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것을 눈치챘을 때.
―언제까지 버틸 생각이지? 마법사 유진! 엘프를 살리고 싶으면 거래를 받아들여라!
너머에서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궁 최정상, 죽어가는 유진을 끌어안은 자신에게 찾아온 악마 코르딜. 그놈은 자신에게 거래를 요청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나는 유진을 살리고, 저놈은 포르딜을 살린다. 서로가 후퇴하는 것이다. 그때는 유진을 살리기 위해 일말의 고민 없이 거래를 받아들였지만.
'두 번은 없다.'
빛줄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양손에 망치를 들고 눈을 흉흉하게 빛낸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빌며 살의로 무장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슈리엘은 주저앉은 엘프 앞에 서서, 날아드는 수많은 공격을 버텨내는 붉은 머리의 마법사를 보았다.
'유진.'
그녀는 한쪽 팔이 뜯겨 있었고, 옆구리에선 내장이 삐져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른팔로 옆구리를 틀어막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거절, 한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네가 죽으면 그 엘프도 죽을 텐데?"
"좆, 까."
"대체 뭘―"
버텼구나.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슈리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성역의 힘에 튕겨 나가지 않게 내부에 차곡차곡 쌓는다. 신성력은 부스터가 되어 망치의 힘을 더해줄 것이다. 수켈로스의 망치가 신성력을 받아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신광神光. 신의 은총이 그를 감싼다. 슈리엘은 신이 내린 축복을 몸소 느끼며 눈을 떴다. 백안白眼. 눈이 새하얗게 빛난다. 그때와는 다르게 몸에 힘이 넘쳤다. 욕망에 먹혀버리지도 않았고, 어둠에 눈이 감기지도 않았다. 이번엔 눈을 뜨고 마주할 것이다.
붉은 빛줄기와 대비되는 새하얀 빛이 암시장을 밝힌다. 쌍둥이 악마가 이 휘황찬란한 빛을 눈치 못챌 리가 없었고, 그들은 유진을 향한 공격을 멈추고 빛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대행자, 루셸리니."
슈리엘은 경악한 악마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는 아직도 두 다리로 서 있는 유진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유진. 하나만 묻지. 늦었나?"
유진은 핏물 섞인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하으. 네. 늦었어요. 27분이나 걸렸네요. 뭐하다 늦은 거에요?"
"미안하다. 나중에 설명하지."
"하큭. 그래요. 끝나면 나중에 내장 집는 것 좀 도와줄래요?"
조금만 더.
자기 몸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았을 텐데. 슈리엘은 아쉬운 속마음을 삼키고, 대답 대신 망치를 휘둘렀다.
빛이 어둠을 밝히며.
여명이 피어오른다.
체력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무조건적으로 우리였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움직임을 보조해주는 정령들이었다. 아무리 대자연의 은혜를 받은 엘프라 하더라도, 정령들의 체력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 애초에 90%가 마나로만 이루어진 정령들이 성역 안에서 활동하기 쉬울 리 없었다.
정령들은 20분을 못 버티고 잠들어버렸다. 정령에게 몸을 맡기고 회피기동을 펼쳐야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손톱들. 불행하게도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쌍둥이 악마가 제일 먼저 노린 건 라냐였다. 발이 재빠르기는 하지만, 정령이 없는 이상 걸어 다니는 표적에 불과했다.
귀가 뜯기고, 옆구리에 화살이 스치고, 활대가 부러졌다. 맞을 수 있는 공격은 대신 맞아주지만, 몰아치는 칼날 폭풍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발버둥을 칠수록 마법사의 이성이 깔깔거렸다. 그냥 다 죽여버리라고. 도시 채로 날려버리라고. 인간의 마음을 흉내 낸다 한들 본심이 바뀌겠나. 지금도 '살아남는 방법'이 머리 구석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데.
그러나.
"마법사 유진. 거래를 제안한다."
라냐가 쓰러지고, 내 발에는 피고름이 맺혔을 때. 쌍둥이 악마는 돌연 공격을 멈추고 내게 거래를 제안했다. 간단한 얘기였다. 라냐를 살려줄 테니 이만 후퇴하라는 아주 간단한 얘기다. 내게 해제 불가능의 금제를 걸어, 성역 밖으로 나선 뒤에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면 끝이었다.
