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외곽으로 (3)
"위험해요. 돌아가세요."
테리알은 개구멍을 통과할 때 벗어뒀던 장갑을 착 소리 나게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갑 위로 새겨진 푸른 물병이 희미하게 빛난다. 그녀의 맹한 얼굴을 보아하니 왜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네?"
"외곽 내부로 진입했다 부신관님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겁니까. 전에도 엄청 깨졌다고 했으면서…. 뒷골목을 벗어날 때까진 동행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하, 하지만…."
길은 기억해뒀으니 빠르게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돌려보내자. 그리 결심한 나는 클린 마법으로 더러워진 사제복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 "유진 님은 마법사였네요!" 하는 감탄이 들린다. 테리알은 빙그르르 돌며 깨끗해진 자신의 사제복을 펄럭였다. 그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니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내가 망가지는 건 오히려 좋다. 하지만 타인이 망가지는 모습을 직관하는 건 아직 정신적으로 무리였다.
진짜 '악의'를 느껴보지 못한 이들은 인간이 어디까지 추악해지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평생을 신전에서 자라, 인간관계라곤 동기 사제나 나이 지긋한 신도 밖에 없어 보이는 테리알이, '진짜 악의'를 맛보기라도 한다면… 굳이 생각하지 말자. 그러기 전에 막으면 되는 거니까. 테리알은 내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침울한 얼굴로 쭈뼛거렸다.
"으으, 그게… 진짜 안 될까요? 아직 보여주고 싶은 것도 다 보여주지 못했는데에…"
"하아…."
아, 마음 약해지게.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결심이 조금이나마 흔들렸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곤 어디 말해보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테리알은 빵긋 웃으며 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말해보세요."
"호숫가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호숫가가 있어요. 구멍에서 오십 보만 걸으면 보일 정도로 가까워요."
"그럼 그것만 보고 돌아가는 거에요? 네?"
"네! 정말 고마워요!"
꺄르르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을 움찔 떨었으나 정작 테리알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나 태연한지 내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예를 들어 또래 남자애라든지. 자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플래그를 꽂아 넣는 모습을 보니, 언젠가 요물로 자랄 게 분명했다.
나는 호숫가로 끌려가는 내내 그녀에게 훈계했다. 귀족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건 여러 의미로 위험하다고. 현대였다면 백치미라 좋아했을지 몰라도,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순수함은 단점만 부각됐다. 테리알의 외모에 혹한 귀족들이 조금만 유혹해도 쉽게 놀아날 게 뻔했다. 셰멜이 그걸 내버려둘 리 없지마는…이번처럼 자리를 비운다면?
"테리알. 혹여 저 말고 다른 귀족이 따라오라고 하면 절대 따라가면 안 돼요. 특히나 상대가 남…"
"도착했어요!"
"…듣고 있어요?"
하아. 모르겠다. 셰멜한테 일러두면 어련히 잘하겠지. 나는 말하길 포기하고 시선을 돌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호숫가가 보였다. 사람 두 세 명이 안에서 놀기 적당한, 평범한 크기의 호숫가. 테리알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장갑 너머 체온이 전달될 정도로 내 손을 꽉 쥐었다. 아프진 않았다. 여자애 근력이 세면 얼마나 세다고.
"으음, 유진 님?"
"안 돼요."
그녀는 나머지 손을 포개며 말했다.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뻔히 보였기에, 칼같이 차단했다. 내가 애도 아니고 물장난에 재미를 느낄 나이는 아니다. 편견일지는 몰라도 나는 그랬다. 하늘을 바라본다. 해는 뉘엿뉘엿 떨어져 흐릿해진 세상 사이로 희멀건 한 빛을 비추었다. 동시에 시원한 바람이 날린다. 테리알의 말대로 이곳은 바람이 모이는 장소였다. 확실히, 이런 곳에 옷 널어두면 빨리 마르겠네.
묘하게 차분해진 나는 근처 돌덩이에 걸터앉아 바람을 맞이했다. 산 속 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왠지 모르게 나른한 기분이 몰려든다. 이게 피톤치드인가 뭔가 하는 건가. 뭐, 별로 중요하진 않았다. 대자연은 존재만으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기운을 발산하기에, 나름의 기분 전환으로는 충분했다. 테리알은 어딘가 느슨해진 내 얼굴을 보더니 이때다 싶어 밀어붙였다.
