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193)

  * * *

  내장을 쏟고 나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 픽 끊기는 형체 없는 감각과 함께 체인 링크가 발동됐다. 마나의 사슬로 이어진 본체와의 통로. 이곳을 통해 의식이 옮겨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고작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곳에서 정신을 각성했다. 마탑, 클락과 함께 일을 하던 연구실. 보호술식을 걸어놓고 구석에 처던져놓은 진짜 나의 육체에 들어왔다.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몸을 비틀었다.

  멀쩡했다. 너무 멀쩡했다. 방금까지 전신을 지배했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정말, 정말이지. 너무했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미약?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쾌락과 비교하면 그따위 것은 쓰레기였다. 

  "하아, 흐."

  나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고민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할까?'

  이런 걸 느껴버리면,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안 하려고 했던 건데. 그런데. 알아버리면―

  "으극…."

  ―안돼. 

  나는 손톱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바닥을 긁어댔다. 이성을 챙겨야 했다. 이것에 저항하지 못하면, 여관에서 자해나 하던 그때처럼 비참하게 살아갈 게 분명했다. 그러기 싫었다. 겨우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는데. 다시 원점이라니.

  그냥, 잊어버리자. 잊는 거야. 없었던 일로 하고, 잊어버리는 거야. 쿵, 쿵. 벽에 머리를 박는다. 이마가 찢어지고 벽에 금이 갈 정도로 심하게 박았다. 한 번, 두 번. 약간의 뇌진탕 증세가 올 때까지 박아댔다.

  "마, 마녀, 님?"

  그때. 뒤에서 여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핏줄이 터져 잔뜩 충혈된 눈으로 뒤돌며 말했다.

  "클, 락?"

  "마녀님, 맞나요?"

  피가 굳어 마른 입술이 쩍, 하고 갈라진다. 클락은 내게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머리를 박는 광경은 두렵기 그지없었다.

  "아…."

  나는 그제야 내가 어떤 모습인지 깨닫곤, 겨우 자해하기를 멈추었다. 힘이 빠져 몸이 축 늘어진다.

  "…미안해."

  못 볼 꼴을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재구축을 사용했다. 엉망이 된 얼굴이 본래대로 돌아온다. 허나 산발이 된 머리는 그대로라 히스테릭을 부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일단! 일어나세요오…!"

  클락은 동정심이라도 느꼈는지 주저앉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클락을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곤 손을 잡아 일어섰다.

  "무, 물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그냥 이대로 쉴게. 너도 돌아가도 좋아."

  "어, 어…"

  "부탁할게."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해줘야겠다.

  "후으…."

  ―풀썩.

  나는 클락을 억지로 돌려보내곤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냥, 다 털어놓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기엔 숨긴 게 너무 많았다. 클락은 내가 중증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히려 사디스트라 생각하지 않으면 몰라. 그래서 다 까놓고 말하기가 좀 그랬다. 나한테 더럽혀졌다 해도, 아직 순수하잖아. 클락한테 목을 조르면서 칼침 좀 놓아달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했다.

  그러고 보니, 내 취향을 마음껏 털어놓을 사람이라곤 슈리엘 한 명밖에 없었다. 파멸적인 인간관계다. 슈리엘이 아니라면 끽해봤자 세르티인데, 그녀도 나를 썩 내켜 하진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사지가 잘린 멍멍이가 되었을 때부터였다. 

  하긴 나 따위를 좋아해 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성격도 안 좋고, 유일한 취미라곤 자해하기. 주변에 있으면 덩달아 우울해지는 음침한 여자. 가면을 쓰지 않고선 웃을 수도 없는 메마른 인간. 나는 이불보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곤 달팽이처럼 웅크렸다.

  한동안 이대로 있어야겠다. 소피아가 바로 오지는 않을 테니까. 대충 세 시간쯤이면 오겠지. 그녀가 오기 전까진, 나는 마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가 둘이 되어버리면 여러모로 설명하기 귀찮아진다.

  '슈리엘도… 노력하고 있겠지….'

