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빨간 선은 뭔가요?"
나는 지도에 쭉 그어진 빨간 선을 보며 말했다. 일단 검은 선은 능선을 뜻하는 것 같았고, 푸른 점은 몬스터를 뜻하는 것 같았다. 빨간 선은 푸른 점들을 지나쳐 능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그어져 있었다.
"거지같게도 진입로다. 다른 곳은 이미 몬스터들로 과포화 상태야."
"…골치 아프네요."
어딜 가든 고지전에 백병전이라니.
기사와 마법사가 없었다면 곧바로 반려당할 수준의 작전이었다.
"어차피 섬멸이 우리 임무라 싹 다 정리해야 하긴 하는데…"
"…드레이크를 상대로 고지를 어떻게 뚫느냐."
드레이크는 용의 아종이다.
용의 열등한 것만 몰려받은 듯한 작은 덩치와 퇴화한 날개.
그 추한 모습을 반영하듯 다가가기만 한다면 쉽게 잡을 수 있다. 다만 브레스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까다로운 이유는 10미터가 넘는 길이의 브레스 때문이었다.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병 서른.
이정도 병력으로 써먹을 수 있는 전략은 얼마 없다. 특히 상대가 흉포한 몬스터라면 말이다. 몬스터들은 겁이 없고, 살기 아니면 죽기를 택하기에 서로 섬멸전이 강요된다. 그게 아니라면 후퇴뿐이다.
그나마 기습이 효과가 있는데… 파헬른 상행길은 나무를 싹 다 밀어버려 엄폐물이랄 것도 없었다. 기습하기 전에 무조건 들킨다. 덩치를 줄이겠다고 부대를 쪼갤 수도 없고…
"그래도 마법사가 있으니 걱정은 덜해서 다행이군. 듣자 하니 용충 쿠룸바를 혼자서 잡았다고?"
"…고지는 문제없어요. 제가 다 날려버리면 되니까요."
"무리할 필요는 없다. 상황이 여의찮으면 치고 빠지는 것도 고려 중이야. 퇴로만 닦는다면 언제든지 기회를 노릴 수 있으니까."
보급은 충분했다.
나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 쓸어버리면 해결되는 이야기다. 이때를 위해서 모험가 등급을 올린 게 아닌가. 지금까지는 관심받기 싫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힘 조절을 해왔지만. 오늘부터는 다를 것이다.
압도적인 힘으로.
모두에게 나를 새겨줄 것이다.
물론 메테오 같은 도시멸망 급 마법을 선보일 수는 없었다. 과한 힘은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백색 마탑이 말하는 '빛의 주인' 따위가 되길 원치 않았다. 선을 넘어버린 강자는 의심과 경계를 산다. 그러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나는 쌓아 올린 역사가 없었으니까.
신뢰받을 수 없었다.
대를 이어 제국에 헌신한 대행자들처럼. 신에게 육신을 바쳐 봉사하는 성기사들처럼. 마왕을 무찌르고 잠에 든 용사처럼. 쌓아 올린 역사가 없는 나는 통제 불가능한 폭탄에 불과했다.
누군가는 오만하다 말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답답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이 세상의 일원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폭탄이 되기 싫었다. 그저, 평범하게. 이런 능력을 얻은 순간부터 평범은 물 건너간 이야기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되겠지.
세상에 당당하게 얼굴을 비출 수 있으면 됐다.
그 정도면 에일린 보기에 부끄럽진 않겠지.
그 정도면 된다.
그 정도면.
"하아…."
…안 부끄러운 부모였던 적은 없었지만.
평범함을 원하거든 이 마조 체질부터 바꾸든가 해야 했다. 에일린이 독립하고 날 잊어버릴 때쯤이 되면 자살이나 할까. 살아봤자 더 큰 부끄러움만 느끼게 할 것 같다. 부디 날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이 세상의 전투는 철저히 기사와 마법사 위주로 돌아갔다. 달리 말하자면 지구와 다르게 오와 열을 이루고, 보병과 기병이 수백수천수만이 모여 부딪히는 파워 게임의 역사가 길지 않았다.