라냐가 죽고, 내가 무한정 버티기에 들어간다면 저들은 지원이 오기 전, 성역을 포기하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라냐가 죽는다면 말이다. 저들은 내가 라냐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민이 밀물처럼 몰려든다. 나는 잠겨버린 사고의 수해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저 거래를 받아들이는 게 옳은 선택인지 말이다. 나는 인간이야, 라고 항상 말하면서. 전 생명체의 주적인 악마를 놓아주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인지 말이다.
…나는.
그냥. 남이 희생하는 게 싫을 뿐이었다. 그들이 쌓아올린 희생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 하니 얼마나 모순적일까. 그래도 싫었다. 내가 다치는 건 별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나를 생각하는 이가 죽으면 지금도 가까스로 유지 중인 정신줄이 완전히 끊길까 두려웠다.
이래서. 혼자 다니려고 한 건데. 너무 늦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안은 생각해봤자 소용없다. 사고의 수해 밑바닥. 눈을 뜨고 올라간다. 나는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쌍둥이 악마를 마주 보았다.
"대답은?"
"하아…."
하루에 두세 번씩 강박증처럼 생각하는 문장이 하나 있다. 나는 나로 살리라. 인간으로 살리라. 이런 걸 되뇐다 한들 변하는 게 있을까. 뭐… 항상 처맞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나를 '평범한 인간'이라 부르면 인간사의 크나큰 모욕이 될 테지만 아무튼. 변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싫어."
나는 항상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었다.
―푸욱.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자마자 목에 칼날이 꽂힌다. 나는 목을 관통하는 가시를 빼내고 즉시 재구축을 발동했다. 상처가 아문다. 나는 흐리멍텅해진 눈으로 저들에게 엿을 날렸다. 악마 사이에서 중지 올리기가 욕으로 통하지는 모르겠다만, 눈을 찡그린 걸 보니 효과는 있었다. 포르딜은 상처를 회복하는 날 고까운 눈으로 바라봤고, 코르딜은 다시금 말했다.
"다시. 거래를 제안한다."
"싫, 어."
―콰직. 이번엔 심장에. 나는 의식이 꺼지기 직전 신체 부위 몇 개를 포기하고 급속 재구축을 시도했다. 오른 눈이 썩는다. 나는 칼날을 빼내고 하하, 하고 웃었다.
"흐. 거절, 한다."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네가 죽으면 그 엘프도 죽을 텐데?"
"좆, 까."
"대체 뭘―"
그 순간.
귀에 선명하게 들리는 발소리.
"대행자, 루셸리니."
나는 킥킥 웃으며 썩어버린 오른눈을 재구축했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빛줄기가 솟아오른 즉시 오지 않은 건 조금 괘씸했으나.
"유진. 하나만 묻지. 늦었나?"
자기도 늦은 건 알고 있나 보네.
나는 핏물 섞인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하으. 네. 늦었어요. 27분이나 걸렸네요. 뭐하다 늦은 거에요?"
"미안하다. 나중에 설명하지."
"하큭. 그래요. 끝나면 나중에 내장 집는 것 좀 도와줄래요?"
시답잖은 농담을 건넨다. 슈리엘은 대답 대신 땅을 박차고 망치를 휘둘렀다. 새하얀 망치 머리에 파란 용이 새겨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는 무기를 들고 휘둘렀다.
새하얀 섬광이 우리를 비춘다.
쿠우웅!!! 망치를 전부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 포르딜은 소리를 지르며 손톱을 내질렀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슈리엘은 망치 자루를 틀어 가볍게 막아냈다. 그의 모습은 미궁에서와 달리 두 배는 더 강력해 보였다.
나는 쓰러진 라냐를 질질 끌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슈리엘이 도착한 이상 라냐에게 신경을 쓰긴 무리가 있을 것이다. 라냐를 숨긴 나는 다시 전투의 혼란 속으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인간 놈드으으을!!!!"
"닥쳐라. 신의 잡종아. 우리가 뭘 했길래 그리 증오하는 거지?"
"우린 그렇게 태어났어! 그게 운명이야! 너희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하! 악마면서 운명론적인 말을 하는구나!"
분노와 분노가 부딪힌다. 슈리엘은 망치를 휘두르며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가 뿜어내는 오러의 총량은 포르딜의 것보다 한참을 뛰어넘었다. 망치가 내뿜는 새하얀 불빛과 함께. 루셸리니의 오러가 뒤섞여 성스러운 푸른 불꽃을 만들어냈다.