  대리인 자격으로 추천장을 얻는 짓은, 당연하겠지만 무척 어렵다. 나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야 남의 추천장이다. 어려울 수밖에.

  "…."

  하여튼, 추천장을 따긴 했으니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추천장을 따고 난 뒤, 나는 정말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백작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아주 산더미처럼 쌓였기 때문이었다. 자율공격형 골렘 만들기, 지하수로의 반영구적인 정화시설 설치하기, 도시 내 모든 도로를 포장하기 등등.

  작업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마지막 작업이 내가 브리도니아에 돌아온 지 딱 두 달 됐을 때 끝났으니, 대충 한 주 좀 넘게 걸렸다. 작업이 어려워서 오래 걸린 건 아니었다.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들이었지만, 낮에 대놓고 엎어버리기엔 모험가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사람이 없을 때만 골라 작업하다 보니 너무 질질 끌렸다.

  "끄으읏…."

  그래도.

  이제 이 짓도 오늘로 모두 끝이다. 나는 혹사당해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하여튼, 이제 서부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슈리엘이 나머지 한 장의 추천장을 따냈다면, 이제 수도로 올라가 심사를 받기만 하면 된다. 아마 변두리 영지를 다스리게 할 것 같은데… 어딜 배정받을지 벌써 기대됐다. 그래도. 사람이 살고는 있는 땅을 줬으면 좋겠다.

  ―철퍽, 철퍽…

  나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추잡한 물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햐아으, 햐아앙…?!"

  "이제, 안에 싼다앗…!"

  눈을 돌리자 정액으로 배가 빵빵해진 소피아가 보였다. 후배위로 신나게 박히고 있는 그녀는 암캐 같은 표정을 지으며 침을 질질 흘려댔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라 저 사이에 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피아와 클락은, 내가 일하는 내내 섹스를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든 말든 몸을 섞고 타액을 교환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햐아앙…"

  음탕한 얼굴로 가버리며 조수를 내뿜는다. 자존심을 버리고 복종 섹스에 익숙해진 소피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게걸스럽게 자지를 탐했다. 자지가 가장 깊숙한 곳에 닿기 쉽게 엉덩이를 치켜들고 고양이처럼 허리를 편다.

  "끅…!"

  ―부르릇…!

  "히극, 히기이잇…"

  정액이 들어오며 배를 부풀린다. 이미 한 아이를 품은 자궁에 새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한다.

  "헤힛, 히으…"

  소피아는 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헤헤 웃으며 엉덩이를 살랑였다. 아직 더 할 수 있다고, 더 담을 수 있다고.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이유를 알기 위해선, 짧은 과거로 가야만 했다.

  오늘로부터 삼 일 전, 소피아는 남자로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 '아니오'라고 즉답했다. 심지어 스스로 개목줄을 차고, 클락에게 치부를 보이며 배를 뒤집어 깠다.  노예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나쁘게 말하면 육변기고, 좋게 말하면 애완동물이었다.

  그녀가 쾌락에 완전히 솔직해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악마는 한 번 깨달은 '욕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섹스 쪽으로 발현된 게 아닐까 싶다. 그야 다섯 배다. 클리토리스에 자지를 살짝 비비기만 해도 허리를 튕기며 가버리는 수준의 감도. 소피아는 쾌락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소피아는 열락에 녹아버린 얼굴로 신음했다.

  "죠하아… 더, 더허해쥬세여……"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일까.

  소피아가 섹스에 집착하고 나니 클락의 허리가 쉬는 날이 없었다.

  오나홀을 쓰는 것처럼 마구 흔들고 바닥에 버려두면, 개처럼 슬금슬금 기어 오더니 엎드려 보지를 벌린다. 아직은 정력이 받쳐주는 듯했지만, 온종일 그럴 수도 없는 노릇. 클락도 과하게 적극적인 소피아가 부담스러워 보였다.

  나는 간단한 짐을 싸며 클락에게 말했다.

  "클락. 나 없어도 소피아 관리 잘 할 수 있지?"

  밥 제때 주기, 마탑에서 나가지 못하게 목줄 단단히 채우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소피아가 아닌 세레나라고 부르기. 또, 섹스하고 뒷정리 바로 하기.

