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전해라! 내가 돌아왔다고!"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명령한다.
"들어오세요.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와 콜린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의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면 무를 수도 없었다. 백날 짬밥만 먹다 귀족 만찬을 대접받는단 생각에 신이 나 있었다.
"대접까지 두 시간 가량 걸리니 그전까지 조금 쉬고 계시지요. 콜린 경과 유진 씨는 귀빈실을 쓰시면 됩니다. 서른 명의 병사들은… 음. 실례되지 않는다면 근처 여관에 묵으실 수 있겠습니까? 여관의 질은 제가 보증합니다."
―예!!!
맛있는 밥 먹여준다는데 어찌 거절하리. 병사들은 합창하며 답했다. 그 기세를 보아하니 아마 창고에 묵으라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 * *
귀빈실.
호화스러운 가구들과 부드러운 침대보.
나는 그곳에 앉아 파헬른의 적자, 카미에르 파헬른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삼 년 계약에 금화 오백 장. 어떻습니까? 주의 사항만 잘 따라준다면 어떠한 간섭도 없습니다."
만찬이 준비되기 전.
그는 내게 찾아와 돈 보따리를 내밀었다. 황금빛을 내며 찰랑이는 금화들. 못해도 이백 장은 넘어 보였다.
"선입금으로 삼백 장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저 많은 돈을 어디서 났는지가 더 궁금했다.
"…제 뭘 보고 그렇게 많은 돈을 주시는 거죠?"
카미에르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상행길. 언덕에서 울린 폭발음. 그 흙기둥을 보았습니다."
"…."
"그 거대한 기둥을 보고… 저는 제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마나도 쓰지 못하는 몸뚱어리를 백날 굴려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요."
"…."
"지금까지 기사와 마법사를 영입하려 많은 시도를 해왔지만, 결국 그들은 돈을 보고 떠났습니다."
"…."
"하지만 직감이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다르다고. 돈을 얼마를 주든 데려와야 한다고."
"…."
"이번에 추진한 광산 개발로 천문학적인 돈이 모였습니다. 당장 현금화는 어렵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겁니다. 오백 장이 부족하십니까? 백지수표라도 가져다드릴까요?"
"…."
"그러니 부디――"
그 순간.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
"고개는 함부로 숙이는 게 아니에요."
나는 카미에르가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에 손을 들어 저지했다.
비굴함을 욕하진 않는다. 목표를 이룰 수만 있다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게 상식인 세상이다. 이제 그 뒷감당을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앞으로 깎아낼 수 있는 자존심이 얼마나 있길래 저러는 걸까. 자존심이 바닥을 보인다면 무엇을 깎아낼까. 심히 궁금했지만 고이 묻어두기로 했다.
그는 체념하며 말했다.
"…제가 한심하십니까?"
"필사적이긴 하네요."
"제겐 돈밖에 없습니다."
내게 줄 것도 돈밖에 없고.
"인력 부족에 시달린 게 언제부터죠?"
"…4년 전부터입니다."
"정말. 정말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나요?"
"비참하게도."
변변찮은 서부 변두리 파헬른.
자랑할 만 한 특산품도 없고, 그나마 개발한 자금줄은 광산업. 파헬른은 칙칙했다. 무엇보다 마법사나 기사를 위한 인프라조차 구축되지 않아, 이곳에 머물려 하는 인재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땐 돈 문제가 아니었다. 카미에르 말마따나 파헬른은 고작해야 자그마한 남작령이다. 나를 고용하기보단 인프라부터 구축하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제겐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너는 내게 줄 게 없다. 차마 직설적으로 말하진 못했으나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보다 본인이 더 잘 알 테니까.
"그렇, 습니까."
"…."
그는 선천적 마나 불감증이 있었다.
세상의 경계도 볼 수 있는 내게, 남의 몸 상태 파악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저 체질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평생을 수련해도 마법은커녕 물 한 방울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안타까워라.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하다못해 책임감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그들은 내가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규칙을 보란 듯 깨트리니까.
보상 없는 선행이 존재하는가?
인간은 대가 없이 움직일 수 있는가?
그들은 내가 '아니다'라고 단정 지은 명제를 손쉽게 반박한다.
'미래를 생각하면 최대한 많은 귀족과 연을 맺어야 해.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보단 정치적인 입지가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 한 번쯤은.
착한 사람을 흉내 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딱 한 번만이야.'
귀족된 몸으로 몬스터를 잡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마나도 없는 몸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조금 도움을 주려고 한다. 카미에르는 대가가 무엇이든 나를 위해 기꺼이 칼을 들어줄 것이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나는 대가를 바라고 움직이지만.
"…알겠습니다. 휴식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잊어주십쇼."
