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93)

  "서로 자세한 건 들여다보지 말고 결과만 보자구요."

  "…."

  "저는 당신을 이겼고, 등반할 자격을 얻었어요. 전 이제부터 뭘 하면 되죠?"

  "하아…."

  

  ―쿵!

  페카폴리스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끙끙거렸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편하게 대해주면 나도 편한데, 그러긴 이미 물 건너 갔다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거 받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손만 내밀어 무언가를 건넸다. 팔찌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건넨 팔찌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잃어버리지 마. 그거 없으면 못 올라가."

  "이건…?"

  "등반자를 위한 팔찌. 마나를 불어넣으면 다음 층으로 널 인도할 거야. 물론, 시련과 함께."

  적색마탑과 어울리는 붉은색 팔찌.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팔찌를 장착한다. 사용자의 팔목에 맞춰 수축하는 팔찌. 착용감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물었다.

  "모든 층을 오르면 어떻게 되죠?"

  "탑주 자리를 놓고 싸울 수 있어. 도전장을 내미는 거지. 혹은…"

  "혹은?"

  "다음 탑으로 도전할 권리를 얻게 돼. 다시 처음부터. 1층부터 100층까지 등반을 시작하는 거지.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라.

  진리의 편린을 맛본 나로선 그닥 추천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몰라야 이로운 게 있는 법이다. 모든 걸 알아버린 내가. 이 세상에 떨어지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지금도 가끔, 자살 충동이 밀려올 때가 극심한데. 진짜 진리를 보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안 간다.

  "뭐야, 왜 그래?"

  "…."

  그 공허함.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것 같은 공허함. 그 빌어먹을 공허함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야, 야! 괜찮아?"

  "…괜찮아요. 잠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목표가 생겼잖아. 살아갈 이유가 있으니 그것에 충실하면 된다. 나는 혀뿌리를 깨물어 정신을 각성시켰다. 혀를 반쯤 끊어놓으니 부정적인 생각들도 가시는 듯했다.

  "하아. 모르겠다. 내 위로는 탑주놈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괴물이 나타나다니…"

  페카폴리스는 머리를 긁으며 손날을 내리쳤다. 1층으로 통하는 균열이 생성된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으며 목소리 톤을 조정했다. 접수원 페카폴리스였다.

  "축하해요. 당신은 지금부터 적색마탑의 일원이에요. 길드랑 마찬가지로 기여도를 쌓으면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관심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늘 1층에 있을 테니까요. 물론 당신한테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말 편하게 해도 돼요."

  "…그래, 유진."

  그녀는 포탈을 열며 말했다.

  "좋은 활약 기대할게. 다음에 보자."

  * * *

  마탑에 들어온 지 정확히 2주째 되는 날.

  나는 따로 배정받은 개인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벌써 48층인가.'

  등반과 시련… 말만 들으면 뼈를 깎는 고행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냥 평범한 자기 수련의 나날이었다. 애초에 모든 마법을 통달할 수 있는 내게 시련은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등반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오히려 올라가는 속도 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70층 언저리에서 잔류하지 않을까 싶다. 말로는 백 층을 간다고 했지만, 진짜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테이블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며 기지개를 켰다. 너무 오래 앉아있었더니 피가 쏠린다.

  내가 이곳에 와 가장 첫 번째로 시도한 일은 논문 작성도, 마법 수련도 아닌 무기 개량이었다. 남을 말로 가르치는 건 딱히 재능이 없었고, 수련은 해봤자 도움도 안 되니, 할 게 이것밖에 없었다.

  콜린이 파헬른 남작령으로 갈 때 사용했던 무기, 불의 지팡이. 그 형편없는 효율을 보니 혈압이 오르더라. 기필코 개량해야겠다 마음먹었다.

  "하으으…."

  테이블에 쌓인 서류는 그 결과물이었다.

  "마녀님! 그레들린 자작령에서 추가 발주가 들어왔어요!"

  "옆에다 놔."

  "네!"

  마탑이 뒷배로 있는 건 생각보다 훨씬 편리했다.

  처음엔 생각 없이 한 개량이었지만, 성능이 검증되니 알아서 타 영지와 계약을 맺어주었다. 브리도니아, 파헬른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부에 있는 몇몇 백작령까지 나를 원했다.

