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외곽으로 (1)
더욱 자극적인 플레이를 위해서 힘을 숨기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상대방이 방심할수록 '리얼리티가 사는 나로선 숨기는 게 이득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까지 숨길 이유가 없었다. 기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답답하게 왜 숨기겠는가? 문제는 '어디까지' 밝혀야 하는가이다. 눈앞에서 팔을 재구축할까? 그러곤 아크 메이지라는 걸 밝힐까? 굳이 아크 메이지라 밝히지 않아도 됐다. 내 힘을 증명하는 존재는 오로지 마법이니 그에 맞는 마법을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그냥 말하기로 했다. 말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슈리엘의 몸에 염동력을 걸어 내 쪽으로 당긴다. 그는 몸을 통제하려는 힘에 오러를 둘러 저항하려다, 곧 내가 그런 것임을 알자 포기했다. 그대로 내 가슴팍에 얼굴을 처박는다. 나는 가슴에 코를 박은 슈리엘을 쓰다듬으며, 정수리에 얼굴을 맞대었다. 시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 슈리엘."
"새벽이라, 대담해진, 건가?
그는 어정쩡하게 얼굴을 파묻은 자세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웅얼거리며 말했다. 고개를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옷 너머 말랑말랑한 가슴이 얼굴에 짓눌린다. 나는 압박감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더 강하게 슈리엘을 껴안았다. 미로 정원에서 내게 그랬던 것처럼, 숨도 못 쉬게 끌어안는다. 근력의 차이로 완벽한 재현은 하지 못했지만 찡그린 얼굴로 만족하기로 했다.
"저는 슈리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강한 마법사예요."
집무 책상 위에 올려진 물병을 염동력으로 집어든다. 군청색? 아니, 그보다 더 짙은 암청색. 뭐가 됐든 호숫가에서 퍼올린 물 치고는 부자연스러운 색이었다. 나는 두둥실 떠오른 물병을 바라보며 눈을 떴다. 인간 유진의 눈이 아닌, 마법사의 눈을. 개안開眼이다. 눈이 파랗게 물든다. 본질을 꿰뚫어보는 아크 메이지의 눈은 물의 구성 요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물에 담긴 마나는 내 것이었다. 내가 내 마나를 못 알아 볼 리 없으니 확실했다.
"네가 힘을 숨기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F급 마법사니, 아무 연고도 없는 평민이라니 그런 헛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
"제 변명이 지나가는 개새끼도 안 속을 말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말하려는 건, '고작' 그따위의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드드드… 물병이 흔들린다. 이윽고 몇 초가 지나자, 쨍 하고 깨져버렸다. 그러나 물이 쏟아진다든가, 유리 파편이 튀는 일은 없었다. 파편은 깨지자마자 먼지가 되어 스러졌고, 물은 허공에 떠올라 무중력 상태처럼 꿀렁거렸다. 나는 물을 끌어와 잘린 팔에둘렀다.
"제가 탑에서 어떻게 폭발을 일으켰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마법 추방자의 성역을 무시하고 그만한 위력의 대폭발을 일으키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마나를 쏟아부어야 할까요."
"…여자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지."
"동감이에요. 하지만 너무 숨기는 것도 그닥 매력적이진 않더라고요. 비밀 하나를 밝히자면, 카할리아의 호수가 그렇게 된 건 다 저 때문이에요. 탑이 대폭발의 마나를 흡수하다 못해 역류… 해버렸지 뭐에요."
"대호수의 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감당 못 할 말은 뱉지 않는 게 상책이다."
슈리엘은 탑이 그간 흡수해온 정기와 마나가, 탑의 정지와 함께 방류하면서 호수가 변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곤 내가 마법을 쓴 건 정말 우연일 뿐이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음.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글쎄요. 그런 게 중요할까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작 한 병 크기의 물은 점점 늘어나더니, 팔의 모양을 갖추었다. 내 몸에서 나온 마나를 사용해서 그런지 어려움은 없었다. 마나의 움직임을 감지한 슈리엘은 나를 조심스레 밀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재구축. 사라진 팔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팔을 감싼 호숫가의 물은 핏줄이 되고, 힘줄이 되었다. 근육이 생성되는 모습은 조금 그로테스크했다. 시뻘건 근육 위로 새하얀 피부가 덧씌워지고, 곧 모든 신경 감각까지 빠짐없이 복구되었을 때, 비로소 재구축을 끝낼 수 있었다.
