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엘프가 세계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하이브 마인드마냥 정신이 세계수에 종속되어 있다든가, 엘프는 세계수에서 태어난 종족이라는 등 괴소문이 돌고 있지만… 엘프들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그들은 종족의 씨가 마르는 것보다 세계수가 다치는 걸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과거 악마침공 당시 세계수가 손상된 이후, 엘프들은 종족의 '모든' 힘을 세계수를 지키는데 끌어다 썼다. 인력, 마법, 물자 등 세계수를 지킬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전부. 설령 그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말이다.
세상의 모든 풀과 나무를 세계수의 산물, 즉 세계수의 자손으로 보는 엘프가 이런 선택을 한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태초부터 풀뿌리와 함께한, 자연을 숭배시하는 종족이 나무를 베고 땅을 파헤친다니. 내 머릿속 엘프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행보였다.
"…높네요."
그리고.
저 거대한 회색빛 방벽은 엘프들의 광적인 집념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턱이 빠지라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이 세워진 방벽을 보았다. 오십 미터는 훌쩍 넘기는 초거대 방벽. 위로 쭉 뻗은 대삼림의 풀들도 방벽의 위용을 가리지 못하고 축 늘어진다. 이 거대한 나무들조차 벽과 비교하니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엘프가 파르늄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방벽을 더 단단하게 지을 수 있다는데 왜 싫어하겠나.
파르늄은 녹여서 특정 재료와 섞으면 초고강도로 경화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 견고함이 오러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 보통 무기로 벼려내지만, 엘프들은 방벽의 강화 말고는 별 관심이 없었다.
'…거인 나올 것처럼 생겼네.'
나는 이상한 익숙함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계수를 중심으로 빙 둘러진 초거대 방벽은 저게 끝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 경외심이 들 정도로 방대한 벽은 놀랍게도 총 네 겹이 존재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벽은 제 4방벽. 가장 바깥에 세워진 바르하이야 구區 외벽이다.
"그놈들이 벽 너머로 숨어들었으면 골치 아픈데…."
슈리엘은 피부에 달라붙은 날벌레들을 내치며 투덜거렸다.
엘프들의 영역, 아인들의 나라. 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거대한 회색빛 방벽은 곧 국경이었다. 이 너머로는 제국의 영토가 아니다.
슈리엘은 대행자로서 활동하며 상당한 면책 특권을 받았지만, 그것이 국경 너머까지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이른바 조사권한의 부족. 이곳저곳 싸돌아다니는 슈리엘에게 골치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기가 검출된 지역이 있는 걸 보면 어떤 악마든 이곳을 지나간 건 분명해. 대삼림에 없다면 벽 너머 마을로 진입했다는 뜻이겠지."
헛다리 짚은 건 아니라 무척 다행이었으나, 말 그대로 어떤 악마인지 모른다는 게 가장 문제였지만 말이다.
마기가 검출되는 것 자체는 흔한 일이다. 저급 악마가 잠시 머물다 갔을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다른 네임드 악마가 있었을 수도 있다. 전자면 다행이지만, 후자면 더 심각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확답했다.
"…쌍둥이 악마가 맞아요."
"어떻게 확신하지?"
"마나 파장. 마기를 읽었어요. 탑에서 느꼈던 마기와 동일한 파장이에요."
냄새가 났다.
맡아본 적 있는 익숙한 냄새가.
내 말을 불신하기엔 그간 보여준 능력들이 상상을 초월했다. 슈리엘은 내 말을 들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판단을 내렸다. 쌍둥이 악마는 현재 벽 너머 아인들의 도시로 숨어든 상태다, 라고.
"그놈들이 아무리 깊게 숨어봤자 3방벽을 넘지 못할 거야."
일반적으로 접근 가능한 구역은 제 3방벽 내부에 위치한 가르퀴나 구까지다. 그 이상으로는 엘프들의 성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만 해도 활로 쏴죽일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애초에 3방벽에서 2방벽으로 넘어가는 입구조차 없었다. 외교적 문제? 그딴 건 신경도 안 쓴다. 막말로 황제가 찾아와도 똑같이 응대할 것이다.