  소피아는 나의 대체재였고, 평범한 섹스론 만족하지 못하는 클락을 위한 선물이었다. 동부로 돌아가는 길에 클락을 데려갈 수는 없었으니까.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작위를 받으면 마탑에 틀어박혀 활동할 수 없었다.

  ―….

  대답이 들리지 않아 눈동자만 살짝 돌려 봤더니, 서로 꼭 껴안은 채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내 말은 들었으려나. 뭐, 상관없다. 그냥 애도 아니고 마법사인데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고, 저렇게 좋아하는데 관리를 소홀히 할 것 같진 않았다. 소피아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 탈출할 것 같지도 않았고.

  참고로 소피아의 모습은 부분부분 바꿔뒀다. 마탑 밖으로 나갈 일은 아마 평생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피아 클레이드'는 요리된 직후 바로 버려져 가축 사료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는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일단, 임신한지라 몸은 못 건들고 머리카락 색과 눈매만 바꿨다. 머리는 찰랑이는 베이직색으로, 눈꼬리는 전보다 내려 순한 인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붉은 목줄까지 차니 정말 강아지 같았다. 

  "츄하아…."

  "후아…"

  찐득하고 농밀한 키스가 끝난 후. 클락은 깊숙이 처박은 자지를 빼냈다. 쯔브븝, 하고 울리는 천박한 물소리. 이 과정에서 또 한 번 가버린다. 한차례 물을 뿜은 소피아는 클락 앞에 알몸으로 엎드려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저, 졍액… 안헤, 쌰주셔서 가, 감샤합니다하아…"

  그러고는 곧바로 정액과 애액으로 더러워진 자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휴읍…"

  자지를 목구멍 안쪽까지 집어넣곤 위아래로 흔든다. 구역질은 없었다. 심지어 스스로 움직이며 숨까지 쉬었다. 클락은 소피아의 머리채를 쥐곤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소피아는 한계 이상까지 들어온 자지에 고통스러워하며 발버둥 쳤다. 희미하게 나는 오줌 냄새. 그녀는 오줌을 지리며 발작했다.

  나는 추천장과 돈이 든 주머니를 허리춤에 매달곤 클락에게 말했다.

  "그거 더 밀어 넣으면 죽어. 조심해."

  "하아, 흐. 이제 가시는 건가요?"

  "응. 오늘 저녁에 바로 떠날 거야."

  "못 도와줘서, 죄송, 해요. 흐으."

  "소피아 붙들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내가 더 미안하지. 돈 부족하면 나한테 편지 보내. 얼마든지 줄 테니까. 돈 나가는 게 아까우면 죽이거나 버려도 되긴 한데,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제, 제가 그럴 리. 없잔, 아요!"

  배가 부르고 나서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을까. 임신했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고, 또 책임지겠다고 말은 하지만, 배가 산처럼 부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애를 지워버릴 수도 있었고.

  웬만하면 낳아줬으면 좋겠는데… 클락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저 나이에 애를 키우라 할 수도 없고. 아니면, 소피아에게 모든 육아 부담을 지게하고 자식마저 노예로 만들어버릴까. 이건 너무 잔혹하려나. 하지만, 인간과 악마의 혼혈아는 즉결처형 대상이라 노예가 되는 게 더 나은 처사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옆에서 정액이 분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르릇…!

  "으후읍…!!"

  목구멍 아래로 곧바로 내려가는 정액. 나는 클락의 압도적인 정력에 쓴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모유가 영향을 준 건 정력뿐만이 아니었다. 몸의 성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당장 키만 봐도 4cm 정도 큰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 과하게 어려 보였던 클락은, 이제 어엿한 '소년'이라 부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한 달이면… 에일린도 볼 수 있겠지.'

  나는 아직도 평평한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배가 부르긴커녕 좀 더 들어갔다. 세계수를 만난 후부터였다. 내 뱃속에 에일린이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체감됐다. 심증이긴 하지만 거의 확정이다. 무척 부끄럽지만, 세계수와 딸의 배려 같았다. 내가 몸을 미친 듯이 굴리니 아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버린 것이다.