파아앙!! 망치 후면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은 분명 신성력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그라지긴 했지만, 안에서부터 나오는 출력과 가속도까지 무효화 하진 못했다.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날아드는 망치. 그것을 막은 포르딜의 손톱은 휘고 부러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붉은 달빛으로 물든 세상은 어느새 푸른 불꽃에 잠식되어 눈을 비추었다. 쌍둥이 악마는 성역 안에서도 느껴지는 신성력에 이를 갈며 필사적으로 받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슈리엘은 망치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곧 힘을 더해 땅을 찍었다. 전력으로, 또 건물이 휘청거릴 정도로. 쿠웅! 힘을 버티지 못한 바닥이 푸른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진다. 나는 충격에 몸이 붕 떠버려 잠시간 공중에 부유한 채로 있어야 했다.
슈리엘은 망치 자루를 푸른 균열에 꽂아버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퍼지는 신성력. 망치를 중심으로 신성 장벽이 펼쳐진다. 그는 자신의 애검 카라반을 꺼내 들어 기도문을 읊었다. 검은 머리 신관 세르티가 내려준 성전사의 축복이었다.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하얀 실선들. 등 뒤로 보이는 신성력의 잔향은 흡사 날개를 방불케 했다. 그는 하얗게 변한 눈을 뜨며 달려들었다. 날개를 펼치며, 하늘 위로 비상한다.
태어나길 루셸리니의 악마 사냥꾼. 성황청이 만들어낸 결전 병기. 그는 대행자. 신의 대리인이었다.
"아아아아악!!!! 어, 어떻게 한 거야아아아!!!! 코르디이이일!!!"
성역 안에서 신성력을 펼쳤다. 이 말인즉슨 성역을 뛰어넘을 정도의 '힘'이 슈리엘을 감싸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크 메이지인 나로서도 '괴물' 이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포르딜의 외침을 들은 코르딜은 허공에 이리저리 손을 휘저었지만, 슈리엘이 내뿜는 신성력은 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코르딜은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포르딜. 내가 마법을 쓰려면 성역을 해제해야 해. 그래도 괜찮겠어?"
"아무래도 좋으니까아아!! 뭐라도 해봐아아!!!!"
영혼과 껍질만 남은 포르딜의 육신은 계속되는 공격으로 점점 바스러지고 있었다. 결국. 코르딜은 성역을 포기했다. 잠들어있던 정령들이 깨어나 내 몸에 달라붙는다.
성역을 포기한 코르딜은 양손을 교차해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포르딜과 슈리엘 사이로 뜨거운 화염이 치솟는다. 장검을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던 슈리엘은 갑작스레 솟아난 불기둥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쌍둥이 악마는 도주를 택했다.
"하."
멀어지는 거리. 빛기둥을 등지고 저 멀리 달아난다. 나는 재구축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성역을 포기하고 택한 게 고작.
도망치는 거야?
나는 악마들을 추격하려는 슈리엘을 염동력으로 멈추게 하고, 작게 읊조렸다. 그럴 필요 없다고. 그는 움직임을 저지당하자 짜증을 내려 했지만, 내게서부터 느껴지는 힘의 기류에 입을 닥치고 검을 집어넣었다.
쿠구그…
시야가 점점 높아진다. 우리는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건물들은 뿌리가 뽑힌 채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고, 고도는 계속해서 높아져 아래로 보이는 도시가 희미해질 정도였다. 드워프 영감의 집만이 유일하게 뽑히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내가 이동 공간진을 분석해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나는 이 주변 일대를 들어 올렸다.
"그거."
손을 높이 들고, 주먹을 쥐었다. 나는 땅을 들어 올린 후 공간 이동 술식을 준비했다. 파르시히의 이동 술식과 성황청에서 보았던 초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적절하게 섞어 만든 마법.
"나도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겠더라."
공간이 일변한다.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지평선은 사라지고 망망대해의 바다만이 비추어졌다. 도망치던 쌍둥이 악마는 한 걸음만 더 걸으면 바다로 빠질 뻔했다는 사실에 겁을 먹으며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마법, 이지?"
"꺄흑. 뭐, 뭐야?!!"
도망칠 곳은 없다. 가장 가까운 땅으로부터 6000km나 떨어진 망망대해다. 이만한 거리는 날아서 가기도 전에 지쳐 죽을 것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슈리엘에게 말했다.
"바다가 참 예쁘네요. 그렇죠. 도련님?"
"…."
"애를 낳으면 이런 곳에 한 번쯤은 와보고 싶었거든요."
