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덕끄덕.
소피아는 곧바로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그냥 옷자락만 내려 보여줘도 됐는데, 꽤나 적극적이다. 나는 소피아의 몸을 당기고 맨살을 어루만졌다.
"…이 정도면 문제없을 것 같고."
"이, 이건 무엇이냐, 어, 언니야…?"
"클레이드가의 상징."
소피아의 왼어깨는 방패 모양 흉터가 남아있었다. 책에서 본 모양 그대로 재현됐다. 조작한 티는 않을 것이다. 완벽했다. 그 어떤 인위적인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소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이제부터 소피아 클레이드야."
"히끅…."
"오십 년 전 멸문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가문을 일으킬 마지막 희망."
그럴싸한 스토리가 짜 맞춰지기 시작한다.
나는 머리를 쥐어 짜내며 중얼거렸다.
"소피아 클레이드는 자신이 자작가의 핏줄이란 사실을 숨기고 있었어. 계획이 있었거든. 제국의 별들이 모인다는 아스트라에 당당하게 입학해, 클레이드의 핏줄이 돌아왔노라 선언할 계획 말이야."
"누, 누구? 나 말이느냐?"
"열다섯 살이면 입학 최저 나이에도 딱 들어맞고… 부모님도 죽었다는 설정이니 문제없겠네."
"으헤에…? 아, 아스트라…?"
남들이 클레이드의 핏줄이라 인정하지 않아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찍어누르면 싫어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겐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은 역사를 장식할 무대였고, 악마와 몬스터는 그녀의 업적을 빛나게 할 도구일 뿐이었다.
물론, 나와 백작이 없다면 말이다.
아아, 소피아, 소피아. 클레이드의 마지막 희망이여. 온갖 역경을 헤치고 십 오 년을 달려왔건만, 끝은 한낱 식재료가 되어 식탁 위에 올려지는구나.
아아, 소피아, 소피아. 기구한 인생의 아이여. 자신이 고작 식탁 위에 오르기 위해 살아왔다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아아, 소피아, 소피아. 제국을 빛낼 찬란한 별이여. 너 밝힐 땅 한 줌 재로 물들어 어둠으로 회귀하는구나.
"소피아, 소피아…"
"언니, 야…? 무, 무섭다아… 그만해다오…"
"아, 음. 미안. 과몰입했네."
나는 울먹이는 소피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어땠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허한 눈으로 소피아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미친년처럼 말이다.
잠시 백작에게 이입하다보니 나까지 정신이 이상해졌다. 빌어먹을. 이딴 거에 공감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하루도 못 가서 이 지랄이다. 나는 뺨을 탁탁 때리고 소피아를 노려봤다.
소피아는. 아니, 소피아 클레이드는 내가 내뿜는 아우라에 잔뜩 위축돼 어깨를 오므렸다.
나는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여기부터가 제일 중요한데…"
"중요, 하다고…?"
그래.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
나는 조금 뜸을 들인 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한 번 죽어야 해."
소피아의 몸이 그대로 굳는다. 창백해지다 새하얘진 얼굴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더니, 푸르르 떨린 눈가에 조막만 한 눈망울이 매달렸다. 그녀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무릎을 꿇곤, 이마를 박아 머리를 조아렸다.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 사, 히끅. 사려. 살려. 주, 주…"
"그만. 진짜 죽으라는 소리는 아니야. 죽는 척을 해달라는 소리지."
"흐윽, 우, 으…?"
소피아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 말한다.
"널 원하는 사람이 있어."
"워, 원하는 사람… 그, 호, 혹시."
"성황청 쪽 사람은 아니야."
성황청이 아니란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마른 입술을 할짝댄 나는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너같이 어린 여자애를 잡아 고문하는 취향의 사람인데…"
"히, 히익…"
"내가 널 거기에 팔아 넘길 생각이거든."
소피아는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바들바들 떨어댔다. 너무 몰아세운 걸까. 이제 채찍질을 했으니 당근을 줄 때다. 나는 소피아의 옆으로 가, 확실한 '보상'을 제안했다.