너는 그런 인간이 되지 말지어라.
"음…?"
―철컥.
그는 착잡한 얼굴로 방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웠다. 나간 사람도 없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카미에르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입을 꽉 다물며 날 바라볼 뿐이었다. 화나 보이진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마법. 쓰고 싶어요?"
"예…?"
이건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수도, 단순히 피고 지는 하룻밤의 꿈이 될 수도 있다.
"마법, 오러. 쓰고 싶냐고요."
"…말조심하십쇼."
카미에르는 얼굴을 굳히고 주먹을 꽉 쥐었다.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걸까.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날 때부터 재능이 있었으니."
"질문에 대답하세요."
"제가 오러를 각성하려고 몇 년을 노력한 줄 아십니까? 자그마치 열두 해가 넘습니다. 제가 아직 철이 들지 않았을 때부터 온갖 것을 먹고 수만 가지 기행을 시도해봤습니다."
"질문에."
"하지만 아무 일도,"
"대답하세요."
마법이란 참으로 기이했다. 기괴하고 기묘하기에 마법이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마귀 마魔자를 붙이니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늘 진리가 있으니 모든 마법사는 받아들여야 했다. 그 기이함을 받아들여야 온전히 자신의 그릇이 된다.
"쓰고, 싶습니다."
"…."
"이제 됐습니까? 같잖은 장난은 집어치우십쇼. 더 무례를 범한다면 파헬른의 이름으로 넘어가지 않을―"
"도와줄게요."
"…."
그래.
그렇기에 기이함으로 다가가겠다.
마魔로써 다가가겠다.
"도와줄 수 있어요."
내가 너의 기연奇緣이 되어주마.
"…아니. 당신은 못 합니다. 못할 겁니다. 전 둔재니까요. 둔재는 둔재답게.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됩니다."
보고 겪지 못하면 믿지 않는 불쌍한 인간이여.
"잠시. 조용히."
너에게 진리를 보여주겠다.
"커흑―?!"
짧은 블링크. 빛이 번쩍이며 카미에르의 코앞으로 이동한다. 나는 손바닥을 펼치곤 그의 명치를 내다 꽂았다. 영혼을 두드리는 충격에 눈이 하얗게 뒤집힌다.
나는 그가 넘어지기 직전 염동력을 이용해 몸을 고정했다. 마나 파장을 읽어 들인다. 그의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정보를, 그리고 그가 쌓아 올린 역사를.
'마나는 쌓여있지만 통로가 닫혀있어.'
12년의 노력은 허사가 아니었다. 몸에는 수상할 정도로 많은 마나가 쌓여있었다. 이렇게 쌓인 마나는 보통 허공으로 날아가지만, 카미에르는 아니었다. 몸 전체가 마나 저장고였다.
하지만 그는 마나 회로가 없었다.
아무리 마나가 많아도, 회로가 없다면 티끌만큼의 마나도 사용할 수 없었다.
"당신은."
그러나 아크 메이지의 관점으로 평가하자면, 카미에르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마나를 각성했다. 회로가 없을 뿐이다. 본래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그에게 일어났다.
평범함과는 동떨어진.
"둔재가 아니에요."
다른 말로 하면 특별한.
너는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활짝 열리는 것이 느껴진다. 사고가 빨라진다. 나는 그의 몸을 즉석에서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파괴와 창조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많은 도움은 주지 않았다. 그저, 좁디좁은 통로 하나를 만들어준 것뿐이다. 남들도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는 둔재의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그뿐이다.
그러나 너는 둔재가 아니기에. 세상이 주지 않은 노력의 보상을 내가 대신 주도록 하겠다.
물론 곧바로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그의 재능을 생각하면 대성大成은 예정된 일이었다.
"허윽, 허, 헉?"
눈을 뜬 카미에르는 땀을 줄줄 흘리며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눈을 뜨기 전, 이미 문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유진? 어디, 갔. 하아…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그가 있던 자리에 작은 불씨를 남기고, 다시 태어난 카미에르를 기다리며 묵묵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 * *
카미에르의 인생을 요약하자면 패자의 삶이었다.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부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렇게 빠져나간 돈만 해도 수천 골드가 넘었다. 이렇게 돈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이 쓸모없는 몸으로 백날 칼질해봤자 일반 병사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다를 거야. 이번에는 꼭 인재를 영입할 거야. 더 많은 돈을 쥐여주면 결과는 바뀌겠지.
하지만 바뀌지 않았다.
눈앞의 마법사도 같았다.
파헬른은 매력이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이 돈을 영지 발전에 쓴다면 알아서 인재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급했다.
깎여나간 자존심. 광산 개발조차 자신이 아닌 아비의 업적이다. 자신에게 향한 기대는 이미 떠나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