  재료 수급도 알아서 해주고, 판매도 알아서 해준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신속하기까지 하다. 수수료를 제외해도 내게 굴러떨어진 돈이 어마무시했다.

  "돈은 어디다 옮길까요?"

  "너 가져."

  "네, 네? 네?!"

  "어차피 이틀 치 수입이잖아. 필요 없어."

  일거리가 생긴 건 좋았지만… 내가 무기 개발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니란 말이지. 돈을 벌려고 온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명성을 쌓을 만한 일이 필요했다.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좋은 일이 뭐 없을까. 이렇게 무기 개발자로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만, 결국 상인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큰 판이 필요했다.

  정말, 정말 큰 판이.

  "클락. 펜 좀 줘. 편지지도 같이."

  내 옆에서 일하고 있는 조수, 클락.

  나랑 키가 비슷한 어린 소년이었다. 허나 그 어린 모습과 달리 층계는 34층에 달하니 무시 못 할 수준의 마법사였다.

  불의 지팡이를 개발한 장본인인데… 개량품을 보여주니 조수로 받아달라 하더라. 하나보단 둘이 나을 것 같아서 잡무를 맡기고 있다.

  "아, 네! 혹시 어디로 보내실 건가요?"

  아무튼.

  서부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간다. 이제 고작 두 달이면 에일린을 만날 수 있다니 무척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파헬른? 아니면 브리도니아 영주님?" 

  어떻게 이 긴 시간 동안 편지 한 통을 안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루셸리니로."

  "으음…."

  구석에 쌓여가는 종이 뭉치만 다섯 개. 고작 안부 인사인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안 굴러갈까.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편지지를 구겼다. 이번에도 아니다. 오천 자가 넘도록 빼곡히 쓴 것도, 간단하게 두세 문장만 쓴 편지도 있었지만 모두 구겨버렸다.

  "마녀님. 물 갖다 드릴까요?"

  "응. 찬물로."

  클락이 가져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하윽…."

  브레인 프리즈. 머리가 띵하다.

  차가운 머리를 뒤로하고 다시 깃펜을 잡는다. 하지만 막상 펜을 쥐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검은 잉크가 종이 위로 툭툭 떨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은 먹 방울을 보니 영문 모를 울분이 마음속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뭔가, 억울한 느낌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조금 사나운 필기체로 글을 휘갈겼다. 간단한 안부와, 또 두 달 후에도 반응이 없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글귀를 남기고 편지 봉투를 접는다.

  "클락. 편지 다 썼어."

  "바로 보낼까요?"

  "응."

  클락은 팔찌에 마나를 불어넣더니 작은 균열을 생성했다. 그곳으로 편지 봉투를 집어넣는 걸 보니, 우체국 비스무리한 곳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무사히 편지를 전달한 클락은 새로운 물을 쟁반에 담아 가져다주었다. 마법사 치곤 무척 헌신적이었다.

  "루셸리니에 일이라도 생겼나요?"

  클락은 붉은 마녀가 고뇌하는 몇 안 되는 장면에 흥미를 드러냈다.

  2주 만에 48층을 올라간 괴물, 붉은 마녀.

  붉은 마녀의 평가는 만나는 이마다 말이 다르지만, 공통적으로는 '흐물흐물하다'라는 게 주된 의견이다. 욕심도, 열정도 없고 관계에 미련을 두지 않기에 얼핏 무뚝뚝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나 뭐라나.

  하지만. 내가 마녀라 불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가 아직 30층에 머물고 있을 때, 비정상적인 등반 속도를 인정하지 못한 마법사 두어 명이 나를 찾아왔을 때가 있었다. 40층에 머무는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마자 공격을 날렸다. 이유는 뻔했다. 질투심에서였다. 허나 마탑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건 일종의 연례행사와 같아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결과만 말하자면, 그들은 피떡이 되어 실려갔다. 나는 내게 개기는 놈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절대로.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클락으로선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루셸리니면 동부 아닌가요? 분명 발주 서류에 루셸리니는 없었을 텐데요."

  "개인적인 일이야."

