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93)

  '나머지 한 명이 보이지 않아.'

  나는 신중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세계수의 절대적인 비호 아래 마기가 차단된 지금 마나로 주변을 스캔해봤자 구분 불가능한 생명 반응만 나올 것이다. 그러니 직접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도 그럴게, '쌍둥이' 악마다. 둘이 하나 되어 움직이는 놈들. 헌데 나머지 한쪽인 코르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선 가장 위험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마법을 차단한다는 흉악한 능력을 가진 변수 자체인 그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먼저 접촉해봐?'

  그렇다고 포르딜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순 없었다. 모처럼 잡은 기회다. 길고 긴 추격전을 끝낼 기회. 전투가 일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접촉은 해야 했다.

  '수틀리면 하나라도 족친다.'

  내가 우려하는 경우의 수는 하나만 잡고 둘은 잡지 못할 때이다.

  그러나. 둘 다 놓친다는 경우의 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년의 운명은 정해졌다. 처참하게 짓밟혀서 죽을 운명. 그래도 방심은 하면 안 된다. 최대 변수는 마법 추방이다. 아크메이지의 마법조차 무력화시키는 악마들의 성역.

  하지만 나라고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코르딜의 '추방진언'은 체외로 방출되는 모든 마법을 추방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체내에서 돌리는 마나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직접 경험해보며 알아낸 사실.

  이걸 이용한다.

  '몸을 포기하는 공격은… 내 특기라서.'

  나는 팔을 폭탄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성역이 펼쳐지고 포르딜이 접근하면, 팔 내부에 마나를 응축시켜 폭파한다. 미궁 최정상에서처럼 '몸 전체'를 터트린다는 단순무식한 방법은 더는 쓰지 않을 것이다.

  격발 순서를 굳이 따지자면 악마와 근접하는 게 최우선. 그 후 팔에 마나를 응축하고, 그대로 잘라 거리를 벌린 뒤 폭파시킨다. 팔 한 짝에 폭발 한 번… 아니, 조금 위력을 줄이면 손가락 하나에 폭발 한 번. 가성비가 상당히 좋았다.

  내게 몸은 소모품이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지.

  "시렉. 네가 먼저 가봐."

  "―…."

  "「말해도 돼.」"

  침묵 마법이 해제된 시렉이 다급하게 말한다.

  "…딱 봐도 위험한 일에 관여된 느낌인데?"

  "저년 악마야."

  "오, 맙소사. 겨울의 신이시여. 내 몸 설산에 돌아가지 못하고 영혼만 떠나가 고향의 향기를 맡겠구나. 부디 이 불쌍한 이리의 처지를 보살펴―"

  "이거 받아."

  기도문을 읊는 시렉의 손에 세계수의 잎이 담긴 상자를 들려준다. 나는 그의 등을 밀며 움직이기를 재촉했다.

  "우린 얼굴을 가렸다 해도 너무 눈에 띄어. 현지인인 네가 가야 의심받을 일이 없지."

  "아, 씨발. 젠장. 그럴 거면 왜 변장한 거요?"

  욕지거리를 내뱉은 시렉은 상자를 받아들고 코너를 벗어났다. 겁을 잔뜩 먹은 어조 치고는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그는 조금 걷다가, 접객 테이블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둘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누구지?"

  "오, 시렉인가. 마침 잘 왔네. 맹수용 진정제가 새로 들어왔어."

  포르딜과 드워프 영감이 동시에 말한다. 포르딜의 눈동자가 달이 지듯 가늘어진다. 붕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실핏줄이 튀어나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붉은 달.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그 눈동자가. 정확히 시렉의 두 눈을 향했다.

  "…."

  "오, 오랜만이야 영감."

  시렉은 주변 눈치를 보며 테이블 앞에 섰다. 그는 포르딜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자꾸만 손톱을 탁자에 두드리며 불안 증세를 내비쳤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세계수 잎을 팔러 오는 자들은 대개 불안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시렉의 불안증세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드워프 영감이 말한다.

  "이번엔 그 상자를 팔러 온 건가? 재질은 파르늄인 것 같고…. 판다면 값은 두둑이 쳐주지. 요즘 방벽 보수 기간이라 파르늄이 부족해서 말이야. 녹여서 주괴로 만들면 엘프들이 좋아하겠어."

  드워프 영감은 시렉의 손에 들린 상자로 주제를 바꾸었다. 포르딜과의 대화는 끝난 듯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렉은 자꾸만 눈치를 보며 상자를 올려놓았다.

