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시작!!"
―콰아아앙!!!
흩날리는 파편. 바닥을 박살내며 돌진한다. 몸에 화염을 두른 페카폴리스는 그 자체로 거대한 유성우가 되어 내게 날아왔다.
갑작스러운 실내전.
페카폴리스는 1층이 풍비박산 나는 것도 모르고 땅을 박찼다. 복구는 금방 가능한 걸까. 이렇게 난리를 피워도 탑이 무너지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힘 조절을 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똑같은 걸로 받아치는 걸 아주 좋아한다.
손에 화염을 두른다. 페카폴리스가 말했던 것처럼 더 격렬하고, 더 화려하고, 더 강대한 마법을 준비할 것이다. 나는 뜨거운 열기를 마시며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용암처럼 뜨거운 불길이 팔을 휘감는다. 그렇게 모인 불길은 하나의 의지가 되어 페카폴리스를 향해 뻗어나갔다.
염룡권炎龍拳.
마치 용이 아가리를 벌리듯.
"――?!"
크게 휘두른다.
―쿠우우우웅!!!
용에게 삼켜진 페카폴리스는 순간적으로 큰 폭발을 일으켜 뒤로 빠져나갔다. 용암처럼 뜨거운 이빨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이번엔 발목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난다.
"흐읍―!!!"
뒤로 폭발을 일으켜 추진력을 얻은 뒤, 발에 화염을 두르고 휘두른다. 회축回蹴. 큰 동작인 만큼 빈틈도 많았으나 화염이 그 빈틈을 메꿔주었다. 더 큰불로 집어삼키지 않는 이상 파훼는 불가하다.
나는 곧바로 흙벽을 생성해 그녀의 발길질을 막아냈다. 쿠웅! 산산조각이 나는 벽. 무너져내린 진토는 곧바로 녹아 흐물흐물해졌다.
'…좁아서 답답해.'
페카폴리스는 실내전의 이점을 잘 활용했다.
조금 약한 기술을 쓰더라도, 먼저 접근해 정신 집중을 흩트리는 게 대마법사전에서 우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서로 물러날 곳이 없기 때문이다. 도망쳐 역공을 도모할 수도 없다. 도망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니.
그녀의 전투방식은 베틀 메이지였다.
"화끈하지―?!"
염룡권에 한 번 당했던 그녀는 내게 무리해서 접근하지 않았다. 긴 다리를 이용해, 천천히 벽에 몰아붙였다.
내려찍기, 돌려차기, 휩쓸기. 그녀의 발이 닿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거기에, 그녀의 모든 기술은 커다란 폭발을 동반해 살인적인 풍압이 주변을 휩쓸었다. 허나 페카폴리스는 자신이 일으킨 폭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밀려나지 않았다.
'성가셔.'
성가셨다. 뇌를 익히는 열기에 사고 감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술식을 짜야 하는데, 그러면 힘 조절을 할 자신이 없었다.
'죽이면.'
이기려는 전투가 아니다.
'안 돼.'
인정받기 위한 전투다.
"막기만 해서 백 층에 갈 수 있겠어―?!"
콰앙! 그녀가 바닥을 찍자 불기둥이 치솟는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사방에 얼음 탄환을 뿌렸다. 하지만 곧바로 녹아 없어졌고, 수증기가 되어 페카폴리스의 몸을 뒤엎었다.
살인적인 고압 수증기. 페카폴리스가 멈칫한다. 허나 뜨거운 것이라면 모두 면역이 있는지 가볍게 뚫으며 발을 휘둘렀다.
'얼음과 흙은 녹아내리고…'
바람과 불로 집어삼키기엔 힘 조절이 걱정된다.
피해 없이 그녀를 제압할 방법을 생각해라. 죽이면 안 된다.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그녀를 묶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닿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몸에 닿을 수만 있다면, 마나를 뒤흔들어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뜨거운 불길이 접근을 방해했다.
……….
…….
…맞아.
내 특기가 있었지.
이건 시험이다. 서로의 생生이 보장된 결투. 사死가 끼어들기엔 너무나도 왜소한 전투였다. 하지만 난 아니었다. 나는 기꺼이 생을 내려두고 싸울 수 있었다.
"끝이야―!!!"
