 써볼래요?"
하지만 지금은 제정신인 채로 내뱉은 말.
"…."
침묵.
"…."
네가 반응 안 해주면 내가 부끄러워 죽는데. 아, 젠장. 부자연스러웠던 미소는 그대로 굳어 더욱 이상해졌다. 한쪽은 올라가 있고 한쪽은 내려가 있는 기괴한 미소. 얼굴이 점차 붉어진다.
-타닥. 타닥….
서로 말이 없자, 모닥불이 몸을 불사르는 소리만 주변을 에워쌌다. 모닥불 옆에 딱 붙어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불이 뜨거워서 얼굴이 붉어졌다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슈리엘의 대답은 한참이 지나서야 들려왔다.
"너란 여자는… 정말이지…."
악마와의 결전을 앞두고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보다. 시발. 나름 위로해주겠다고 뱉은 말이었는데. 최근 욕설은 자제해야겠다 결심했건만 거친 욕지거리가 목 밑까지 치달았다. 쪽팔렸다.
그때였다.
-벌떡!
"흐익?!"
깜짝이야. 갑자기 땅을 짚고 일어선 슈리엘 탓에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고개를 들자 싸늘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가뜩이나 큰 키 차이였는데, 내가 앉아버린 탓에 더 높게만 느껴지는 슈리엘의 시선이었다.
"아…."
"유진."
"도련, 님?"
"그새 잊어버렸군. 내가 뭐라고 부르라 했지?"
…참나.
어울려줄 거면 빨리 좀 반응해주지 그랬어. 마른 입술을 앙증맞은 혀로 스윽 핥곤, 마지못해 어울리는 '척' 떨리는 목소리를 낮춘다.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나는 그동안의 무수히 많은 정사 속에서 배운 '새로운 예절'을 성공적으로 기억해냈다.
"…주인님."
목을 휘감은 줄이 당겨진다.
미궁 공략 마지막 날이 찾아오기 전.
그날의 정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고…
…난폭했다.
* * *
미궁의 구조는 54층부터 극도로 단순해졌다. 갈림길이나 속이기용 막다른 길은 더는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직진만 존재하는…. 그래. '복도'가 생각나게 하는 구조로 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땅에 솟은 풀은 사라지고, 지겹도록 나오던 함정은 줄어 삭막한 느낌까지 받았다.
-촤아악!!
슈리엘은 그린스킨의 목을 가르고 뭍은 피를 털어냈다. 너머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약해빠진 몬스터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텅 빈 복도. 나오는 몬스터도 일부러 약한 것만 배치해둔 느낌이었다. 그러나, 슈리엘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마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는 나아갈수록 짙어지는 마기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나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리고 마기를 저 멀리 밀쳐냈다. 파르시히의 공간 이동 차원문을 탔을 때와 비슷한 불쾌함이었다.
"…계단, 인가."
5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고작 한 시간 만에 발견할 수 있었다. 계단 너머에서 흐르는 압도적인 양의 마기. 나와 슈리엘은 직간접적으로 알아챘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준비… 아니, 각오해라 유진."
슈리엘은 검을 꼬나 쥐고 전신에 오러를 둘렀다. 나 또한 몸에 베리어를 두르고 계단을 올라갔다. 서로의 발소리만이 불규칙적으로 울린다. 내 발소리는 맨발이라 무척 조용했고, 슈리엘의 발소리는 스파이크가 달린 탓에 굉장히 거칠었다. 그렇게 계단을 전부 올라갔을 때.
-또각.
들려서는 안 될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공간이 일변했다.
"이게 무슨…!"
세상이 휙휙 바뀐다. 어둠밖에 없던 미궁 안은 어느새 눈 뜨기 힘들 정도로 밝아졌고, 벽들은 모두 허물어져 넓은 평지를 이루었다. 바닥은 깨끗한 백색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흑장미 최상층 환상세계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마법. 나는 당황하지 않고 현상을 분석했다.
"…전이 마법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환상 마법도 아니었다. 이건 가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죽으면 진짜 죽는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이 정도의 고등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악마라곤 예상도 못 했는데.
-또각, 또각.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는 거리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울려 퍼졌다. 거슬렸다. 우리는 자세를 낮추고 하얀 대리석뿐인 공간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인간을 닮은 무언가의 형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길게 땋은 흑색 머리, 그 양쪽에 90도 직각으로 꺾여있는 검은 뿔 두 개. 풍만한 가슴을 출렁이며 우리 앞에 나타난 '그녀'는…
"…반가워. 최정상에 올라온 인간은 너희들이 처음이네."
악마였다. 저주파가 섞인 울음소리. 경계 태세가 최고조에 이른다.
"물러나라 유진!"
-쿵!
날 옆구리에 끼고 진각을 밟은 슈리엘은 땅을 박살 내고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대리석 파편이 위로 크게 솟으며 시야를 가린다. 나는 상당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거리는 충분히 떨어져 있지 않았나? 저 악마랑 우리의 거리 차이는 못해도 수백 미터 차이인…
데……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니?"
…어떻게?
"꺼져라!"
-촤아악!
슈리엘이 '바로 앞'에 나타난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검격은 악마를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얼굴이 일렁인다. 몸이 흐릿해진 악마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반응이 영 재미없었는지 지루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할까?"
-짝!
크게 박수친다. 그녀의 박수 소리는 세상을 또 한 번 바꾸었다. 대리석 타일밖에 없었던 공간은 성이 되었고, 숲이 되었고, 마을이 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일변하는 탑의 모습에 나와 슈리엘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것도 아니야… 이건 첫 무대로는 어울리지 않아… 음. 그래. 이건 어떨까?"
그녀가 끝내 선택한 무대는 '어둠'이었다. 그냥 '어둡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급한 대로 빛의 구체를 만들어 주변을 밝혔지만, 빛마저 어둠에 잡아먹혔다. 마나를 아무리 쏟아부어도 결과는 그대로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 무대에 온 걸 환영해. 곧 죽을 인간의 아이들아."
…내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