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둘의 무대 (3)
잃을 게 없는 자들을 아는가. 그들에게 죽음은 일종의 구원으로 다가가니 칼을 들이댈수록 광분하여 전장을 누빈다.
광분은 모르겠고, 난 잃을 게 없었다. 미궁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했다. 언젠가 목숨을 건 피학 자위마저 질리면 그냥 죽어버리자고. 그래서일까. 진짜 죽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계획임에도 극히 무덤덤했다. 재구축을 쓰면 어떻게든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그래야만 했는데.
왜 이토록 심장이 조이고, 조마조마한 기분이 드는 걸까.
다시 돌아와서. 난 잃을 게 없었다. 잃을 게 없었다면 지금의 상황에 무덤덤하기는커녕 되려 흥분하며 달려들었겠지. 나는 중증 구제불능 마조히스트니까.
그런데이보다 더.
너를 보낸다 생각하니 이보다 더.
터질 듯 심장이 조여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미끼… 라고?"
"미리 말하지만, 거절은 거절하겠습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그에게 여우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같은 마나 계통인데도 오러는 막지 못한다. 고로,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인원은 슈리엘이 다였다. 저 악마도 내가 비전투원이란 걸알고 있으리라. 눈앞에서 베리어를 쓰긴 했다만… 당장의 위험 순위는 나보다 슈리엘이 더 높았다.
그러니 허점을 찌르겠다.
내가 조커가 되겠다. 1초 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 동안 딱 한 번밖에 없는 기회. 악마에게 접근하여 충격파를 터트린다. 몸에 쌓인 모든 마나를 끌어 올리면 충분한 살상력이 담길 것이다.
모든 마나를 소진해야하는 공격.
반드시 밀착 수준으로 붙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충격파가 닿기도 전에 탑에 흡수될 테니.
마나를 회복하기 전까진 다른 마법은 물론 재구축마저 쓰지 못하고, 충격파의 여파를 나 또한 부담해야 한다는 도박성 짙은 계획이었지만. 나 기꺼이 주사위를 굴리겠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말하겠습니다."
이어서.
땅을 꼴사납게 구른 악마가 머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에 시선을 주지 않고 슈리엘을 향해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악마에게 붙어야 합니다. 단순 근처에 가는 정도가 아니라, 밀착한 수준으로요."
네가 아니라 내가.
슈리엘의 이마가 잔뜩 좁혀진다. 터무니없는계획. 그는 자살 폭탄 테러나 다름없는 계획에 '분노'를 보냈다. 분노로 타오른 눈동자에 증오는 담겨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책망이,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걸 미끼라 부르진 않는다."
"그런가요.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폭탄이 되겠습니다."
싱긋 미소짓는 입가에 기쁨은 없다.
문득.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빛을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아주 작은 생명이.
그렇지만… 임신했다고 확정 지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슈리엘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재구축을 해서 갈아버리면 되잖아. 고작 몇 주 피임 안 했다고 있지도 않은 아이를 걱정하는 거야? 스스로 비웃는다. 언제 관계에 매달렸다고 그러는가. 위험을 자초해 실컷 즐기고 나서는, 역으로 죽여버리는 주제에. 이번에도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애초에 그것을 생명이라 부를 수는 있는가.
그런데 왜. 네 얼굴을 보면 마음 졸이며 아이를 걱정하게 되는 걸까. 그를 좋아해서? 아니었다. 나는 슈리엘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성적인 사고로 정리한 결과다. 그럴 만도 한 게, 내게 호의를 표하는 사람이 한둘이었던가. 프루카이스가 그랬고, 라일라가 그랬고, 아그네스가 그랬고 지금. 슈리엘이 그랬다.
어쩌면.
나는 변화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이를 가지면 어떻게 될까. 그와 '친구'가 되는 건 어떨까. 마법사 특유의 무한한 호기심은 변화를 바라는 의지와 결합해 무의식적인 행동을 끌어냈다. 그렇다면 이불안감은. 너를 저버리고 내 안의 씨앗마저 저버린… 변화하지 않을 나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아그네스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변화하지 못했다. 내 목을 조르길 포기하고, 절규하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비참함. 망가진 나를 향해 스스로 내던진 조소. 속박당하기 싫다며, 더 즐기고 싶다며, 그녀의 마음을 잔인하게 찢어발기고 다시 파멸의 구렁텅이로 향한 나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번에도 그래야 할까.
너를 받아들이면 나는 어떻게 변화할까.
그리 생각했을 때. 나를 붙잡는 힘이 강해졌다.
"곁에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유진."
분노 뒤엔 아집이.