  ―텅. 아찔한 금속음이 등허리를 타고 울린다. 드워프는 이 소리에 무언갈 느꼈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 확실하게 파르늄일세! 게다가, 그냥 파르늄이 아니야! 안쪽에 뭔가, 조금 더 고급지고, 순도가 높은― …"

  거기까지 말한 드워프가 흠칫한다.

  "자네, 설마."

  "……."

  파르늄은 보통 무기재료로 쓰이지만, 그밖에도 쓸 수 있는 용도가 무궁무진했다. 마나를 흘려내는 성질 덕에 상자로 만들면 내용물의 마나를 안에 맴돌게 만들 수 있다. 마법적 신선도를 최대로 유지할 수 있어 상단같은 곳에서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드워프인 그가 금속의 성질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흠칫한 이유는 이곳이 암시장이기 때문이겠지. 이런 곳에 파르늄 상자에 담길 만한 물건은 얼마 없었다.

  "세계수 잎인가?"

  가령. 세계수의 잎이라든가. 드워프 영감이 작게 읊조린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오직 포르딜과 시렉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다행히, 귀가 밝은 라냐와 마나로 청력을 강화한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잎을 구했다고?"

  갈라진 쇳소리. 포르딜이 둘 사이로 끼어든다. 만월滿月. 그녀는 붉은 눈이 휘영청 뜨인다. 놀란 시렉은 황급히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상자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 뒤집는 시늉까지 했다.

  "그 발 멈춰. 잎 바스러지는 꼴 보고 싶어?"

  "…!"

  시렉은 그녀의 손톱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목격했다.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반사反射가 아니다. 아인이었다면 이상할 게 없었지만, 앞에 보이는 붕대녀는 아인이 아니었다. 침이 마른다.

  "이봐. 내가 이걸 얼마나 힘들게 구했는지 알아?"

  "…대금은 치를 거야."

  "얼마?"

  "금화 스무 장. 그 정도면 충분해."

  "…."

  하지만 겁을 먹은 게 거짓말처럼 주도권을 잡았다. 음지에서 굴렀던 짬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드워프 영감이 테이블 위에 금화를 올려놓는다. 그녀가 선금으로 지불한 금화 스무장이었다. 시렉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진짜 금화였다. 중계료를 제외하고도 열여덟 장이나 받을 수 있었다. 열 장은커녕 한 장만 있어도 발 편하게 뻗고 살 수 있는데, 열여덟 장이라니? 평생을 음지에서 구른 그에겐 너무 커다란 돈이었다.

  "……."

  상자를 쥔 시렉의 손이 떨린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닌 탐욕.

  탐욕은 공포와 교차하며 커다래졌다.

  '그래. 일단 넘겨.'

  행동 방침이 결정됐다.

  잎을 받고, 코르딜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대기 시간은 30초. 그때 동안 코르딜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라냐와 합공해 포르딜을 제압한다.

  "라냐. 준비하세요. 상자를 받고 삽십 초 뒤. 움직일게요."

  "…응. 친구. 조심해."

  금제를 조작해 시렉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넘겨. 돈 받으면 바로 도망가. 그때부턴 네 목숨 장담 못 하니까.

  꿀꺽. 침 삼키는 소리. 시렉은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 들고 그대로 상자를 두고 도망쳤다. 그의 시선에 나와 라냐는 없었다. 코너를 돌아 밖으로 달려나간 그는 암시장에 있는 모두의 눈총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기가 막힌 우연이군! 당사자가 있을 때 판매자가 올 줄이야. 그것도 그 귀하다던… 세계수의 잎을 말이야."

  마지막 말은 조심스럽게. 중계료를 받은 드워프 영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금화를 닦았다. 포르딜이 중얼거린다.

  "들려? 오래된 잎인 게 조금 아쉽지만… 이거면, 충분해."

  10초.

  별다른 생명 반응 느껴지지 않음.

  "하아… 드디어."

  20초.

  포르딜이 등을 돌린다. 우리는 그녀의 시야에 잡히지 않게 몇 걸음 움직여 장소를 옮겼다. 

  25초.

  상자를 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붉게 떠오른 보름달이. 세계수의 잎을 적신다.

  "이제… 끝이야. 코르딜."

  29초.

  공격 시작.