"마음 같아선 각 구마다 문을 봉쇄하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고 싶지만…"
허락해줄 리 없겠지. 뒷말을 삼킨 슈리엘은 지도를 펼치며 예상 경로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찌익. 수정구를 통해 보고받은 지역은 빨간 펜으로 엑스자를 그었다. 마기가 검출되지 않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실베흐린 대삼림은 이미 수색조가 돌아다니며 마기를 체크하고 있었다. 예측 이동 경로가 좁혀진다. 이대로 하루만 더 투자하면 어떤 입구를 통해 마을로 진입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아인들의 나라로 들어갔다면. 부족장들의 협조를 구해야겠어."
그래서 더욱. 현지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카할리아에서 대놓고 탑을 세웠던 놈들이다. 인간과 수인들의 눈을 속이고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렇게 풀과 가지를 꺾으며 조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하늘 위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동시에 바람이 멎는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경갑을 껴입은 은발의 인간, 아니. 은발의 엘프 한 명이 우리를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수상한 인간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대삼림을 들썩인다는 소식을 들었어. 목적을 밝혀. 안 그러면,"
"죽일 건가?"
"응. 지모신님을 위협하는 놈들은 죽어 마땅해."
"하여간 귀쟁이들 소식 하나는 빨라가지고."
교구장이 경고한 엘프 순찰병이었다. 겨눈 화살촉의 끝에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마법이었다. 곧바로 분석한다. 화살촉의 끝에는 상당히 높은 경지의 마법이 새겨져 있었다. 마탑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하고, 강력하고, 대처 불가능한 고위 술식이었다. 나조차 힘을 쓰지 않으면 주변 피해 없이 막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도련님. 괜히 도발할 생각 말고 파르늄이나 꺼내세요."
"흠. 굳이?"
"…쏴도 안 막아줄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농담이다. 살벌하긴."
슈리엘은 칼버드를 시켜 파르늄 주머니를 꺼냈다. 한 사람당 하나씩 지급된 주머니. 총 세 개를 꺼내 보인다. 은발의 엘프는 당긴 활시위를 거두지 않은 채 주머니를 응시했다.
"저게 뭔지 말해."
무감정한 목소리, 무감정한 얼굴로 명령한다. 자연의 축복을 받아 뛰어난 미색을 가진 엘프가 저리 말하니 그조차도 매력적이었다. 슈리엘은 그 미모에 혹하지 않고 주머니를 열었다.
"…!"
엘프의 눈이 크게 뜨인다.
순간, 무감정한 얼굴에 탐욕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파르늄."
그 감정을 놓치지 않은 슈리엘은 망설임 없이 주머니를 던졌고, 엘프는 순식간에 활을 거두고 주머니를 받아 허리춤에 매달았다.
―탁. 나무에서 내려온다. 은발의 엘프는 보여준 경계심이 무색하게 곧바로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미안해. 너희, 좋은 사람이었구나."
"평가가 급변하는군."
"드워프가 말했어. 파르늄 주는 사람, 좋은 친구라고."
"그거 알기 쉬워서 좋구나."
"드워프는 엘프의 친구야. 드워프의 친구는, 엘프들의 친구."
말도 딱딱 끊어 말하는 게 조금 모자라 보였다. 얘만 그런 건가 아니면 엘프가 다 그런 건가. 파르늄 하나 줬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나는 엘프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저러다 노예상 같은데 끌려가는 거 아니에요?"
"누가? 네가?"
"아니, 저 엘프말이에요."
"엘프를 노예로 산다고? 미친 건가?"
이 세상에 엘프 노예는 있다. 분명 있지만, 굳이 위험성을 부담하면서까지 엘프를 잡을 이유가 없었다. 저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마법을 배운다. 정령들과 대화하고 마나와 교감한다. 그렇게 수백 년을 산다. 땅을 뒤집고 산을 만들어내는 엘프들의 마법은 오랜 시간 자연과 교감한 산물이었다.
그런 엘프들을 잡아 노예로 삼는 건… 확실히 로망이 있겠지만 그다지 현명한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프보다 예쁜 인간들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파르늄. 고마워."
은발의 엘프는 귀를 까딱까딱거리며 기쁨의 감정을 내비쳤다.
