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93)

  나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고 울리는 경쾌한 소리. 마나가 손끝으로 빠져나가며 먹구름을 생성한다. 날은 어느 때보다 밝았지만, 나와 마부가 서 있는 자리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쿠르릉!

  "어이쿠! 바, 방금 뭔 짓을 한 건가?"

  옆에 쌓여있던 짚단이 벼락을 맞고 잿가루가 되어버렸다. 불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의도적인 조절이었다. 나는 손을 털어 먹구름을 없애고, 무감정한 얼굴로 말했다.

  "날파리들이 수천 마리 몰려와도 끄떡없으니 가셔도 좋아요."

  "아, 알겠네."

  마른하늘에 날벼락.

  쓸데없는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마차를 출발시킨다.

  '브리도니아… 마탑에 가기 전 모험가 등급부터 올리는 게 나으려나?'

  완전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최대한 빠르게 올라가고 싶었다. 내겐 아카데미 수료증이나 주변인의 추천증이 없다. 말 그대로 맨몸으로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증명할 방법은 실력 행사밖에 없었다.

  '못해도 A급. 그 위로는 조금 부담스럽고…'

  다시 모험가 생활을 할 생각을 하니 안 좋은 기억들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모든 의욕을 잃고 방황하기만 하던 시절.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도 그때부터였다. 만약, 고통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삶의 목표를 찾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의미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래도.

  지금은 지금의 목표가 있다.

  나는 약간 더 부른 것 같은 배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 * *

  약속했던 4일이 지나자, 깔끔했던 동부의 풍경은 사라지고 몬스터 무리와 모험가들의 시체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나는 턱을 괴고 서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무척이나 난폭하고, 야만적이었다.

  "수고하셨어요. 돌아갈 때는 용병을 구하는 걸 추천해 드릴게요."

  "크흠. 알겠네. 그럼 잘 가시게나 마법사 나으리."

  나는 마부에게 은화 세 닢을 쥐여주며 돌아섰다. 이건 팁이다. 이걸로 수중엔 금화 한 장과 은화 열두 장이 남았다. 은화 한 장만 있어도 나름 괜찮은 여관을 잡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부유한 측에 속했다.

 예쁘장한 소녀가 돈까지 많으니 사람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산적들은 날 귀족으로 착각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두 무리의 산적을 만났다. 물론 내 라이트닝 볼트를 맞고 잿더미가 되긴 했지만. 하여튼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품에서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모험가 패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카할리아 미궁 공략에 참여한 전적이 반영됐다 했지. 그걸 인제야 갱신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만, 안 해서 손해를 보는 것보단 낫지.

  "F급 마법사… 유진."

  초라하네.

  이래서야 마탑 입구는 밟을 수 있을련지 모르겠다.

  패를 집어넣은 나는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서쪽 거리의 흑장미를 제외하면 가장 큰 건물이라 찾기는 쉬웠다.

  "자~ 여러분! 칸타라 평원에 그렘린 둥지가 발견됐다 하니 많은 신청 부탁드려요! 보수는 인당 동화 열 장! 부산물 미포함 값이니 알아두세요~"

  모험가 길드에 다다르자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인상적인 강아지상 접수원. 메리는 아직도 근무 중이었다. 분명 첫날에 나를 마탑 심부름꾼으로 오해하고 끌고 가려 했었지. 그때는 경황이 없었고, 사고방식이 워낙 음침했던 시절이라 건성으로 대답하며 넘어갔다.

  처음엔 마탑 소속임을 완강히 부인했었는데, 이제 와서 마탑을 오르려 하니 감회가 새롭다.

  "어라…?"

  메리와 눈이 맞는다.

  하지만 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시한 게 아니라, 기억을 못 한 듯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을 테니, 기억 못 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렇게 줄이 줄어들고, 마침내 내 차례가 왔을 때. 주변 모험가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아….'

  나는 로브와 케이프를 두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왜 시선이 모이는지도 알아냈다.

  엘프를 이겨 먹는 외모야 그렇다 쳐도,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재구축 디폴트 값으로 생성되는 옷은 일개 모험가가 입기엔 너무 고급졌다.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상의는 둘째치고, 치마에 가터벨트라니. 전투용이라기엔 너무 쓸데없는 장식이 많았다.

  속으로 혀를 차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다음부터는 로브를 두르고 다녀야겠다. 동부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복장 관념이 동부 기준으로 변해버렸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패를 갱신하러 왔어요."

  "…패요?"

  "모험가 패요. 자, 여기요."

