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하겠습니다! 모두 검을 들어라!"
그러나 저들이 '지원'을 하는 일은 없었다.
"…모두, 해치웠다고?"
저 사내가 리더인 걸까.
누구보다 앞장서 검을 뽑는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이미 소탕된 지 오래였다.
어느 멍청한 년이 힘 조절을 못 하는 바람에.
따라서 그가 검을 휘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으음…."
그는 이걸 기뻐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기뻐하는 쪽을 택했다. 푹 꺼진 언덕길 위에서 투구를 벗자, 순박해 보이는 금발의 시골 청년이 나타났다.
"제 이름은 카미에르 파헬른입니다! 남작령에 힘을 보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히 성함과 소속을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콜린은 제 주인의 명성과 본인의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답게, 물론 행동거지는 양아치에 가까웠지만, 귀족의 예의 바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파하르 슈발리에 브리도니아 백작님의 명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브리도니아! 구원 요청을 보낸 지 하루 만에 달려올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 말고 백작님께 감사하십쇼. 그리고, 카미에르라면 파헬른 남작가의 장자―…"
콜린과 카미에르는 환한 얼굴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던 나는 근처 흙더미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숨쉬기가 답답해 옷 앞섬도 살짝 풀어제꼈다. 벌어진 앞섬 사이로 새하얀 속옷이 보인다.
"하아…"
틈만 나면 한숨 쉬는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그런데, 저기 계시는 아가씨는…?"
그러던 도중.
카미에르는 나를 발견하곤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보든지 말든지.'
이대로 한 시간만 누워있고 싶었다.
"대장! 다 정리했습니다!"
내가 땅에 드러눕고 삼십 분 정도.
주변을 서성거리며 기회를 엿보던 몬스터들은 병사들의 바주카…가 아니라. '불의 지팡이'를 맞고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언덕은 내가 뒤집어놨으니 말할 것도 없었고, 기타 위험한 놈들은 콜린의 검에 대가리가 갈라졌다.
거기에 파헬른 병사 열둘도 왔으니 내가 움직일 일은 없었다.
"…이걸로 소강상태인가."
카미에르는 피 묻은 검 그대로 검집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경의 이름이 무엇이죠?"
전부터 사람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몬스터 뚝배기를 터트리던 거한. 검신을 휘감는 푸른빛을 보면 분명 오러 사용자였다.
카메에르는 그를 기사라 판단했다.
동시에,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파헬른의 적자인데도 오러는커녕 마나 감응도 못하는 게 부끄러운 듯했다.
콜린은 등에 칼을 매며 가볍게 묵례했다.
"콜린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파헬른을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콜린 경."
"하하…! 과찬이십니다!"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콜린은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빠졌다.
병사들의 상태는 양호하다. 사망자는 없고, 부상이 있어도 가벼운 상처에 그쳤다. 말들이 지치긴 했지만, 사료와 건초더미는 충분하다. 그런데. 콜린이 괜찮다고 말하기 전에, 카미에르가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남작령에 귀하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뒤에 있는 병사들과… 저기 계시는 아가씨도 포함해서요."
감사 인사를 겸한 초대였다.
콜린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게 내려온 임무는 상행길을 막고 있는 몬스터의 섬멸입니다. 임무는 끝났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폐를 끼치고 싶진 않군요."
허나 귀족의 초대는 일반적인 초대와 달랐다. 콜린은 신중했다. 괜히 초대에 응했다 꼬투리라도 잡히면 제 주인만 욕 먹이는 일이다.
"수상한 의도는 없습니다. 순수하게 감사 인사를 위한 초대니까요."
"…."
본디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당연한 논리다. 정치 없는 싸움은 의미없는 힘자랑에 불과하다. 상대가 지성이 없는 몬스터라 해도 마찬가였다. 몬스터와 전쟁을 일으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칼을 뽑는다.
남작령의 상행길을 뚫는 걸 전쟁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있을지 모르겠다만, 국지적으로 보았을 땐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러니까, 브리도니아 백작이 호구 새끼라 이곳에 병력을 보낸 게 아니란 말이다.
"백작님과 약속한 광물은 무슨 일이 있든 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길."
어떤 것이든 오고 간 게 있겠지.
하지만 이는 귀족들의 사정.
"…거기서부터는 제 권한이 아닙니다. 방금 말은 잊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콜린은 알아봤자 하등 도움이 안 됐다.
그는 귀를 몇 번 후벼파더니 병사들을 시켜 말들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뭐… 초대 정도야 받을 순 있습니다. 파헬른의 적자가 초대하는데 받아야지요. 다만 제 신분이 브리도니아에 묶여있는지라 오래 체류할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충분합니다."
그때.
콜린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마 근육이 좁혀진다. 살짝 탄 구릿빛 피부, 털 하나 없는 매끈한 머리는 얼굴에 난 흉터와 합쳐져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긴장하며 등허리를 세웠다. 카미에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러 나이트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런 진지한 표정을 지을까, 하고 궁금해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자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그 침묵 속에서 나온 말은.
"고기 있습니까?
"…."
"저는 소고기보단 돼지고기를 더 선호합니다만…"
뭐야, 맥 빠지게.
하긴. 고기는 중대 사항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떴다.
