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193)

  "그래도."

  "응. 꼭 그거 때문은 아니야."

  페카폴리스는 턱을 괴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어느 모험가의 신상이 적혀있는 서류. 헌데 얼굴과 나이, 거주지 부분이 검게 칠해져 있었다. 마치 검열이라도 당한 모습이었다.

  "루셸리니의 대행자가 널 귀찮게 하면 죽여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거든. 그래서 쉽사리 뒤를 캘 수 없었지. 근데 그것도 미덥지 않은지 네 모험가 정보를 일정 기간 은폐해놨더라? 너 대행자랑 대체 무슨 관계야?"

  …슈리엘. 내가 너무 유명해지기 싫다고 한 말을 기억해준 걸까. 소소한 배려에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왜 소문이 났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요."

  "누군가 참지 못하고 네 신상을 캐낸 것이겠지. 다른 이유로는, 루셀리니의 배달부가 편지를 전달하면서 네 주소를 퍼트렸어."

  "매수됐군요."

  "해고됐데."

  "그건 그나마 듣기 좋은 소식이네요."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팔을 들었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팔찌. 등반자를 위한 팔찌였다. 페카폴리스는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는 다 얘기해줬는데, 왜 넌 카르드라실을 갔다 온 썰을 풀지 않느냐는 얼굴이었다.

  "미안해요. 그건 나중에 얘기해줄게요."

  지금은 편지가 우선이다.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아,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네?"

  "뒤에 저 하얀 머리 꼬마애는 누구야?"

  순간 호에엑?!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검지를 부드러이 놀려 위아래로 꺾었다. 자, 착한 아이야. 이리로 오려무나. 하지만 소피아의 발은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마냥 무거워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소피아도 아는 것이다.

  대행자를. 

  대행자의 명성은― 아니. 그들에겐 악명이겠지. 악마들도 대행자를 안다. 파르시히가 그랬고, 쌍둥이 악마가 그랬다. 그들은 강자를 원하니까. 자신의 뿔을 꺾을 숙적을 은연중 원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다. 대행자와 일 대 일로 겨루는 것은, 악마 사이에선 일종의 꿈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던전 마스터라고 다를 건 없었다.

  대신, 소피아가 다른 악마와 다른 점은…

  "으으…."

  겁쟁이.

  이거 하나뿐이었다.

  

  "쟤 상태 왜 저래?"

  "이번 몬스터 범람 사태 아시죠?"

  "미궁 탓이라며? 해결된 거 아니야?"

  "그때 미궁에 납치되고 머리를 다쳤거든요. 잠시 제가 보살피기로 했어요. 하필 부모님도 다 돌아가셔서…"

  "저런."

  겁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소피아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동차 엔진에 시동이 걸린 것처럼 떨어댔다. 대행자, 악마 사냥에 미친 자들. 내가 대행자와 관련돼 있다는 소리는 즉슨, 본인의 목이 언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소피아는 악마였으니까.

  나는 소피아에게 다가가, 소피아 말고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두 번 말 안 해."

  "…."

  "웃어."

  스마일.

  양손 검지를 이용해 소피아의 입꼬리를 억지로 올린다. 이제 소피아는 행복해졌다.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말이다. 나는 싸늘한 눈매 그대로 소피아의 웃음을 따라했다. 그래, 서로 웃고 있으니 보기 좋네.

  "클락, 내 방으로 가자."

  "아, 네!"

  "소피아도 같이."

  

  * * *

  머리에 난 뿔은 다행히 큰 소동 없이 넘어갔다. 성황청의 연구 끝에 아무런 해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덕이었다.

  '마나와 마기를 흡수하고 정화한다라… 세계수의 축소판이라 보면 되려나.'

  머리에 난 뿔은 상당히 오버스펙이었다. 무려 세계수가 쓰는 권능의 열화판인 것이다. 주위의 마기를 거의 소멸에 가깝게 정화하고, 마나를 흡수해 본인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축적된 마나는 체내 마나와 별개로 사용할 수 있었다. 헌데 그 양이 본인의 마나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힘이 두 배가 됐다.