나를 붙잡으려 들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슈리엘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괴로운 얼굴을 짓곤 했다. 그는 욕망을 정제한 후에도 때때로 괴롭게 얼굴을 구겼다. 악몽이었다. 그가 잠이 들 때면 아주 가끔, 슬피 울었다. 불침번을 교대할 때마다 눈물 자국을 억지로 지운 듯한 흔적이 눈에 밟혔었다.
그는 그때와 비슷한 눈을 지으며 말했다.
"내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해 빠지진 않았다."
"…제가 언제 도련님 것이 되었습니까."
너무 힘을 주어 살까진 손이허리를 감싼다. 거칠었다. 나를 확 끌어당긴 슈리엘은 검을 바로 들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악마를 향해 검기를 뿜어냈다.
"죽이이일거야아아아아!!!!"
완전히 돌아버려 지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돌격. 카가각!! 검기를 찢어발긴 악마는 말없이 손톱을 내질렀다.
"언제부터냐니."
넓게 두 걸음 빠지며, 한 손에 든 검으로 올려쳐 공격을 흘려낸다. 보폭을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따라갈 수도 없었고. 그가 움직이자 몸이 붕 떠버린 것이다. 슈리엘은나를 들고 싸우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것으로 하겠다. 동의하나?"
카아앙! 팔이 찌릿찌릿 떨리는 게 눈으로도 보일 지경. 허나 품속에서 올려다본 슈리엘의 얼굴은 태연해 보였다. 그는 억지로 참고 있었다.
"죽어어!!!"
오른손을 올려치자 곧바로 왼손 찌르기가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은밀히 행했던 공격과 달리 난폭한 연격이었다. 올린 손을 아래로 내리 베어 손톱을 튕겨낸다. 여기까지 단 2초. 하지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오른손이 날아들었다.
대각으로 검면을 눕혀 다시 방어한다. 버거웠다. 상대는 양손이었고, 슈리엘은 한 손이었다. 나를 놓는다면 공방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손을 놓아라. 계획대로 내가 폭탄이 되어 틈을 만들 테니너는 그 틈을 노려 악마를 베어라.
"슈리엘. 다음 공격 때 저를 던지세요."
"불허한다."
"슈리엘. 제발."
"불허, 한다."
오히려, 날 붙잡은 힘이 강해졌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격렬한 공방 속에서 휙휙 바뀌는 시야. 어지러웠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밀리고 있다. 혼자서 악마를 상대하는 것도 모자라 한 손으로 상대하고 있으니 밀리는 건 당연지사였다.
"……."
잔성처가 많아진다. 가끔 크게 베여 핏방울이 내게 튀기까지 했다. 온기를 잃지 않아 뜨거운 피가 뺨에 뿌려진다.
그 피가. 온기를 잃지 않은 피가.
내 이성을 뒤흔들었다. 왜 나를 대신해 다치는 거야. 다치는 건 나 하나만으로 족한데. 정말로, 답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아아, 이기적인 나의 도련님.
-후으.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고-
"슈리엘. 미안해요."
발을, 걸었다.
그의 눈이 크게 뜨인다.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눈동자에 비추어진 내 모습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
방어하면서 무너지는 자세를 잡기 위해선 나를 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목이 잘릴 테니까. 양자택일을 강요받은 슈리엘이 택한 선택지는 '손을 놓는다'였다. 그도 어쩔 수 없었겠지.
툭. 손이 놓이면서 허리를 감았던 압박감이 사라진다.
나는 반동을 이용해 악마에게 뛰어들었다.
"거슬려어어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나를 향한다.
거리. 부족했다. 더 접근해야 했다.
어떻게?
그런가. 그러면 되는 건가.
몸을 포기하는 공격은.
내 특기였지.
"유지이인!!"
푸욱. 살이 찢기는 흉측한 사운드.
"케윽, 흑."
가슴에 날카로운 손톱날 세 개가 들어온다. 완전관통. 두부 살처럼 쉽게 들어간 손톱은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입에서피가 주룩주룩흐른다.
살짝 쇼크가 왔다.
암전하려는 의식을 강제로 깨우고 마나를 끌어모은다.
탑이 흡수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쿠그그….
내 몸이 푸르게 빛난다.
"뭐, 뭐야…?"
날 꼬챙이처럼 들어 올린 악마는 입을 벌리고 손을 빼내려 했다.
…하.
나는 이미 늦었다고, 속으로 비웃었다.
그렇게 순수한마나의 응집체가.
나와 악마 사이, 3cm의 간격에서 오른손을 뻗자.
폭발했다.
-…진 ……일…라….
-…르딜…나……아…파….
그때부터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의 절규와, 누군가의 비명이 섞이고 섞여, 꺼져가는 의식 사이에 비집고 들어와 사고를 방해했으니까. 폭발이 생각보다 작았다는 건 기억했다. 성인 남자 주먹만 한 크기의 폭발. 하지만 크기가 작다고 위력까지 작은 건 아니었다.