이 엘프도 겉모습만 보면 약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괴물 같은 마나량을 가지고 있었다. 몇 년을 살았는지도 본인이 말하기 전까진 알 수 없었고. 이런 종족이 예쁘면서 장수까지 한다고 하니 참 이기적인 종족이다. 번식 욕구가 적은 게 최후의 양심이라고 해야겠지.
참고로 엘프들의 마법 체계는 땅 속성에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오백 년 동안 방벽만 깎던 엘프들의 피나는 노력이 그런 쪽으로 발달해버린 것이다.
"친구. 따라와. 안내해줄게."
"우리가 어디 가는 줄 알고?"
슈리엘은 목적지도 모르면서 안내 준비를 하는 엘프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눈앞의 엘프는 수백 년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숙했다. 슈리엘도 이런 엘프는 처음인지 조금 당황해 보였고. 내 기준으로도 특이한 엘프였다.
"좋은 지적. 그래도 괜찮아. 지금 말하면 돼. 문제없어."
엘프는 어서 목적지를 말하라는 듯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새하얀 얼굴 위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게 조금 소름이 끼쳤다. 인간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하나. 인간이 아닌 건 맞지만, 묘하게 불쾌했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엘프 씨? 음.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라냐. 내 이름이야. 친구니까 알려주는 거야."
"그래요 라냐. 하나 물어볼게요."
"좋아. 가능한 선에서만."
"…요즘 엘프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교구장이 말하길,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엘프들의 얼굴이 썩을 정도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이 틀림없다고 했다. 방벽 밖을 나서는 엘프들이 많아지고, 대삼림에 접근한 외부인을 심문하는 빈도가 늘어났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하리라.
은발의 엘프는 눈을 찡그리고 수십 초를 고민했다. 말해도 되는 이야기인지 고민하는 걸까. 우리는 대답을 듣기 위해 인내심 있게 기다렸고, 엘프는 정확히 27초가 지나고 입을 열었다.
"…자연의 정기가 요동치고 있어. 불안정해. 하지만 지모신님이 벌인 일이 아니야. 외부자의 소행. 찾아내서 죽여야 해."
"이봐."
라냐의 말이 끝나자, 슈리엘은 한 발짝 앞으로 튀어나와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악마다."
악마. 슈리엘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슈리엘의 말을 들은 라냐는 눈을 좁히며 반문했다.
"악마?"
"악마들의 짓이다. 쌍둥이 악마 코르딜, 포르딜."
"…!"
기사 학살자와 마법 추방자의 이명을 가진 악마들. 라냐는 사건의 원흉이 악마라는 소리를 듣곤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오백 년 전 세계수 일부를 불태운 엘프들의 원수. 비록 그때의 일을 겪지 않은 세대라 할지라도, 유전자 각인된 악마에 대한 증오가 엘프의 심장을 불태웠다.
"빨리. 설명해."
"땅의 정기를 흡수해서 불모지로 만드는 악마들이다. 안 그래도 제국에서 한바탕 난리 치고 이곳으로 도망쳐온 참이야."
"대책. 필요해. 어떻게 해야 하지?"
슈리엘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잡아 족쳐야지. 살려봤자 아무런 도움 안 되는 놈들이야."
"…동감. 역시, 너희는 좋은 친구."
같은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서로의 경계심을 허물어주었다. 누군가의 호감도를 쌓으려면 그이가 싫어하는 놈을 뒷담 하라 하던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겠지.
그러니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슈리엘은 지도를 펼쳐 예상 이동 경로를 라냐에게 보여주었다. 마기가 검출된 지역, 그렇지 않은 지역. 마기가 검출된 지역을 쭉 이어보면 어디론가 이동하는 듯한 동선이 나왔다.
"대삼림 일대의 마기를 조사했다. 밖으로 나온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아직 벽 안에 잠적해 있는게 분명해."
"알아. 마기라면 우리도 조사해봤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어째서지?"
"정화. 지모신님은 방벽 안의 모든 마기를 없애버려.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면 추적하기 힘들어."
라냐도 이번 사태의 원흉이 악마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곤 있었지만, 세계수의 축복 아래 보호받는 방벽 안까지 들어오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모든 마기를 정화해버리는 지모신의 축복. 마기를 제대로 뿜어낼 수 없으면 그저 힘 센 인간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허나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마법 추방자 코르딜."