  뿔은, 그 정도의 선물이었다. 

  "클락, 소피아랑 잠시 방에 들어가 있을래? 음, 한 십 분이면 돼."

  "알겠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물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이왕이면 찬물로."

  "네!"

  클락이 물을 뜨러 가자, 소피아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싸늘한 침묵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나와 단둘이 남는 게 무서워 다급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려 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피아."

  "네, 네…."

  "내가 널 명분 없이 죽이진 않을 거야. 대신 죽을만한 짓을 하면 죽어야겠지. 가령, 네가 '나쁜 아이'가 된다면 말이야.

  "히끅…"

  나는 손을 들어 소피아의 뺨을 어루 만졌다. 소피아는 허리를 바짝 세우고 초식동물처럼 바들거렸다. 질끈,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눈을 감는다. 극도의 긴장감.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순백색의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고 살포시 당긴다.

  "소피아, 너는 '착한 아이'지?"

  끄덕끄덕.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이 광경을, 혹여나 클락이 보기라도 할까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줬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땀으로 흥건해진 목덜미를 닦아준다. 땀을 닦아주기 위해 상체는 자연스레 앞으로 향했고, 얼굴과 얼굴이 맞닿아 서로의 시선이 가까워졌다.

  나는 입술을 소피아의 귓가에 가져다 대고 무감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근처에 있는 인간 한 명도 기쁘게 못 만드는데… 정말 '착한 아이'라고 할 수 있겠어…?"

  "히윽…."

  "대답."

  "아, 아니에요. 저, 전. 차,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할 거야."

  살고 싶으면.

  ―덜컹!

  

  "마녀님, 물 가져왔어요!"

  "고마워, 이제 들어가도 좋아."

  "네! 소피아, 들어가자! 마녀님이 집중하실 땐 방해하지 말아야 해!"

  선배가 후배를 교육하는 장면. 몹시 보기 좋았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찬물을 들이킨다. 머리가 시원해진다.

  "…."

  클락에게 붙잡혀 방 안으로 들어가는 소피아를 노려본다. 십 분만 기다리라 한 건 나이지만, 정말 십 분 만에 나오면 '벌'을 줄 생각이었다.

  나는 입술을 움직여 최후의 경고를 전달했다.

  클. 락. 한. 테. 말. 하. 면. 죽. 여. 버. 릴. 거. 야.

  "히익…"

  이 정도면 됐겠지.

  ―쿵.

  문이 닫힌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그럼… 편지를 읽어볼까….'

  ―찌이익!

  기대하고 기대하던 슈리엘의 편지. 심장은 한차레 진정시켰음에도 여전히 강하게 맥동했다.

  "어디 보자…."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유진에게

  혹시 이 편지지에 금박지가 걸쳐져있었나? 없다면 배달부가 매수당한 거다. 」

  없다. 배달부가 매수됐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아무튼, 처음부터 슈리엘다운 시작이었다. 나는 여전한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편지를 읽어갔다.

  서부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들었다느니, 옆 도시를 경유해 내가 만든 무기를 써봤다느니, 내가 마탑에 들어가 한 달도 안 되어 50층을 노리는 괴물 신입이라느니. 그는 내 근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도 무관심하지는 않았구나.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이제 슬슬 마지막 문단이었다.

  나는 아쉬움에 입가를 축 늘어트리며 글을 읽었다.

  "흐음…?"

  그런데, 예상외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 네 귀족위를 위해 추천장을 모으고 있다. 」

  '추천장…?'

  「 '심사'를 하려면 백작 이상 가문의 추천장이 다섯 장이 필요해. 내 형과 프루카이스, 앙그리드는 이미 설득한 상태다. 나머지 두 장이 문제인데… 유진, 브리도니아에 있다고 들었다. 영 미덥지 않은 놈이지만 그놈도 어찌 됐든 백작이지. 내가 나머지 하나를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넌 브리도니아 백작에게 추천장을 얻어라.

                  ―슈리엘 루셸리니. 」

  '추천장을 벌써 세 장이나 모았다고?'