  "마녀님의 '개인적인' 일이라니. 그것참 궁금하네요. 알려주실 수 있나요?"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들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건 실례 관계를 떠나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대답해주는 것이 낫다. 그들의 호기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에, 지금이 아니라면 내일이라도, 내일이 아니라면 몇 달 후라도 알고 싶어 한다.

  나는 피식 웃으며 클락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엉망이 돼버린 갈색 머리. 클락은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애 취급당하는 게 그리도 싫은 모양이다.

  "나중에 알려줄게."

  그런고로, 마법사를 상대할 땐 완곡한 거절보단 보류가 더 효과적이었다.

  클락의 얼굴이 붉어진다. 얘 나이가 열여섯이라 했나. 어딘가의 사생아라고 하는데 성을 숨기고 있다. 하여튼 이 나이에 34층이라니. 재능 하나는 죽여주는 놈이다.

  "…."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벌써 그 시간인가.'

  가슴 끝이 촉촉해졌다.

  자궁 위에 새긴 성흔으로 억제하고는 있지만, 주기적으로 성욕의 비대화나 모유가 흘러넘치는 등의 불상사가 생겼다. 한 주에 한 번꼴이라 일상생활에 딱히 지장이 있진 않은데… 조금 귀찮다고 해야 하나.

  "클락, 잠시만 기다려. 방에 들어오지 말고."

  "…왜요?"

  "곧 알게 될 거야."

  "언제요?"

  "아마 십 분 후 정도?"

  "좋아요! 기다릴게요!"

  유리병 세 개와 대야 하나를 들고 침실로 들어간다. 클락은 마녀가 또 이상한 짓을 하려는구나― 라는 얼굴로 얌전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

  클락을 뒤로하고 들어온 침실.

  나는 상의와 속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모유가 흐르는 가슴을 대야에 가져다 댔다. 본래 클락한테 부탁할까 싶었지만, 계속 둘이서 있을 것도 아닌데 그냥 혼자서 하기로 했다.

  "하읏…."

  우선 오른쪽 가슴부터.

  커다란 유방을 양손으로 짓누른다. 그러자 샛노란 우유가 호선을 그리며 뿜어져 나왔다. 모유로 차오르는 대야.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더 강하게 유두를 자극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 미약한 쾌감에 중독돼버릴 것 같았다.

  "흐긋…."

  자꾸 힘이 풀려 제대로 모유를 짜낼 수 없자, 이불보를 깨물고 억지로 힘을 더했다. 그렇게 점차 대야를 채워가는 샛노란 액체. 아직 오른 가슴만 짜냈을 뿐인데 상당량의 모유가 모였다. 나는 대야가 흘러넘치기 전, 가져온 병을 이용해 모유를 담아냈다.

  '이제… 왼 가슴….'

  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왼 가슴을 짓눌렀다.

  "하그읏…?!"

  그러자. 찍, 하고 터져 나오는 애액. 깨물고 있는 이불보마저 놓쳐버리며 음란한 신음을 내뱉었다.

  "마녀님. 괜찮으세요?"

  문 너머로 클락의 목소리가 들린다.

  "괘, 괜찮아. 아직, 들어오지 마."

  나는 속옷 사이로 흐르는 끈적한 액체를 닦아내며 말했다.

  들키기 전에 빨리 짜내야겠다.

  다행히, 클락이 문을 열기 전에 모유를 짜내는데 성공했다. 대야는 대충 화장실에 던져놓았다. 나는 모유를 담은 병을 허리춤에 매달며 방을 나섰다.

  "마, 마녀님? 대체 무슨 일이…"

  클락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홍당무처럼 붉은 얼굴, 후들거리는 다리. 옷 단추는 두어 개 풀려 가슴골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은 남심을 흔들어놓기 충분했다. 하지만, 클락의 관심은 내 음탕한 육체보단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새하얀 유리병으로 옮겨졌다,

  "방에 들어간 이유가 그것 때문…?"

  나름 열심히 추측해보았지만, 설마 모유를 짜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아직 어린 소년의 머리로는, 그것도 마탑에 처박혀 마법 연구만 하는 순수한 머리로는 추측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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