그들은 성역 안으로 발현하는 모든 마법을 추방시킨다. 신성력도 얄짤없다. 세계수가 사용하는 정화의 메커니즘이 마법과 닮아있다면 이조차 추방시킬 것이다.
성역을 설치하려면 상당량의 정기를 빨아들여야 하니... 자연의 정기가 요동치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마법, 추방자?"
라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쌍둥이 악마는 제국 밖에서 행동한 적이 없었다. 인간과 정보 교류가 빈약한 엘프들이 쌍둥이 악마의 능력을 알 리 없었겠지.
"가면서 설명해주지."
슈리엘은 이야기가 끌리는 느낌을 받아, 우선 이동부터 하자고 말했다. 라냐는 당장 듣고 싶은 눈치였으나, 묵묵히 슈리엘의 말을 따랐다. 계속 붙잡아두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았다. 슈리엘이 말한다.
"가장 가까운 사수문이 어디지?"
"…동쪽 적랑赤狼문."
사수문四獸門.
방벽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자, 각 구를 지배하는 네 종족의 상징. 여기서 제일 가까운 문은 동쪽에 자리 잡은 적랑문. 붉은 늑대들이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라냐는 찰랑이는 은발을 휘날리며 등을 돌렸다.
"친구. 따라와."
* * *
아인亞人은 아인이라는 말로는 구분할 수 없다. 수없이 나뉜 종을 '아인'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어 부를 뿐이지,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끝도 없이 많았다. 방벽 안에 살고 있는 종족만 스물이 넘었다.
당연히,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부족들이 한곳으로 모이니 의견 통합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나 방벽의 안전함에 이끌려 온 것은 어느 부족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싸움보다는 조율을 택했다. 평생을 야만적으로 치고받고 싸울 수는 없잖는가.
정착을 바라는 욕망과 문명화를 향한 열망은 짐승의 본능을 억누를 정도로 강력했다.
그들이 택한 방식은 부족 연맹제를 일부 계승한 과두제였다. 가장 강력한 네 부족의 부족장들을 통치자로 내세우고, 서로를 견제하며 국가를 발전시켜나간다.
나름 민주적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황야의 본능을 이은 만큼 약육강식을 따랐다. 약소 부족들은 부족장을 뽑을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박해받는 건 아닌지라 큰 불만은 없어 보였지만… 약하면 사려야지 어쩌겠는가.
―인간인가?
―맛있어 보이는데.
―닥쳐 병신아. 실례야.
―엘프도 있어.
그리고 아인들에게 인간은, 맛있어 보이는 약소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마나 각성자를 제외하면 인간 개개인의 힘은 약한 편이니까. 도구가 없으면 고블린 하나 잡는 것도 힘들어하는 게 인간이다.
"털이, 많이 날리네요."
나는 옷에 묻은 머리털을 떼어내며 투덜거렸다. 털 많은 짐승들이 조상이라 그런지 머리칼이 굉장히 날렸다. 슈리엘도 마찬가지였는지 팔을 한 번 휘둘러 붙은 털들을 떼어냈다.
"이곳이 여행지로 인기가 없는 이유를 알겠군."
날리는 털에, 보이는 아인마다 입맛을 다시는데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올 수 있겠는가. 슈리엘은 입맛을 다시는 아인에게 살기를 내뿜어 쫓아냈다. 라냐는 도망치는 아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착.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일단 숙소부터 구해야겠지. 추천해줄 만한 곳이 있나?"
"…미안. 숙소는 잘 몰라."
"뭐 괜찮다. 여기까지 안내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진데. 그보다 계속 따라올 건가?"
"일단은. 같이 조사해줄게."
현지인이 나서서 도와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라냐의 합류에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숙소를 구해야 했다. 성 마이할 신전에 도착한 게 초저녁쯤이었으니 시간은 조금 늦었다.
"침대에 털 날리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되네요."
우리는 괜한 걱정을 하면서 길을 걸었다.
주변은 온통 아인 천지였다. 아인들의 도시니까 당연한 걸까. 보이는 사람마다 붉은 귀를 쫑긋거리며 우리를 쳐다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식인을 하는 종족이라 했지.'
조금 다른 두근거림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