  나는 백작위 이상의 '추천장'을 세 장이나 모았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대행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해도, 귀족들의 무거운 혀를 움직이기 만만치 않았을 텐데.

  새로운 파벌을 형성할 기회? 아니면 추천장을 핑계로 내게 목줄을 걸기 위해서? 생각나는 가능성은 많았다. 그래도, 어느 쪽이든 나쁘진 않았다. 안 그래도 파벌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악마 사냥꾼 가문에게 세 장이나 받다니.'

  아무것도 안 하고 세 장을 모았다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머리가 아프기도 했다.

  심사의 요소는 총 세 가지다.

  무력, 운영, 인덕.

  이 삼요소를 기본으로 심사를 하지만, 어느 귀족에게 추천장을 받았느냐에 따라 그 과정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무력― 일어나길 피와 칼로 일어선 귀족들의 추천장이 반수를 넘기면, '무력'의 시험은 자동으로 패스된다. 이미 셋이나 넘는 '전문가'에게 인정을 받았는데 뭣 하러 시험을 치르리? 재능 낭비며 시간 낭비였다.

  이런 경우 나머지 둘을 심사받게 된다.

  '운영'은 공행정과 사행정을 이르는, 말 그대로의 영지 운영 능력을 평가하고, '인덕'은 청문회를 열어 그간 저지른 잘잘못을 따진다.

  과거, 업적만 세우면 귀족위를 받는 세상은 지난 지 오래다. 기존의 파벌을 뚫고 새로운 귀족이 되려면 '완벽'해야 했다.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였지만 그게 귀족이고 세상이었다. 그들이 세운 벽은 지금도 단단해지고 있다.

  '…무력은 프리 패스. 청문회도 딱히 걱정은 없어. 딱히 악명 같은 게 있거나 하진 않으니까.'

  악마의 피로 가문을 일으킨 삼가문의 추천장. 그들의 인정이 있는데 누가 날 무력으로 무시하리.

  하지만 마지막 장애물이 남아있었다.

  '영지 운영.'

  행정… 이건 무엇도 아닌 '인재'가 필요했다.

  '흐음….'

  무력과 인성이 뛰어나도 영지를 운영할 사람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었다. 공행정이든 사행정이든 서류 작성할 사람이 있어야 도시 흉내를 낼 것 아닌가.

  귀족 승급을 막는 사실상의 진입장벽이었다. 귀족이 되고픈 사람 중 영지를 운영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어렵사리 인재를 모은다 해도, 사람들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자기 영지로 올 거란 보장도 없었다. 부랑민이 아닌 이상 사람들의 발을 움직이긴 쉽지 않았다.

  '…기대되네.'

  아마 시험은 영지 운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공식적으로 작위를 내리기 전, 어디 네 능력 좀 한번 보자는 식이다. 어차피 귀족위를 따면 영지를 하사받게 되니까.

  '다 죽어가는 땅 주고 살리라 할 게 뻔하지만…'

  보통 버려진 땅이나 운영을 포기한 땅을 이어받는다. 허나 상관없었다. 나는 어떤 땅을 받든 다른 놈 영지민을 쏙 빼먹을 자신이 있었다.

  땅 갈아엎고 건물 짓는 건 손가락 튕기기 한 번이면 간단하게 된다. 안 오곤 못 배기는 매력적인 도시를 만들어주마. 테마는 마법 도시가 좋겠다. 랜드마크로 부유 섬도 하나 지어주고, 치안은 골렘을 만들어 관리하면 된다. 인건비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

  '뭐… 다섯 장을 모으고 심사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상, 김칫국이었다.

  ―햐아앙?!

  ―미, 미안해…!

  그때,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소년소녀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한다. 대충 편지를 뜯고 8분 정도 지났다. 이대로 2분만 더 지나면 클락은 소피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

  문은 10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나가지 말아다오…!

  방 안에서 소녀의 애원이 희미하게 들린다. 나가지 말아 달라고,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제발 기쁘게 해줄 테니 기다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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