마침내 나를 벽으로 몰아붙인 페카폴리스는 모든 열기를 모아 아래 차기를 준비했다. 그것에 살기는 보이지 않았다. 베리어를 깨부수고, 나를 열기로 기절시킬 정도의 위력이었다.
"…."
나는.
열기를 막아주는 베리어를 풀어버렸다.
"――?!"
살이 타들어 간다. 흙조차 녹이는 뜨거운 공기가 목을 타고 들어가 장기를 익혀버린다. 나는 끊어질 것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페카폴리스의 몸에 다이빙했다.
"―미쳤어요?!"
―치이이익!!!! 살이 익는 끔찍한 냄새가 주변을 채운다. 나는 희미해져 가는 감각 속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베리어를 풀고 달려드는 나를 피하지 못했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넘어진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댄다.
"어, 어?!"
페카폴리스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손이 닿자, 내게 잔류해있던 마나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아, 자, 잠깐! 반치이이익―!! 힉, 으그긋, 으극?!"
마나 통제의 극에 달한 고위 마법사들은 접촉만으로 상대방의 마나를 컨트롤할 수 있다. 물론 저항이 심하다면 통하지 않았고, 마법사가 접근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기에 할 수 있어도 안 쓰는 기술이었지만.
"아, 힉, 윽."
나는 달랐다.
"으, 으으……."
페카폴리스가 기절한 동시에, 1층을 휘감았던 모든 불이 꺼졌다. 녹아내린 외벽과 엉망이 되어버린 바닥. 깔끔했던 1층은 지옥도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녀의 몸 위에서 신속하게 재구축을 했다.
뇌만은 익지 않게 보호해두었지만, 심장을 비롯한 모든 장기가 씹창이 나 있었다. 쇼크가 오지 않은 건 오로지 사기적인 마나량 때문이리라. 아크 메이지의 육체가 아니라면 시도조차 못 하는, 그녀의 말마따나 반칙과 다름없는 기술.
'뭐… 이겼으면 된 거지.'
나는 피를 토해내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이고 두야…."
나와 페카폴리스는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몸에 치명적일 정도로 무리를 가한 것도 아니고, 나는 애초에 숨만 붙어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다. 막말로 머리가 잘려도 정신만 살아있다면 재구축이 가능하다.
눈을 뜨면, 나는 페카폴리스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있는 상태였다. 약간의 탄내와 잘 관리된 여인의 살내음이 코를 찔렀다.
기절하는 순간까지 베리어를 두르고 있던 페카폴리스와 달리, 나는 맨몸 그대로 불길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옷이 다 타버렸다. 새하얀 피부는 물론이고 자궁 문신이 새겨진 치부와 분홍빛 유두를 전부 내비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재구축은 옷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다.
"어, 음? 으음?! 으갸아악―?!!"
그녀는 깜짝 놀라며 허리를 세웠다. 방금까지 격하게 싸웠는데, 정신을 차리더니 웬 전라의 소녀가 몸 위에 놓인 상황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내가 이상한 건가.
"께윽."
쿵. 맥 빠진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난폭하기도 하셔라. 잔해 가득한 바닥에 떨어트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잔해가 피부를 지진다.
뭐… 산채로 불타는 고통과 비교하면 정말 별거 아니긴 했지만, 이렇게 물건 취급당하니 묘하게 달아올랐다.
"자, 잠깐만! 괜찮아?!"
쓰러진 나를 곧바로 일으켜 세운다.
괜히 태클 걸리기 싫었기에, 상처는 바로 재구축했다.
"…처리반 오기 전에 몸부터 가려."
페카폴리스는 자신이 벗어던진 상의를 회수해 내 몸에 둘러주었다. 열기 가득한 옷이 치부를 가려준다. 나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셔츠에 감탄하며 말했다.
"키가, 굉장히 크시네요."
옷의 크기를 감안하면 178cm는 될까. 여자치고, 아니. 어지간한 사내에게도 꿀리지 않는 피지컬. 탄탄한 복근과 긴 다리로부터 나오는 각선미를 보면 마법사치곤 자기 수련이 철저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방금 싸움. 리치에서 밀렸었지. 나도 팔다리가 길었더라면 제대로 된 응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땅꼬마인 게 괜스레 아쉬워진다.
"지금 키 물을 때야?"
이를 빠득 간 페카폴리스는 난장판이 된 1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한숨을 퍽퍽 쉬는 페카폴리스를 향해 킥 웃으며 말했다.