갓 만든 오른팔을 쥐락펴락하며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한다. 한동안 허전했던 오른팔이 돌아오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팔은 생각보다 멀쩡하게 움직였다. 몸 전체가 아닌 오른팔만 재구축을 해 이상이 생길 줄 알았지만, 그런 거 없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는 슈리엘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어주었다.
마도의 시작과 끝은 창조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대가로 신의 기적을 모방한다. 신성력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감히 무시 못 할 권능이라는 건 모두가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모든 마법사가 추구하는 본질적 목표인 '창조'에 다가가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건 '파괴'에 가깝다. 불덩이를 만들고 내던진다. 그것에 만족한다. 그게 현실이다. 파괴 이전에 창조가 있음을 망각한 이들이 너무 많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는 슈리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마법사라고."
나는 마법사다.
그래서.
마법의 끝을 엿본소감은 어떤가.
신의 기적이 현실로 나타나는 이 세계에서 잘린 팔다리쯤이야 손쉽게 붙일 수 있지만, 그것은 신성력이 가미됐을 때의 이야기. 신체 재구축은 별거 없어 보여도 어지간한 마법사, 아니 대마법사도 힘들어하는 미친 짓이다. 자기 몸을 이루는 구성 요소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마나로 하나하나 대응하며 연성해야 하니까. 뇌가 수십 개라도 부족한 기술이다. 신성력에 정통한 대행자 슈리엘이라면 내가 얼마나 높은 격의 마법사인지 잘 알 터이다.
"…하."
"실망했나요?"
"아니."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경험하면 허탈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허탈감은 곧 거부로 이어진다. 삼킬 수 없는 건 뱉어내야 함이 맞기에. 그런데 슈리엘은, 오히려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그대로 슈리엘의 손에 끌려갔다. 꼭 껴안기 좋은 체구는 무릎 위에 인형처럼 올려졌다. 그는 내 몸 이곳저곳을 찌르고 만지며 말을 보류했다. 그렇게 나를 가지고 놀던 슈리엘은,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지고 싶구나.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 더 심해졌어. 이토록 욕심이 난 적은 처음이다."
그의 소유욕이 들끓는다. 나는 이글거리는 슈리엘의 목소리에 답했다.
"…절 가지려면 노력 좀 해야 될 겁니다."
나를 소유하려면 쉽지 않을 거다. 아니. 불가능하다 말할 수 있다. 난 어디에 속박될 사람이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종종 만나겠지만 내가 그에게 종속되는 일은 없을 거다. 애초에 이 아이는 환영받지 못할 아이니까. 아이는 내가 책임지겠다. 그러니 이런 나를… 가지려면 많은 걸 포기해야 할 거다. 슈리엘은 가소롭다며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부디, 네 맘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해보지."
* * *
내 진짜 힘은 함구하기로 했다. 슈리엘 본인도 날 억지로 묶어두려 하다간 역효과만 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날은 슈리엘과 밤을 지새웠다. 지새웠다 말은 해도 고작 3시간이었지만, 그가 눈을 감을 때까지는 같이 있어 주었다. 도중에 덮칠까 싶어 몸에 힘을 풀었으나 아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슈리엘을 깨우고, 칼버드나 시녀가 찾아오기 전에 몰래 방을 빠져나간다. 내가 향한 곳은 내 방이 아니라 저택 정문이었다. 밖으로 나갈 거다. 성황청으로 출발하기까지 조금 남았지만, 그때까지 저택에 남아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있어 봤자 슈리엘한테 따먹히고, 하이라크 눈치만 봐야 할 텐데 뭐하러 있겠는가. 조찬은 거른다. 하이라크가 밥에 이상한 약이라도 넣었다간 그날로 백작가 멸문이다. 슈리엘을 위해서라도 나가는 게 맞다. 허락은 받았다. 손수건과 돈도 받았고.