태초부터 세상과 함께한 마나.
인간이 마나를 각성한 순간부터 일반병의 의미는 크게 퇴색됐다.
숙련된 기사 하나가 보병 수백을 능히 상대하며 적진으로 파고든다. 뛰어난 마법사 한 명은 수천의 병사를 가볍게 압도하며 먼지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병사가 아무리 많아봤자 기사와 마법사의 수가 밀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병의 의의는 보급과 점령지 장악에 있었다. 치안 유지는 덤이고. 그를 입증하듯 내가 속해있는 병력 중 열 명이 보급병이었다.
"모두 눈가리개 내려!"
콜린은 서른의 병력을 진두지휘하며 시에라 바위 지대를 가로질렀다. 모래가 폭풍처럼 날아든다. 콜린과 병사들은 투구 위로 투명한 천을 덧대어 모래바람을 막았다.
나는 콜린 뒤에 탔다. 그 덕에 눈가리개를 쓸 필요가 없었다. 2미터가 넘는 거구가 모두 가려주었기 때문이다.
말 하나에 두 명이 타는 건 위험한 짓이었지만, 내 무게가 원체 가벼워 말에게 무리가 가진 않았다. 보급병이 들고 있는 보급품보다 무게가 덜 나간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속도를 높여라! 목적지 도착할 때까지 주변 몬스터는 무시해!"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일반병을 써먹을 방법이 정녕 없는 걸까. 이 수많은 병력을 모두 고기 방패로 써먹어야 할까. 마나를 각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힘 싸움에서 밀려야 할까.
"대장! 전방에 그리핀 둘 출몰!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영주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마나를 각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나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콜린 경! 제가! 해치울까요!"
휘몰아치는 바람, 달리는 말발굽 소리.
나는 난장판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크게 소리쳤다.
사자의 몸통,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과 날개. 그리핀이었다. 단일 개체로 위험도는 C급이었지만 무리 생활을 하기에 실질적 위험도는 B급, 수가 많으면 A급에 다다랐다. 고작 두 마리라 해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낙마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아니! 괜찮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내가 어째서냐라고 묻기전 전에. 콜린은 목에 오러까지 담으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전원―!! 그것을 꺼내라―!!"
하늘을 호령하는 커다란 목소리. 그리핀은 호기스러운 목소리에 주춤했고, 병사들은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그것'을 꺼냈다.
그들이 꺼낸 정체불명의 물건은 조금 커다랬다. 지팡이처럼 생겼지만, 끝부분이 과할 정도로 뭉특했다. 지팡이가 아니라 철퇴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그런데 병사들은 그것을 마치 창을 잡듯 쥐어 그리핀에게 겨누었다.
나는 그들의 기행을 신경 쓰지 못했다. 여차하면 보호막을 전개할 거니까. 그리핀과 병사들의 거리는 고작해야 25미터였다. 말의 전진 속도와 그리핀의 하강 속도를 생각한다면 몇 초만 늦어도 발톱에 찢길 것이다.
하지만.
"――발포!"
콜린의 명령과 함께.
지팡이의 끝이 분리되며 그리핀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퍼어엉!!
투사체는 그리핀과 직격했고, 귀가 터질 듯한 소음을 내며 폭발했다. 새빨간 불꽃이 터지며 허공을 수놓는다. 동시에 강렬한 화염이 그리핀을 감쌌다.
―키에에에엑!!!!
그리핀은 불길에 휩싸여 그대로 추락했고, 말들의 발굽에 짓밟히며 생을 다했다. 콜린은 그리핀의 사체 위를 질주하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마탑 놈들! 이번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었구나―!!"
처음엔.
적색 마탑이 이번 임무를 주관한다 했을 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부대에 마법사는 나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무기를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됐다.
우리는 실험대였다.
"이게, 무슨."
"이번 원정에서 꼭 써달라는구나! 마법사인 네가 보기엔 어떻지?!"
어떻기는.
나는 얼굴을 와락 구기고 말했다.
"구려, 요."
"뭐―?!"
"구리다고요―! 저딴 거 쓸 바엔 그냥 저한테 부탁하세요―!!"