  나는 모험가 패를 꺼내 메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가 모험가라는 사실에 퍽 놀란 눈치였다. 그것은 다른 모험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몰려드는 시선은 무시했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유명 인사가 될 것이다. A랭크까지 단숨에 올라갈 거거든.

  "…이름은 유진. 직업은 마법사, 등급은 F랭크?"

  거기까지 말한 메리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내 얼굴과 패를 연신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 모습이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강아지 같아 작게 미소 지었다. 저런다 한들 그녀가 날 알아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초연超然하게 갱신을 기다렸다. 얼굴은 여유를 잃지 않아 생기가 돋아났다. 허리는 쭉 펴고 두 다리 감추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다. 뒤에 있던 모험가들은 내 뒤태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관심도 나쁘진 않지. 이왕이면 컨셉도 하나 잡아볼까. 항상 유하게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럼 도도하고 싹수없는 마법사는 어떨까. 아니야. 그건 이미 지하 결투장에서 써먹었잖아. 그럼 뭐가 좋을까…

  ―툭.

  그때.

  불길하고 역겨운 촉감이 느껴졌다. 누군가 엉덩이를 더듬었다. 나는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고 뒤를 돌아봤다.

  "…."

  "…뭘 봐?"

  나처럼 패를 갱신하러 온 모험가 무리였다.

  인원은 셋.

  전원 남성이다.

  나는 서부에 도착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속으로 감탄했다.

  모험가.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는 놈들. 사실상 쓰다 버리는 일회용 병사들. 저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알기나 할까. 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 그대로 엉덩이를 만진 사내를 노려봤다.

  그는 살짝 경직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사내 뒤에 있던 남성 둘이 킥킥대며 어깨를 두드렸다.

  "쫄지 마 등신아. 저년 F급야."

  날 때부터 못 배우고, 해본 일이라곤 칼질과 통수가 다인 놈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뭐? F급?"

  "좆밥이야 좆밥."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蔑. 저들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법칙. 사내는 F급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을 폈다. 오히려 입맛까지 다시며, 불쾌한 말로 노골적인 희롱을 던졌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쪽에서 세게 나가면 발뺌하며 물러날 게 뻔했다.

  "하아…."

  돌아버리겠네.

  너무 하찮아서 대응할 기운도 안 났다.

  나는 대충 얼굴을 찡그리고 다시 접수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1분 정도 기다리면 되려나. 갱신만 하면 곧바로 몬스터를 잡으러 갈 거다.

  그런데.

  "킥."

  "오, 또 돌아본다."

  또.

  엉덩이를 더듬었다.

  '…죽일까.'

   그대로 압축 큐브로 만들까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메리가 갱신을 끝마치고 접수 테이블로 돌아온지라 그럴 수 없었다.

  "갱신 다 끝났어요!"

  "고마, 워요. 기여도는 얼마나 올랐나요?"

  길드에서 등급을 올리려면 임무, 토벌 전적 등으로 기여도를 쌓고, 별도의 테스트를 거친 후, 통과한다면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한 번에 올라갈 수 있는 등급은 최대 C등급이다. 마나를 각성하지 못한 평범한 모험가가 올라갈 수 있는 등급의 끝이기도 했고.

  F급 패는 속어로 똥패라 불렸다. 짙은 갈색이 똥이 생각나기도 했고, 또 파티에 껴봤자 트롤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D등급부터는 달랐다. 대우도 대우지만 패부터가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금속을 덧깔아줘 습기에 갈라지거나 부식되는 일이 없었다.

  C등급은 은을, B등급은 금을 깔아준다. A급부터는 크리스탈을 통짜로 가공해서 패로 만들어준다. A급 이상 패는 모두 주문 제작이라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모험가님…!"

  "…왜 그래요?"

  메리는 묘하게 흥분된 얼굴로 말을 흐렸다. 나는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메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패를 뒤집으며 입을 열었다.

  "…축하드려요!"

  그리고 내게 내밀어진 패는, 찬란한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메리는 펄쩍펄쩍 뛰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C등급이예요 C등급! 유진 님은 오늘부터 C등급 모험가예요!"

  "…승급 시험은요?"

  "괜찮아요! 길드장님 허가에요!"

  나는 은색의 패를 집어넣으며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C등급으로 올라간 건 좋았지만, 시험도 없이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한가. 아무리 길드장 허락이 있다 해도… 기쁨보다는 당황이 먼저 몰려왔다.

  그리고.