말을 마친 나는 가볍게 손을 튕겨, 드워프 영감이 숨은 집을 통째로 들어냈다. 드워프 영감은 "이, 이게 뭔가?! 주, 죽이지 말아주게나!" 라고 빌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 울음을 무시하고 라냐와 슈리엘까지.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은 모두 한데 모아 내 앞에 서게 한다.
"저는 나중에 돌아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으세요."
"…악마들은?"
"저놈들은 잘 처리할 테니 걱정 마셔요 도련님."
망치를 회수한 슈리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참고로 드워프 영감은 기절시켰다. 하도 울고불고 난리여서 말이지. 나이에 안 맞게 주책도 참.
"그럼… ."
가볍게 인사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들. 좌표는 바르하이야 구 여관 앞으로 설정해 놨다. 날뛰는 아인들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런 떨거지한테 당할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니…
이제. 마지막 정리를 해보자.
"설마, 성역을 포기하고 달아날 줄은 몰랐어. 나 같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곳에서 계속 버텼을 텐데."
"오, 오지, 마."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하늘 위로 거대한 불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강맹한 불길이 모여들며 하나의 구체가 된다. 그 크기는 흡사 태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커다랗고, 맹렬했다.
"마, 마법사 유진. 거래를 제안한다―!"
코르딜은 땀을 줄줄 흘리며 소리쳤다.
나는 수줍게 입을 가리고 말했다.
"싫어."
그대로.
불덩어리를 떨어트린다.
"아, 아."
"하아… 따듯하네. 그렇지?"
사실은, 베리어를 두르지 않으면 살갗이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웠다. 유성우가 가까워질수록 땅이 달구어진다. 나는 순간이동 술식을 준비하며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딸랑.
"…?"
목에 방울이 달린 머리 셋의 고양이가 내 곁에 와 부비적거렸다. 그 크기가 조랑말을 훌쩍 뛰어넘어 괴리감이 들었지만, 귀여운 고양이의 외모는 그대로라 그리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케르베로스의 고양이 버전?
잠깐.
얘 삼두묘 쿠드잖아.
쿠드는 내가 반격하기도 전에 목덜미를 물어, 자신의 등에 태워버렸다. 순간 죽여버릴까 고민이 일었으나, 역사서엔 단 한 명의 인간도 죽이지 않은 멍청한 고양이라 적혀 있어 그냥 냅두기로 했다. 재앙의 전조를 알려주는 놈을 죽여봤자 득보단 실이 많다. 그리고, 살의도 느껴지지 않아 그냥 얌전히 등에 타기로 했다.
날 등에 태운 쿠드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유성우로부터 멀리 떨어졌다. 쌍둥이 악마의 처절한 외침이 들렸지만 쿠드는 듣는 척도 안 했다.
그렇게.
나와 쿠드는 망망대해의 바다 위에서 몰아치는 바닷바람을 느꼈다. 나는 부유섬 위로 떨어지는 유성우를 직관하며 다리를 흔들었다. 화염 계열 마법 중 끝판왕을 자랑하는 메테오다. 여기선 개미처럼 보이는 쌍둥이 악마는 무릎을 꿇고, 맹렬히 떨어지는 불덩이를 맞이하고 있었다.
―쿠우우우웅!!!!!
공중에 떠오른 섬이 정확히 27등분이 나며 바다 아래로 수몰된다. 나는 저들의 최후를 똑똑히 눈에 담으며 하품했다. 피곤하다. 장거리 텔레포트는 할 짓이 못됐다. 정신력 소모가 지나치게 높았다.
'…다신 만나고 싶진 않아.'
저놈들을 분해하고 연구하겠다는 다짐은 가루가 됐지만… 그래도. 기나긴 추격의 끝을 맞이했다니 기분은 좋았다. 나는 쿠드의 머리에 턱을 기대고 중얼거렸다.
"너… 악마 아니야?"
…분명 역사서엔 말 많은 고양이라 적혀 있었는데.
―딸랑.
쿠드는 말 대신 방울을 흔들어 청아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아인과 엘프들의 나라에 유례없는 혼란이 찾아왔다.
붉은 달은 쌍둥이 악마가 깊은 심해 속으로 처박힘과 동시에 사라졌지만, 그 여파까지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달에 홀려 강제로 광포화를 사용한 아인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날뛰었다. 그 결과. 거리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바닥엔 물어뜯긴 시체들이 즐비했고, 정신을 차린 아인들이 통곡하는 소리만이 빈 공간을 채워갔다.
종소리가 울린다.
크게. 하늘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