그 파멸적인 위력의 폭발에 나도 악마도 저 멀리만치 날아갔다. 얼마나 날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날아가기직전.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도했을 뿐이었다.
* * *
"코르디이이일…!!! 나… 아파아아아!!!!!"
저 멀리 악마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다리를 걸고 악마에게 뛰어든 유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는 피투성이에, 오른팔이 조각조각 난 채로 힘없이 날아간 유진을 보았다.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게 충혈된다.
대행자의 임무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어째서 날 위해 몸을 던진 거냐. 다치고 피를 뿜는 건 나로 족하단 말이다. 이길 수 있었다. 너를 지키면서 저 악마를 박살 낼 수 있었단 말이다.
오러가.
검게 물든다.
-쿠궁!
그때였다.
뚝 끊기듯 악마의 울부짖음이 멈추었다. 날아가던 유진은 허공에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 속에 박제된 듯한 모습. 세상이 멈추었다.
동시에 하늘을 비추던 황혼은 꺼지고, 바닥을 이룬 대리석은 스러져 사라졌다. 하얀빛 밖에 없는, 태초로 돌아가려는 공간의 회귀에 슈리엘은 멍하니 검만 꽉 쥐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계단처럼 밟고 내려오는 저것은.
검은 뿔을 관자놀이 양쪽에 달고 있었다.
"…대행자."
정갈한 흑단발의 악마.
싸웠던 악마와 다르게 남성체였다. 새롭게 출현한 악마는 그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좋지 않았다. 슈리엘은 금방이라도 오러를 터트릴 기세로 눈앞의 악마를 압박했다. 악마는 눈도 깜짝 안 하고 평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행자 슈리엘.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거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래라니. 인간과 악마 사이에?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예. 베어도 좋습니다."
"…."
"다만. 절 죽이면 탑은 무너집니다."
뛰쳐나가려는 손을 가까스로 멈춘다. 슈리엘은 눈을 부릅뜨고 악마를 바라봤다.
악마는 슈리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어떻게… 추방 진언을 뚫고 마법을 쓴 거죠? 도대체, 당신 동료는…"
두려움이 깃든 목소리.
"…마왕이라도 됩니까?"
악마는 슈리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유진을 두려워했다. 그는 폭발의 때를 잊지 못했다. 탑이 마나를 빨아들이는 과정에서 과부하가 일어날 줄 누가 알았던가.
"유진은… 인간이다."
"그게 인… 하. 됐습니다."
좁은 공간이지만 현실을 일부 조작하는 포르딜의 왜곡의 식.
모든 마법을 추방시키는 코르딜의 추방 진언.
범위는 생각보다 좁았고, 준비해야 할 것도 산더미처럼 많아 실용성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조건만 만족한다면 가공할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능력의 통합.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부리니 그들이 지정한 성역에서 감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특히나, 포르딜의 손톱은 오러를 찢어발길 수 있어 약점조차 없었다. 슈리엘이 성황청 직속 대행자가 아니라 일반 기사였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거다.
그런데.
뚫렸다.
눈을 잃어 싸울 수 없는 코르딜은 유일한 전투원이 리타이어하자 황급히 시공간을 조작했다. 그는 층을 리셋시키고, 정신력이 바닥이 나 '사물' 취급받는 유진과 포르딜을 동결시켜버렸다. 능력의 원주인인 포르딜이 쓰러져 지속시간의 절반인 30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대치 상태에서 포르딜을 살리려면 30분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 어깨 아래로는 전부 박살이 났고, 안면은 불타버렸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이는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코르딜은 너도 같은 처지가 아니냐면서 슈리엘을 유혹했다.
"그런 이유입니다. 거래를 제안합니다. 지금도 시간이…"
대행자.
악마 사냥에 미친 자들.
코르딜은 그가 제안을 거부하고 자신의목을 벨까 걱정했지만-
"알겠다. 뭘 하면 되지?"
슈리엘은 즉답했다. 코르딜은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기괴한 기운의 오러에 식은땀을흘리며 말했다.
"…지금도 시간이 줄고 있습니다. 29분 후면 동결이 풀리고 다시 피를 흘릴 겁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의 방책이 있습니다. 당신의 동료는… 인간이라고 했습니까. 내려가 사제를 만나면 되겠군요. 탑을 벗어나도 효과는 지속되니-"
"30분 만에 탑을 내려가라고? 죽고 싶은 건가?"
"하아…."
한숨.
그는 탑을 조작해 워프 게이트를 하나 생성했다. 1층으로 향하는 일방통행 차원문.
"이곳으로 나가면 1층으로…."
-터억.
눈 깜짝할 새에.
슈리엘은 유진을 챙기고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