  ―쿠궁! 땅이 진동하며, 바람이 휘몰아치며 천지를 뒤흔든다. 나는 눈속임용 토검을 들고 다중 캐스팅을 시전했다. 주변을 파괴하지 않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단숨에 죽여버릴 것이다. 뿔만 꺾고 마무리하기엔 뒷맛이 좋지 않다. 거점을 세우고 오로지 순수한 욕망만을 채워갔던 가올리스나 아르타니아 같은 비교적 온건한 악마와 비교해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

  어둠과 동화되어 달려간다. 얼굴은 배일로 가린 상태. 그탓에 그녀는 내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포르딜은 단순 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손톱을 뽑아 날 죽이려 하다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곤 도주를 택했다.

  하지만. 

  이 찰나의 망설임이면 충분했다.

  눈속임용 토검은 역할을 다했다. 나는 토검을 버리곤, 땅을 찍어 벽을 생성했다. 쿠궁. 흙 기둥이 솟아올라 포르딜의 도주 경로를 막는다. 그녀는 3미터 남짓한 거대한 벽이 눈앞에서 솟아오르자 당황하며 등을 돌렸다.

  "너는…!"

  눈이 맞는다. 검은 배일이 바람에 흩날려, 일순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렇게나 가까이서 본 나의 붉은 눈동자는 무척이나 익숙한 눈빛일 것이다. 그때와 같은 너와 나의 거리. 폭발이 없는 만남은 처음이지 아마? 나는 싱긋 웃으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머뭇거릴 틈이 없다.

  "조용히, 얼어붙어."

  ―쩌저저적!! 서슬퍼런 한기가 발밑에서부터 퍼져나간다. 혹한酷寒. 땅이 얼어붙으며 포르딜의 발을 묶는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꿈쩍도 안 할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고 끙끙대는 포르딜. 혹독한 추위는 그녀의 발을 곧바로 괴사시켰다. 다리에 감각이 사라진 포르딜은 돌연 휘청거리더니, 앞을 가로막은 벽을 짚어 몸의 균형을 맞추었다.

  나는 빙판 위를 쭈욱 미끄러지며 사전에 캐스팅해둔 마법을 발동시켰다. 캐스팅 지점은 그녀가 짚은 벽. 그리고 양손. 쿠구궁. 벽을 짚은 곳에서 마법진이 생긴다. 뒤늦게 눈치챈 포르딜이 황급히 손을 때려 했지만―

  "늦었어."

 돌무더기가 생성되며 포르딜의 손을 묶는다. 강도만 보면 파르늄보다 단단한 돌무더기가 수갑처럼 손목을 감쌌다. 이로써 손과 발목 모두 봉인됐다.

  "너, 너어어어!!!"

  "소리지를 힘은 있나 봐?"

  뒤늦게 손톱을 꺼냈지만 휘두를 공간도 없다. 나는 연성 수인을 맺었다. 손을 교차시키자, 등 뒤로 수많은 창이 생성됐다. 허공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빙설의 창은 모두. 포르딜의 급소를 겨냥한 채 날아갔다.

  "아아아아악!!!!"

  양팔에 두 개. 양발에 두 개. 복부에 다섯 개. 피를 토하며 울부짖는 포르딜의 모습은 꼬챙이가 따로 없었다. 재차 연성 수인을 맺은 나는 손목 위로 뾰족한 검날을 생성해 그대로 쭉. 빙판을 가로질렀다. 가속을 받은 몸은 멈추지 않았고, 포르딜의 목을 향해 질주했다. 손을 뻗고 눈을 감는다. 죽음이 가까워진다. 

  "아윽, 끅."

  조준은 정확했다.

  ―푸욱. 살을 찢는 감각이 손목을 타고 몸 전체로 퍼진다. 나는 경추를 확실하게 박살 내곤 한 바퀴 돌려 비튼 뒤, 옆으로 쭉 찢어 얼음 칼날을 빼냈다.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악마의 피가 뺨을 때린다.

  '마음 같아선 생포하고 싶었지만…' 

  악마란 종족이 변수가 워낙 많아야지.

  차라리 하나 죽이고 나머지 찾는 게 더 수월했다.

  "친구들. 상자를 회수해줘."

  상자가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바람의 정령을 부린 라냐는 어느새 땅에 떨어진 상자를 주워 잎을 회수했다. 내가 너무 완벽하게 처리해서 딱히 활약한―…

  "…친구."

  라냐의 얼굴이 어둡다.

  '하아….'

  또 뭐가 문젠데.