"으으―…"
다 죽어가는 노인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조금 부족하긴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쉬었다. 어지러움도 많이 줄어들었고.
"…."
"…."
카미에르와 시선이 맞는다.
나는 피곤에 쩔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옷 앞섬을 조여 맸다.
예전의 나였더라면 고개부터 숙였을 것이다. 그러나 슈리엘의 형 하이라크에게 개긴 이후로 깡 비슷한게 생겼다. 귀족 상대로 너무 예의 바르게 구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평민은 평민답게. 어느 정도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자연스럽다.
피곤함을 느낀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 영체 상태에 진입한 다음 머리를 재구축하면 정신이 맑아질까. 나중에 한번 해봐야겠다.
* * *
"외벽을 비롯해 몬스터가 출몰한 지역은 모두 정리가 끝난 상태입니다. 상행길이 뚫렸으니 파헬른도 곧 정상화가 되겠죠. 기쁜 일입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크나큰 피해를 안겨주었지만,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현실에선 적군을 죽여봤자 노획 말고는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하나, 상대가 몬스터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놈들의 배를 갈라라.
그러면 돈이 나온다.
정확히는 마석이.
이 외에도 돈 되는 것들은 모두 해체하고 분리해 실시간으로 가공했다. 저급 몬스터를 가공해봤자 얼마나 되는진 모르겠다만, 유의미한 이득은 볼 수 있었단다.
그리고 더 다행인 점은,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기 전에 정리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또한, 전시경제의 극초반 이익을 잘 활용했다. 파헬른은 내부 시스템을 풀가동하되 미래를 내다 팔진 않았다.
결과만 보자면 이익보단 손해가 크기는 했다.
허나 이번 사태는 거름이 되어 앞으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경험만큼 좋은 보상은 없으니까.
물론.
죽은 남편의 투구를 붙잡고 오열하는 과부의 울음보다 가치가 있느냐 물으면 답할 수는 없지만.
"…끔찍한 일입니다."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다는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다.
파헬른 내부는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거리에는 나무 막대에 주인 없는 투구가 여럿 걸려있었다.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기다리며 쓸쓸히 바람을 맞는다.
카미에르는 영혼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어째서 파헬른일까요. 이 조그마한 남작령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신은 무심하기도 하시지."
내려오는 해와 겹친 차디찬 한숨이었다.
몬스터 웨이브… 원인이 어찌 됐든 간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의 탓이든, 아니면 몬스터들의 영역 다툼 탓이든. 후자의 경우, 새로운 강자의 출현은 다른 몬스터들의 활동 범위를 외곽으로 밀려나게 한다.
혹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일으켰다든지.
"콜린 경.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
"죄송합니다."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였지만, 어디까지나 계약에 묶인 봉급쟁이였다. 아마 알고 있어도 확실하지 않은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주제넘은 짓을 하고 책임질 자신 없으면 입 닫고 있는 게 맞았다.
"후우…."
눈을 감고, 이번엔 조금 다른 한숨을 쉰다. 앞으로의 각오가 담긴 한숨이었다.
"유진, 이라고 했지요."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카미에르는 지친 얼굴로 물었다.
"마법사라 들었습니다. 마탑 소속인가요?"
"…모험가에요."
"모험가! 용병으로 참여하셨군요."
"누가 승급 시험을 빌미로 참여하라 해서요."
하하. 콜린이 웃는다.
공격대 참가는 실적으로 인정되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승급시켜줄 테니 뛰어오라니까 기분이 묘했다.
"혹시… 계약된 상태이십니까?"
"아니요. 모험가 일은 A급으로 올라간 뒤 그만둘 생각이에요. 그리고 평민이니 말 놓으셔도 돼요."
그의 얼굴이 밝아진다.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고용될 생각이 있느냐 물어보는 거겠지. A급 마법사라니. 절대로 놓쳐선 안 될 인재다. 하지만 꼭 그런 생각만 있지는 않아 보였다. 자꾸만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내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묶여있을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면 계약 기간을 두고 고용될 생각은?"
눈을 지그시 감고, 약간 허전한 옆을 의식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45도. 누군가에게 기대기 딱 좋은 각도. 하지만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와 바래져가는 사람들의 통곡만이 뺨을 적셨다. 머리칼이 쏠린다. 추라도 올려놓은 듯 묵직한 감각이 목뼈를 누른다.
무겁다.
정말로. 정말로 무거웠다.
"…."
신기하여라.
둘보다 하나가 더 무겁구나.
"…미안해요."
눈을 뜬다. 45도로 꺾인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요."
찰나의 시간에 아련해진 금발 머리 귀공자…. 나는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부잣집 도련님을 대하듯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카미에르의 어깨가 축 처진다.
그렇게 말을 끌고 한참을 걷자, 주변 건물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 보였다. 파헬른 남작이 사는 저택이었다.
보통 귀족들의 건물은 석제로 만든다는 걸 고려하면 상당히 소박한 행보였다. 하지만 그 위엄은 석조 건물에 지지 않으니, 대저택을 방불케 하는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아기자기하게 깔린 정원은 멋스러움을 살려주었다.
나와 병사들이 감탄하자 카미에르는 기가 산 듯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