"딱 한 번만 더 안 될까요? 누구랑 같이 놀러 오는 게 소원이었단 말이에요. 부, 분명 재밌을 거에요!"
"……."
어차피 셰멜은 외곽에 나흘이나 처박혀 있는데다가, 성황청으로 떠나기까진 이틀이나 남았고… 생각이 깊어지니 나른한 몸이 더욱 나른해졌다.
"유진 님?"
으음…
그래.
강압적으로 군다고 바뀌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초탈한 내게 조급함이란 가볍게 떨쳐낼 수 있는 감정이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삼림욕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니지만, 이렇게 원하는데 한 번쯤은 어울려줘도 나쁘진 않겠지. 털썩. 돌덩이에서 내려온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테리알은 말없이 몸을 푸는 나를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나고, 뻐근한 목을 뚜득 소리 나게 돌리며 스트레칭을 마쳤을 때.
"좋아요."
대답한다.
테리알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나랑 같이 노는 게 그리 기쁜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참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나는 목에 두른 케이프를 벗어 돌덩이 위에 올려두고 말했다.
"옷은 벗고? 아니면 입은 채로?"
"평소엔 속옷만 입은 채로 했는데… 유진 님은 뭘 더 선호하세요?"
"좋을 대로 하세요. 어차피 보는 눈도 없는데."
대충 손짓한 나는 탈의를 시작했다. 가슴께에 달린 리본 모양의 끈을 풀자, 헐렁해진 옷 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난다. 나는 그대로 상의를 올려 뒤집어깠다. 묶어두었던 붉은 머리칼이 옷에 쓸려 풀린다. 생머리가 된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저 옷을 벗었다.
"와아…! 피부가 굉장히 하야네요!"
테리알은 내 하얀 피부를 보곤 연신 칭찬하기 바빴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라 하던가. 전에 남자였다고 여자 몸에 흥분하지는 않더라. 내 몸을 포함해서 다른 여자의 몸도.별개로 최근, 남자 몸을 봐도 별 반응이 오지 않는 걸 보면 어딘가 망가진 게 분명했다.
내 탈의를 직관하던 테리알은 아차, 했는지 자신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제복은 일체형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딱 달라붙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상의를 치마로 덮은 뒤, 끈으로 묶어 허리를 고정하는 구조. 옷이 좀 커 보이더니 저거 때문이었다. 허리에 달린 끈을 당기니 폭넓은 치마가 스르륵 내려간다. 그러자 원피스처럼 기다란 상의가 아슬아슬하게 속옷을 가렸다.
탈의가 끝나자, 우리는 옷을 고이 개어두고 돌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동시에 호숫가로 눈을 돌렸다.
"꺄흣!"
"읏…."
입수.
물은 차가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미적지근 했다. 테리알은 기분 좋은 얼굴로 물장구를 쳤다. 대체, 이런 활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신전 일에 만족하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걸까. 혹시 나처럼 위험한 상황을 즐기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냈다. 테리알이 나랑 같은 변태라니… 상상도 하기 싫다.
드나드는 사람이라곤 테리알 밖에 없는 외곽 초입.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혹시모르니 주변에 결계를 쳐놓았다. 대단한 건 아니고 누군가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내게 신호가 오는 간단한 술식이다.
"히히. 어때요? 재밌죠?"
"네, 뭐."
그녀는 내게 물을 뿌리며 바보 같이 웃었다.
…이게 뭐하는 짓일까 진짜. 덜 자란 소녀와 물장구를 치니 현타가 몰려왔다. 그래도, 웃는 모습 보니 기분은 좋네.
"언니라 불러도 돼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가 장난을 치면, 적당히 놀아주며 상대해준다. 그런데… 언니 언니 하고 달라붙을 땐 진짜 식겁을 하며 떼어놓았다. 아무리 같은 성별이라 해도 속옷만 입은 채로 달라붙다니? 이새끼 알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렇게 30분을 내리 놀아줬을 때.
"잠깐만요."
"네?"
신호가 왔다.
나는 거칠게 물을 털어내곤 테리알에게 명령했다.
"돌 뒤에 숨어요. 말하지 말고, 절대 나오지 마세요."