  "…."

  죄책감이 목을 죄어온다. 하지만, 이렇게 미안해하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또 좋다고 몸을 굴릴 게 분명했다. 에일린이 날 보면 뭐라고 말할까. 날 이해하는 것과 좋아해 주는 건 별개였다. 딸이 경멸의 눈빛이라도 보내면 진짜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슈리엘 만나기도 겁이 났다. 속으로 미친 정신병자 년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음, 맞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쩌면, 내 압도적인 힘을 이용하기 위해 억지로 맞춰주는 것일 수도 있다. 거기에 애도 가졌으니 날 붙들 명목도 있다. 추천장을 모아준 것도, 모두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계획일 수도 있다.

  아니야. 아니겠지. 난 쓰레기다. 날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이딴 생각이나 하다니.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부터 해야지. 선물이라도 가져갈까. 슈리엘은, 음. 그래. 칼을 선물해주면 좋아할까. 아니, 칼은 카라반이 있으니 필요 없다. 그러면, 그러면. 으. 뭘 좋아하지? 그냥 몸만 갈까? 그럼 너무 속 좁아 보이려나.

  "하아…."

  부정하고 싶었지만, 지금 느낀 감정은 틀림없이 두려움이었다. 

  무서웠다. 내 가면 안의 모습을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웠다. 용이 앞에 날아와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것 같은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광인은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난 되고 싶어서 광인이 된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슈리엘이 내 추악한 본모습을 알면서도 달려들 때 약간의 기쁨을 느꼈고, 에일린이 내게 괜찮다고 말했을 때 눈물을 흘렸다. 정말 모순적이게도― 이런 짓들을 하면서도 남에게 이해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아직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 모르겠다. 솔직히 그냥 미친년이잖아. 이런 걸 이해해줄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짐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가겠다고 말한 시간보다 한 시간 빨랐지만, 그냥 지금 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클락. 이제 떠날게. 시간 나면 만나러 올 거니 서운해하진 말고."

  "벌써요? 으, 아, 아직. 뒷정리도 안 했는데, 그게 아니라! 죄송해요! 빨리 처리할게요. 소, 소피아! 정신 차려…!"

  "괜찮아. 인사는 이미 나눴잖아."

  팔찌에 마나를 불어넣어 포탈을 연다.

  * * *

  루셸리니로 가는 마차는 페카폴리스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다. 오직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특수 개량된 마차. 지구식으로 비유하자면 스포츠카였다. 말들도 전용 갑주와 강화 발굽을 사용해 몬스터 따위는 들이박고 전진할 수 있었다.

  "좋은 마차 준비해줘서 고마워요."

  "뭘. 수도에서 소피아 만나면 안부라도 전해줘."

  "하하…."

  소피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페카폴리스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저 미소를 보기가 무서워 재빨리 마차에 탑승했다.

  "작위 따면 편지 보내줘!"

  페카폴리스는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하여간 성격 참 털털한 여자다. 적색마탑과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나는 마부에게 은화를 쥐여주며 말했다.

  "출발할게요. 루셸리니령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허어. 일단 주니 받겠다만, 그리 기대는 하지 마쇼. 못해도 이틀은 걸릴 걸세."

  "충분해요."

  보통 나흘에서 닷새 정도 걸리는 거리를 이틀로 단축했으니 만족한다. 역시 비싼 마차를 탄 보람이 있다.

  "요놈들아, 가자!"

  마부가 말들의 엉덩이를 때리자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마탑을 보며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두 달 만이네.'

  쌀쌀했다. 몇 달 후면 입동立冬을 맞이하는 가을의 절정기. 나는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등을 기댔다. 클락도 없어지니 무척 허전했다. 이제는 혼자가 더 어색했다. 누군가와 붙어있지 않으면, 저 흩날리는 낙엽들처럼 이리저리 휩쓸려버린다.

  달라졌다. 나는 달라졌다. 내가 중증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진 것처럼. 소피아가 욕망에 솔직해져 자진해서 노예가 되기를 자초한 것처럼.

  나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내 옆에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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