이딴 걸 대체 왜 만드는 거지?
추진체가 되는 막대는 통짜로 마석이었다. 못 해도 C급 마석. 그걸 가늘게 갈아버린 것도 모자라, 폭약 역할을 하는 구체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다. 저걸 폭파시키려면 막대의 마나를 전부 빨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소모된 막대는 그냥 버리고. 아까웠다.
"쓰레기예요 쓰레기―!! 이거 얼마에 샀어요―?!"
" 한 정당 은화 마흔 장이다!"
"…돌겠네."
이런 구닥다리를 은화 마흔 장이나 주고 산다고? 뭐 돈만 많으면 상관없긴 한데… 나를 두고 저런 쓰레기를 쓴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대장! 전방에 그리핀 무리 출현―!!"
그때. 나머지 무리로 추측되는 그리핀 무리가 나타났다. 수는 일곱. 정면으로 상대하기 부담되는 수였다. 콜린은 혀를 차며 말을 돌리려 했다. 방향을 틀어 속도를 줄인 뒤 상대한다.
하지만.
"멈추지 말고 그냥 가요―!!!"
"뭐―?!"
"가라고!!!"
소리치며 말하는 것도 슬슬 지쳤다.
나는 전진을 요구했다. 콜린은 의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많지 않았다. 마법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정신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말을 타고 달리는 상황에서는 마법사가 본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그게 평범한 마법사라면.
"전원! 속도를 높여라―!!"
"대, 대장?!"
"명령이다―!"
콜린은 나를 믿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겁이 나는지 고삐를 잡기 주저했다. 그러나 대장. 그것도 기사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콜린의 성격을 보면 즉결처형까진 아니더라도, 명령을 거부한다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저들에게 믿음을 심어줄 시간이다.
체감 시간을 느리게 하고 온몸의 마나를 끌어 올린다. 나는 하늘 위 작렬하는 태양을 보며 손을 뻗었다. 목표는 저 멀리 보이는 그리핀의 그림자. 뜨거운 태양만큼 그림자도 선명하게 드리워졌다.
'묶여라.'
암暗속성 마법. 그림자 묶기.
―키엑?!
콜린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떨어지는 그리핀 무리를 보았다.
일곱 마리 모두. 속도를 잃고 떨어졌다.
하강하던 그리핀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꿱, 소리를 내더니 땅에 곤두박질쳤다. 나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떨어졌다 해도 아직 정신은 붙어있다. 지나치는 도중 공격당할 수도 있었다.
―키에에에엑!!!!!!
"시끄러워. 조용히 해."
염동력을 이용해 떨어진 그리핀을 한데 모으고, 압축시킨다. 끄극, 쩌적. 피와 살점, 뼈가 응축되고 부서지는 소리가 병사들의 귀를 강타한다.
보통 마법이라 하면 불덩이를 던져 주위를 불사르는 등 주변 환경을 이용해 공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내가 보여준 마법은 그들의 상식과 일치하지 않았다.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시체 처리는 깔끔하게.'
하늘 위로 그리핀 큐브를 힘껏 던진다. 병사들의 고개가 돌아간다. 나는 손을 교차시켜 냉각 마법을 준비했다. 손 위로 떠 오른 푸른색의 마법진. 허공에 떠오른 그리핀 큐브는 새파랗게 얼어붙었고―
―파앙!
눈송이를 흩날리며 그대로 깨져버렸다.
"어때요?"
몰아치는 모래 폭풍 사이로 차디찬 얼음 조각이 떨어지며 투구를 때린다. 콜린과 병사들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
콜린은 말이 없었다.
못 들은 건지, 대답하지 못한 건진 알 수 없었다.
"…마나는 충분한가!!"
콜린은 뺨에 떨어진 서리 조각을 쳐내며 외쳤다. 살짝. 아니 많이 놀란 듯했지만, 소문의 붉은 마녀는 적이 아닌 아군. 겁을 먹기보단 어떻게 써먹을지가 더 중요했다. 그는 냉철했다.
"멀쩡해요!!"
나는 콜린의 등허리를 꽉 껴안으며, 목이 쉬어라 소리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