  "그게 뭔 개소리야?"

  나도 이해를 못하는데 다른 놈들이 이해할 수는 있을까.

  내 뒤에 있던 사내들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밀쳤다.

  "씨발. 내가 했을 땐 그 좆같은 시험 백날 뺑이치게 시켜놓고, 이 새낀 뭐 어째?"

  "…돌아가세요! 경비 부를 거예요!"

  "납득을 시켜줘야 할 거야 납득을! F급에서 C등급으로 시험도 없이 올라가는 게 말이 돼?!"

  "공격대 가입, 미궁 돌파, 귀족 구원. 더 읊고 싶은데 시간이 아까워서 안 되겠네요. 이만하면 납득이 가시나요? 사실상 B급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권한이 없어 못 올리는 것뿐이에요. 당신처럼 고블린, 그렘린만 백날 잡아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구요. 이제 경비대 부르기 전에 돌아가세요!"

  "그게, 그게 말이 돼?! 그걸 F급이 어떻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모두 기록됐구나. 근데 따로 보고한 적도 없는데 누가 말한 거지? 칼버드? 아니면 슈리엘? 누가 됐든 고맙긴 하다.

  바닥에 넘어져 엉덩이를 찧은 나는 곧바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저 한심한 새끼들이랑 더 엮이기 싫었다. 머리가 띵하다. 

  "…문제없는 걸로 알게요. 돌아가도 되는 거죠?"

  "아, 네! 아무 문제 없어요! 앞으로도 많은 활동 부탁드려요!"

  한 방 먹여주려 했는데, 메리의 열변을 듣고 나니 통쾌해졌다. 이걸로 봐준다. 저들은 메리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나는 게시판에 올라온 고위험 지역을 대충 훑어보곤, 거점 삼을 여관을 알아보려 거리로 나섰다. 익숙한 모습의 동쪽 거리. 내가 한바탕 피를 쏟았던 여관은 아직도 운영 중이었다. 

  그렇게 여관을 알아보고 다시 거리로 나가려 하는데.

  "씨발련아. 어디 가냐?"

  마침 주위에 사람도 없어서 습격당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치며 사내들을 바라봤다. 도끼와 짧은 나이프, 그리고 숏소드. 각자 다른 무기를 들고 나를 둘러싼다.

  '…병신들.'

  어떻게 모험가란 놈들은 하나같이 다 이럴까.

  물론 안 그런 놈들도 있을 테지만…

  "에휴…."

  똥 밟은 거라 치자.

  연성 수인을 맺는다.

  나는 양손을 교차시켜 날카로운 토검을 만들어냈다.

  화려한 마법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씨발! 저년 죽여!"

  저들에겐 마도의 길을 엿보는 것조차 사치였다.

  * * *

  "저기, 메리. 이걸로 할게요."

  "C급 임무군요! 어디 보자, 샤레이드 토벌? 으음, 권장 인수는 같은 C급 모험가 세 명인데 괜찮으시겠어요?"

  "…혼자선 안 되나요?"

  "가능하긴 하지만, 책임은 못 져요."

  "괜찮아요. 혼자서 할게요."

  "아, 네! 그, 그리고. 모험가님…?"

  "네?"

  메리는 내 옷에 묻어있는 시뻘건 액체를 보곤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 그건 뭔가요?"

  "…몬스터 몇 마리 잡았어요. 도시에 숨어들었더라고요."

  메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모험가 길드, 브리도니아 지부.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모험가들은 여느 때와 같이 껄렁한 모습으로 게시판 주위를 서성거렸다.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아니면 한탕 할 수 있는 임무는 없는지. 그러다 서로 치고받고 싸워 경비대에 끌려가고, 다섯이 모여 출발한 파티가 셋이 되어 돌아오는, 그런 흔한 날들의 연속이었던 모험가 길드에 조금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C등급 모험가의 탄생.

  그것도 승급 시험도 없이.

  C급 이상 모험가는 굉장히 드물었다. 정확히는, C급을 달성하고 나서 다른 길로 빠지는 일이 많았기에 '모험가'로서 잔존하는 인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집 삼을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기엔 너무 위험천만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모험가들은 유진이 C등급을 땄을 때 그리 놀라진 않았다.

  또 어딘가로 빠져나가겠지. 모험가들은 그저,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시선으로 유진을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탑을 오르기 위한 기반을 닦는 것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유진은 C등급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토벌 증표는 머리로 충분하나요?"

  ―쿵.

  테이블 위에 샤레이드의 머리가 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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