  

  암시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암시장은 고요했다. 개장과 동시에 난데없이 등장한 마법사와 엘프. 불법적인 일들로 연명하는 저들에게 엘프는 재앙이었고, 무지에서 바라본 마법은 재난이었다.

  칼부림이 나도 눈 한 번 꿈쩍 않는 암시장의 거물들이 부리나케 도망친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자들은 숨기 급급했다. 드워프 영감은 전투가 일어나자 그 즉시 문을 닫아 안에 틀어박혔고, 빈 상점을 털려던 아인들은 라냐의 존재를 눈치채자 자취를 감췄다.

  고개를 돌린다. 힐끗 바라본 포르딜의 눈은 빛이 꺼져 있었다. 그 썩어버린 눈동자를 바닥에 처박고 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처참했다. 목 절반이 잘리고 찢겨 너덜너덜해진 것도 모자라 몸 이곳저곳에 창이 꽂혀있었다. 종교 재판서 사형을 받은 마녀도 저렇게 처참하게 죽진 않을 것이다.

  아마 가장 난폭하게 처리한 악마가 아닐까 싶다. 과한 처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또 내가 그렇다고 믿는 이상 난 인간이다. 고로, 나는 인간의 편이다. 아직은. 아마. 그러니 악마에게 보여줄 자비 따위는 없다.

  나는 이 적막함 속에서, 핏물이 잔뜩 묻어난 칼날을 땅에 팽개치고 라냐에게 다가갔다.

  "라냐. 문제라도 있어요?"

  "친구. 잎이 이상해."

  "이상하다고요?"

  잎이 이상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잎이 약간 말라서 그런 건가? 애초 입수부터 그다지 질이 좋지는 않았으니까. 다 말라가는 노란 잎.

  "…."

  하지만.

  라냐가 꺼낸 잎은 검은색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잎을 포개었다. 차마 꽉 쥐지는 못해 양손으로 살포시 덮는다. 라냐는 눈을 꾹 감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어. 지모신님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

  "…대충 예상은 가네요."

  "친구. 말해줘."

  라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눈물을 참았다. 목울대가 떨린다. 눈가가 촉촉해진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에겐 엘프 감수성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굉장히 슬픈 일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라냐의 등을 토닥이며 설명해주었다.

  "저놈이 어떤 악마인지는 슈리엘에게 들었을 테니 간략하게 설명할게요. 잎이 죽은 이유는… 정기를 흡수당했어요."

  "흡수?"

  "미안해요. 더 빨리 죽였어야 했는데."

  입만 뻥긋거리며 주저하던 라냐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보석 같은 눈물을 흘렸다. '고작 잎 때문에'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기로 했다. 잎만 바스러져도 이렇게 우는 종족인데, 악마침공 당시 세계수가 불타올랐을 땐 대체 어떻게 버틴 거지?

  나는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위로해주다, 마침내 눈물을 거두고 평상시의 라냐로 돌아왔을 때. 재차 고개를 돌려 시체 회수에 나섰다. 그럼, 슈리엘을 만나 보고도 해야 하니 증거품으로 뿔이라도 잘라,

  ……

  …아, 젠장.

  "…라냐."

  "응?"

  "시체 어디갔어요?"

  없다.

  벽에 꼬챙이처럼 꿰여있던 포르딜의 시체가 사라졌다. 핏자국은 남아 선명하게 혈향을 풍기고 있지만, 시체가 없다. 근접하는 순간 마나를 흘려 넣어 확인 사살도 했는데 어떻게? 증오로 뛰던 심장은 멈추고, 기만을 내뱉던 목은 잘렸다. 분명 생명 반응은 정지했었다.

  만에 하나 포르딜이 죽지 않았었더라도, 내가 눈을 돌리고 있던 건 고작 수십 초였는데. 그사이에 탈출을 했다고? 그녀가 있던 자리엔 녹아내린 마기의 잔향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검고 흐물거리는 마기는 끈적한 웅덩이를 만들어 바닥에 고여 있었다.

  나는 손에 베리어를 두르고 조심스럽게 마기와 접촉했다. 겉으로 보이고, 또 직접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진한 마기였다. 또다시. 자연스레 '어떻게' 라는 의문이 스친다. 세계수의 축복이 있는데 어떻게 마기를 흘렸는가. 세계수의 뿌리와 잎이 닿는 곳은 지모신의 정화 아래 모든 마기가 차단될 텐데. 어떻게―

  "친구! 조심해!"

  "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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