"신나게 싸우시던데요."
"그건 네가! 아니, 하. 그래. 다 내 잘못이지."
나는 큭큭 웃으며 앞을 가린 잔해를 저 멀리 치워버렸다. 페카폴리스의 눈이 커진다. 너 알몸인데 괜찮겠냐는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중심부로 걸어가면, 처리반이 내려와 열심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또 시작이네'와 비슷한 얼굴로 잔해들을 치워나갔다. 놀라운 점은, 그들이 잔해를 끼워 맞추는 동시에 원상복구가 됐다는 것이었다.
'현상 복구 마법이 있었던가?'
나는 이 놀라운 광경에 눈을 빛내며 분석하려 들었지만―
"계집애가 부끄러움도 없니?!"
"으헥."
"그리고 이건, 대, 대체 무슨. 남사스럽게!"
목덜미가 붙잡혀 저지당했다.
나는 그녀의 손아귀에 끌려가 뒤로 넘어졌다. 셔츠가 펄럭인다. 페카폴리스는 내게 꾸중을 날리려 했지만, 자궁 위로 새겨진 문신을 보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초간의 침묵.
그녀는 진절머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해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그래. 포기하면 편해.
"…내 방으로 가자."
허공에 손날을 내려쳐 작은 균열을 생성한다. 그녀는 균열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팔이 열쇠라도 되는 것마냥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러자 양옆으로 갈라지는 균열. 성인 남성 하나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방식이었다. 카르드라실에 입장할 때, 엘븐 나이트가 저렇게 손을 넣어 입구를 만들었다. 비슷한 방식인 걸까. 그녀는 내가 가만히 균열을 응시하고 있자 따가운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뭐해? 안 들어와?"
"말이 가벼워졌네요."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불만 있어?"
불이 많은 여자긴 했지.
이게 페카폴리스의 진짜 모습인 걸까. 귀찮은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걸 보면 조신한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 * *
"너 대체 정체가 뭐야?"
페카폴리스의 방은 87층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브리도니아의 광경. 아찔하다. 물론 그녀의 방에 입장했다고 실제로 87층을 오른 건 아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손님 입장이다. 남의 도움으로 올라봤자 탑이 인정을 안 한다.
"평범한 마법사예요."
"지랄."
나는 그녀의 핑크빛 침대 위에서 다리를 흔들며 방을 구경했다. 온통 핑크빛인 게 세르티랑 취향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아니면 자기 머리색을 따라 가구를 산 것이던가. 하여튼 언제 봐도 신기한 오드아이다. 분홍 머리도 흔치 않은데 오드아이라니. 기묘한 색 배합이었다.
그녀는 턱을 괴며 나를 쏘아붙였다.
"너 정도면 탑을 오르는 것보다 세우는 게 더 나을 텐데."
페카폴리스는 나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탑을 세우라니. 내 경지를 파악이라도 한 걸까. 무의식중에 내보내는 마나는 늘 조절하고 있을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고작 시험에서 이긴 것 가지고, 너무 고평가하는 게 아닐까요?"
고작. 시험에서.
페카폴리스의 이마가 좁혀진다. 그녀는 무척 짜증이 나는 듯했지만, 이내 가라앉히고 내게 물었다.
"네가 탑을 올라서 얻을 수 있는 게 있을까?
"…."
없다.
그녀의 말이 맞다. 보는 즉시 배울 수 있고, 원소를 제 몸처럼 다룰 수 있는 내게 초월이란 의미 없는 경지였다. 사실 다른 목적으로 오긴 했지만, 일단은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왜 탑에 온 거지? 무엇을 얻기 위해 이곳에 온 거지?"
"…."
"시험이지만, 나는 모든 힘을 쏟았어. 탑주랑 싸울 때보다 더 진심이었다고. 알아? 그런데, 익숙한 느낌이 들더라고."
"…아니에요."
"봐줬구나. 발뺌할 생각 하지 마."
"페카폴리스."
"지금도.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아."
솔직히 나도 억울했다. 1층부터 부탑주를 만날 줄 누가 알았냐고. 관심은 받되 묵살하며 차근차근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처음부터 망해버렸다. 이렇게 과한 관심은 나도 사절이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러누웠다. 푹신한 배게가 머리를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