신호가 빠른 속도로 갱신된다. 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외곽민일 가능성이 컸다. 끈을 하나 만들어 거치적거리는 머리를 한데 모아 묶는다. 물기를 먹은 붉은 포니테일은 내려앉아 무게를 더했다.
"후우…."
30분만 놀아도 바로 신호가 오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안 걸리고 다닌 거지. 테리알이 그동안 어떤 이도 만나지 않은 건,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방문 시간대가 달라서 그런가, 아니면 나한테 뭔가 있는 건가.
-부스럭.
테리알은 휙 바뀐 분위기에 숨을 죽이고 웅크렸다. 이윽고, 너머에서 풀 소리가 들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너머의 존재에게 시선을 쏘았다.
"허윽… 크윽…."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이는 건장한 사내였다. 그런데,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거의 다 헤져 형체를 잃어버린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는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추가로, 그는 무장한 상태였다. 피 뭍은 단검과 장전된 석궁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디서 대판 싸우고 온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경각심보다 흥미가 돋았다. 무엇이든 호기심으로 해석하는 마법사의 이성이 고개를 내민다. 나는 물가 밖으로 나오며 사내에게명령했다.
"무기를 거두고 신분을 밝히세요. 저는 대행자 전속 시녀 유―"
―퓩!
문답무용.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왔다. 명령을 들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곧바로 화살을 쏠 줄은 몰랐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정신을 가속했다. 순간, 세상이 느려진다. 천천히 다가오는 화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이걸 맞을까, 피할까, 아니면막을까. 1초 채 되지 않는 시간을 5분으로 늘린 나는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냥 맞자.
"까흑?!"
대신, 맞아도 별로 상관없는 부위로. 나는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볼트가 살갗을찢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온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진짜 고통'에이를 꽉 물고 웃음을 참았다.
"히끅."
돌 뒤에서 겁에 질린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반동으로 몸이 쓰러진다. 퍼지는 혈향. 물가 위로 빨간 물감을 그리듯 피가 번져나간다.
나는 겨우 땅을 짚고 일어나, 왼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박힌 화살을 바로 빼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지만 내게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출혈이 가속할수록 눈에 독기가 오른다.
"너는, 그놈들인가?"
남자는 영문모를 말만 중얼거렸다. 왼 어깨를 부여잡고 사내를 바라본다. 그는 힘없이 볼트를 장전했다. 문답무용으로 석궁을 쏜 사람치고는 초연한 얼굴이었다. 지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목적이 뭘까. 속옷 차림에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성욕은 아니었다.
사내는 눈동자를 살살 굴려 돌덩이 위에 개어놓은 옷에 시선을 두었다. 여전히 방아쇠에 손을 올린 채로, 천천히 옷을 눈에 담았다.
"……!"
그의 얼굴이 험악해진 건 테리알의 옷을 발견했을 때였다. 푸른 물병이 곳곳에 새겨진 새하얀 사제복. 사내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그때. 뒤편에서 대량의 신호가 갱신됐고, 여성으로 추정되는 이의 외침이 들렸다.
―멈추지 않으면 죽이겠다!
"큭!"
사내가 반응한다. 명백히 쫓기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내 목을 쥐었다.
"케, 케흑!"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라."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며 천천히 뒤로 빠진다. 몸에 힘이 들어가자 왼 어깨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파악하곤 순순히 목을 내어줬다.
"목표 발견!"
"척살해라!"
너머에서 사제…로 보이는 여성 셋이 튀어나왔다. 내가 판단을 보류한 이유는 그녀들의 사제복이 검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복장의 디테일도 테리알의 사제복과 큰 차이가 있었다. 성류회의 상징인 물병이 새겨져 있는 건 똑같았지만, 흐르는 물의 색은 파란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다. 마치 물 대신 피를 흘리는 모습. 게다가. 들고 있는 무기를 보면 도저히 사제라 생각할 수 없었다. 사슬 낫에 모닝스타… 한 명은 판금 갑옷까지 입고 있었다. 저 살벌한 복장을 보고 누가 사제라 생각한단 말인가.
"저, 정지!!"
사슬 낫을 빙빙 돌려 내던지려 한 여사제는 반나체로 들려있는 날 보더니 크게 당황했다.
"인질이다! 모두 공격중지!"
혹시, 자원 봉사라는 게 이런거였나.
…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