"가서 몇 시간만 고문당하고 오면 돼. 뭐… 살이 찢어지고 내장이 드러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죽지 않는다고 보장해줄게. 온전한 육체 그대로 돌아올 수 있어. 정말이야."
"으, 으… 그, 그래도오…"
"잘 버티고 돌아오면."
소피아에게 한 발짝 떨어져, 선심 쓰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풀어줄게."
매력적인 제안.
"므, 뭐라, 고오…?"
"확실한 신분과 막대한 양의 돈, 그리고 너를 지켜줄 고용인까지 붙여줘서 떵떵거리며 살게 해줄게. 네가 꿈에 그리는 보금자리도 지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평생 먹을 수 있게 만들어줄게. 물론 성별도 다시 바꿔주고."
"나, 남자로…?"
"돈만 있으면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는 세상이야. 대악마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건 인간의 몸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쉽게 수락할 수 없는 제안.
"대신, 그때까지 내 명령에 절대복종하겠다고 맹세해. 착한 아이? 그딴 건 집어치워. 내가 자살하라고 하면 자살하고, 팔목을 그으라면 그어야 해."
"으으…."
"배를 가르고, 팔다리를 자르고, 내장이 쏟아져도 미소를 잃지 않고 끝까지 감사함을 연기하는 거야. 부디 나를 요리해줘서 고맙다고. 당신에게 요리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너는 그 희미한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행복 속에서 죽어야 해."
"주, 죽어버리며언…"
"걱정하지 마. 진짜로 죽는 건 아니니까. 내가 신의 이름을 걸고, 아니 마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소피아는 창백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렇게 수십 분을 고민했다. 자신의 일생일대의 분기점을 두고 열심히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내가 뭘 하면 되는 것이느냐…?"
망설임이 담긴 승낙이었다.
"…뭘 해야 하냐고?"
움찔. 소피아의 몸이 떨린다.
확신이 없었다.
나는 기가 찬 얼굴로 피식 웃었다. 내가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보였다.
이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죽기 직전의 상황을 반복해 정신을 마모하고, 죽음마저 기꺼이 수용하는 극한의 복종심을 새긴다고 선언했는데,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고? 제정신이면 나올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연성 수인을 맺어 날카로운 토검을 생성했다.
―꽈아악!!
그대로 다가가 멱살을 잡는다.
"케, 케흑?!"
고통스러워하는 소피아. 고작 이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도대체 무슨 용기로 고개를 끄덕인 걸까. 나는 소피아의 오른팔에 토검을 들이대며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네가 고개를 끄덕였으니, 난 망설임 없이 몸에 칼을 댈 거야."
"끄, 끄읍… 이, 이거 놔줘라아…"
"놔 달라고? 조만간 내장을 쏟으며 미소를 지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고작 이 정도로?"
염동력을 이용해 허공에 매단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소피아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발버둥 쳤다.
나는 토검을 들어 오른팔을 향해 내질렀다.
―콰드득!!!
"아아아아아악――!!!!"
"시끄럽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콰득, 콰직, 까드득. 뼈와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 소피아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오줌까지 지리며, 구멍이란 구멍에서 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그, 그마아. 졔성합니하. 사려, 살려. 아, 안그러헤여… 흐윽…"
눈물을 쏟으며 애원하는 소피아. 몸이 삐걱거릴 때마다, 팔을 관통한 토검이 더 깊숙이 파고든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눈물이라니. 내가 호구도 아니고 그만한 보상을 그냥 주겠는가.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수지가 맞지 않겠나?
"하아…."
―푸욱!
나는 차가운 숨을 내쉬곤 칼을 빼 들었다.
칼이 빠지자 염동력을 해제된다.
소피아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피를 흘리며 경련했다.
"끄윽… 끄흡…"
"소피아, 잘 들어. 이건 시작에 불과해. 앞으로 삼 일간, 네가 훌륭한 요리 재료가 될 수 있도록 밤낮 가리지 않고 고문을 가할 거야."
"제, 졔바, 그마한…"
"…듣고 있어?"
촤악!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최후통첩을 준비한다.