밖은 조금 이른 아침 해가 떠 있었다. 바람이 산산하게 분다. 나는 휘날리는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정문을 나섰다. 호위는 없다. 밖에서까지 누굴 데리고 싶지는 않았다. 잘 다져진 땅을 거니며 생각을 정리한다. 생각 없이 밖으로 나온 건 아니다. 일단, 2지구에 방문해 성류회 신전에 들를 거다. 인사 차원에서 방문하는 거지만 세멜을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더 컸다. 가서 상당할 것도 있었고.
신전까지 거리가 좀 있어 일찍 나온 것도 있다. 신전에 도착할 즈음엔 9시 정도가 아닐까. 10시에 평일 아침 예배가 시작된다 하니 얼추 맞춰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아름다운 푸른 물병이 곳곳에 장식된 거리를 눈에 담으며 신전으로 향했다. 그때,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은 백발의 여사제와 눈이 맞았다. 하 테리알. 그녀는 거리의 먼지를 쓸고 있었다.
"아… 자매님! …으음?"
테리알은 빗자루를 꼬나쥐고 내게 달려왔다. 하지만, 곧 당혹으로 물들었다. 분명 첫만남서 잘려있던 오른팔이 멀쩡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차피 이거 다시 잘라야 해. 하이라크나 칼버드가 보면 곤란하다. 최고위 사제를 만나 회복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루셸리니에 그런 사제가 없을뿐더러 물어보면 머리가 아팠다. 그럴 바엔 다시 자르는 게 나았다.
"파, 팔이… 다시 생겼네요?"
"…그렇게 됐습니다."
"축하해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는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고 기뻐해 주었다. 나는 느껴지는 순진무구함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손을 저어 진정시켰다. 인사는 끝이다.
"고마워요 테리알. 혹시, 부신관 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으음, 또 축복을 받으시려는 건가요?"
고개를 저었다. 축복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나눌 얘기가 있다. 산부에게 수도 없이 축복을 내린 그녀라면 육아에 일가견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른바 육아 상담이다. 부끄럽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셰멜 밖에 없었다. 돈은 충분하니…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테리알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부신관님은 외곽으로 파견 나가셨어요. 으음, 일정표에 따르면… 아마 나흘은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외곽?"
"영주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변두리를 뜻해요. 뒷골목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손이 닿지 않아 개발조차 되지 않은 지역을 외곽이라 부르고 있어요. 괴물들도 간간이 나온다고 하는데… 저는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저도 언젠가 그곳에 파견되는 날이 오겠죠?"
"그런 곳에 왜 부신관님을…?"
아, 젠장. 셰멜이 없다니. 4일이면 그 전에 성황청으로 떠나야 했다. 그럼 어디 가지. 저택은 돌아가기 싫었다. 테리알은 안색이 어두워지는 나를 위로하며 말을 이어갔다.
"외곽엔 동부에 정착하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들이 많거든요. 특히나 외곽은 사람 손이 닿지 않아, 자연 그대로인 상태가 대부분이라… 신전에서 주기적으로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어요. 내버려뒀다간 불온 신앙이 퍼질 수 있거든요."
"암덩이들이군요."
"그, 그런 말 하면 못써요!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옳지 못해요….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요. 자아, 자매님도 저와 같이 기도드리며…."
"죄송해요. 아직은 관심이 없어서."
글쎄. 모두가 그런 자격이 있다면 세상이 이 꼴로 돌아가진 않았겠지. 나는 옅게 한숨 쉬며 등을 돌렸다. 테리알은 충분히 기분 나쁜 상황임에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쓸데없이 착하긴. 그래도, 저런 사람이 좋았다.
그보다.
외곽. 외곽이라…
"잠깐만요 테리알."
"네?"
"외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