소피아 앞에 쭈그려 앉는다. 나는 겁에 질린 소피아의 머리채를 잡아들곤, 떨리는 눈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 오직 공포만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말할게. 고작 며칠 고문당하는 걸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래…"
"흐끅, 흐읍…"
"아니면 여기에 평생 틀어박혀 착한 아이라는 개 목줄을 차고 남은 생을 보낼래."
눈알을 후벼팔 기세로 사납게 일갈한다.
거부권은 없었다.
나는 왼팔에 칼을 들이대며 차갑게 웃었다.
"지루할까봐 걱정이라도 돼? 괜찮아.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 대신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까. 안전도 보장해줄게. 죽고 싶다고 말하기 전까진 무슨 짓을 해도 죽을 수 없어. 하지만, 남자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것만은 알아둬."
어느 쪽이든 불합리한 조건이었지만, 소피아로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둘 다 안 고르겠다 뻐긴다면, 분노한 내게 목이 잘릴 것이다.
그러니 선택해라.
"선택해."
고통을 견뎌내고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갈지. 아니면 개새끼가 되어 평생을 노예로 보낼지.
"3초 줄게."
고민할 시간조차 없다.
자비는 없었다.
"3초…"
목에 토검을 들이댄다. 피슉, 하고 터지는 핏줄기. 소피아는 덜덜 떨며 입을 우물쭈물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느 쪽이든 겁이 나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2초…"
죽음을 향한 초읽기. 겁에 질린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이렇게 고민하는 중에도 칼은 점점 가까워져, 비릿한 핏방울을 만들어냈다. 살갗이 점점 갈라진다. 곧 다가올 죽음을 만들어낼 균열이었다.
그렇게.
1초가 다가왔다.
"일――"
그때.
"하, 할게요오…"
목을 그어버리기 직전. 상당량의 피를 보고나서야 소피아의 입이 열렸다.
"뭘?"
"여, 여기서 보내는 거어…"
"평생을 여기에 틀어박히겠다고?"
"흐윽, 끄흡… 네헤, 흡, 흑…"
소피아는 겁쟁이였다.
검을 거둔다. 토검은 내가 손을 놓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구축을 사용했다. 엉망진창이 된 소피아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소피아는 구석에 기어가 머리를 감싸더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었다.
그 비참한 꼴을 보며 말한다.
"후회는 없어?"
"네, 네. 차, 착하게 살게요. 마, 말 잘 듣고오… 아, 안 대들, 게요."
"…."
과호흡. 착란 증세가 도진다. 소피아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병적일 정도로 떨어댔다. 끊어지는 단어 속에 이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기 싫어서, 살고 싶어서.
그래서 내뱉는 절규에 가까운 말이었다.
나는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성 없는 말은 옹알이와 같으니, 벽을 보고 하는 대화와 같았다. 대화란 무릇, 이성과 이성이 충돌할 때 나는 소음에서부터 기인한다. 그게 아니라면 단발적인 얘기로 그칠 뿐.
허나 이미 산산조각이 난 소피아의 이성은 주워 담을 부스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아…."
가끔. 아주 가끔. 소피아를 향한 동정심이 들 때가 있다. 나 따위가 뭐라고 소피아를 속죄하게 만들까. 내게 그럴 자격은 있는 걸까. 하지만 눈을 감고 몇 시간을 고민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법사의 이성과 인간의 이성이 일치하는 유일한 순간. 그것은 마치, 인간으로 살겠다는 허울뿐인 맹세에 동조해주는 기분이라서. 그게 너무 좋아서. 더 서슴없이 칼을 들게 된다.
"…."
…뭐하는 짓이람.
다시 돌아와서.
소피아가 만약 임신을 안 했더라도, 이 상태로 넘기면 정신이 붕괴할 게 분명했다. 고작 팔이 배인 걸로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가는데, 산채로 해부당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갔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해낸 계획이 이것이다.
내가 소피아가 되고, 소피아가 내가 되어 서로를 연기하는 것이다. 나를 연기하는 건 아프지 않으니 잘 해낼 것이다. 그리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