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9/193)

  * * *

  나는 상복常服인지 상복喪服인지 모를 시커먼 드레스를 선택했다. 빅토리아와 로코코 양식을 적절히 혼합한 오프숄더 드레스. 치마폭을 부풀리기 위한 파니에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둘 다 주문했다.

  보통 주문 제작을 해야 하는데, 운 좋게 치수에 맞는 드레스가 있다고 했다. 나처럼 키 작은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가게라서 그렇다나 뭐라나.

  직접 입어본 바로는,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이 더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눈동자가 썩어 냉랭한 분위기를 내뿜는데, 드레스까지 검으니 내가 봐도 그럴싸한 포스를 뿜었다. 서브컬쳐계의 악역 영애 느낌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흰색이나 핑크색처럼 발랄한 계열은 나한테 안 맞았다. 차라리 이런 이미지를 끝까지 밀고 가는 게 나아 보였다.

  '피가 묻어도 별로 티 나지도 않고.'

  슈리엘은.

  나와 함께 다니는 내내 뭐 하나 사주지 못한 것을 상당히 아쉬워했다. 뭘 해주기도 전에 발정하다 보니 기회가 없었다. 부끄럽게도, 사실이었다. 가버리고 실신하고를 반복하면 어느새 저택에 도착해있었다.

  그래서 강압적으로라도 뭘 사주려 했단다. 내가 거부감을 표해도 옷 가게로 직행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나는 옷이 담긴 가방을 꽉 껴안으며 총총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슈리엘은 생각보다 적은 지출에 아쉬워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안 나갔군. 몇 벌을 샀다고 했지?"

  "사교용이랑 평상복, 이렇게 두 벌이랑, 그리고…"

  "그리고?"

  "…그, 그건 나중에 말해드릴게요."

  슈리엘은 가방을 들어주겠다 해도 필사적으로 거절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싫다는데 억지로 빼앗아 들 인간은 아니었다. 유진이라면 이유가 있겠지. 그는 날 배려해줬다.

  아, 젠장.

  주인장 말에 혹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C 스트링이나 티백 같은 속옷은 솔직히 너무 창녀같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나홀과 창녀로 급을 나누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오나홀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 있어야 했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순종적인 암컷의 모습 말이다.

  나는 프릴 장식이 잔뜩 달린 속옷 세트를 하나 샀다. 웨딩드레스를 떠올리게 할 만큼 새하얀 순백색의 속옷은, 중요 부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치마를 들치면 바로 박힐 수 있게 보지를 훤히 드러냈고, 어깨끈을 내리면 바로 젖가슴을 빨 수 있게 유두를 노출한다. 의도가 뻔했지만 그래서 더 파괴력이 강한 속옷이었다. 

  '…절대로 말 못 해.'

  하지만.

  보여주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머리와 달리, 이 음란한 몸뚱이는 착용 후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젖어버렸다.

  "…저택 가면 보여줄게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이내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헤실거렸다.

  "헤, 헤…"

  나는.

  내성이 없었다.

  하루하루를 자기혐오로 살아가던 내게 이런 감정은 목마른 자의 우물처럼 다가왔다. 선물. 선물이다. 오로지 날 위한 선물.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문득 너무 헤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선물 하나 받았다고 뛸 듯이 기뻐하는 여자가 어딨냔 말이다. 고작 다정한 말 몇 마디 건넸다고 심장이고 뭐고 다 내줄 여자가 어딨냔 말이다. 아무리 노예 각인이 새겨졌다 해도 정도라는 게 있었다. 그래도… 그에게만은 헤퍼도 될 것 같았다. 이것만큼은 노예가 아닌 나의 진심이었다. 몇 번을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아이고, 이게 누구야?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아, 젠장…."

  슈리엘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아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나는 대체 무슨 상황이 일어난 건지 몰라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라엘. 목소리를 낮춰야 합니다. 이곳은 우리의 영지가 아닙니다."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헷갈리는 나른한 얼굴. 철제 경갑 위에 수녀복을 걸친, 실로 이단심문적인 복장을 한 갈색 여인과.

  "…편지 보내도 씹은 건 저놈이잖아. 그런데, 뭐 하나 했더니 여자 끼고 놀고 있네? 아이고, 아이고. 신께서 어찌 저런 놈을 대행자로 만들었을까."

  잿빛 머리의 젊은 사내 한 명이 있었다. 오른쪽 귀엔 정십자 모양 귀걸이를, 얼굴엔 은제 사각 안경을 낀 그는 모범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특유의 거친 아우라를 지울 수 없었다.

  "…프루카이스."

  나는. 

  슈리엘의 중얼거림을 듣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라엘… 분명 남부로 파견갔다고 하지 않았나?"

  "이틀 전에 종료하고 복귀했어. 그것도 몰랐냐? 편지까지 보냈는데, 섭섭하게 말이야."

  "…."

  "…진짜냐?"

  라엘 프루카이스, 파윈 앙그리드.

  내게 추천장을 써준 두 명의 대행자들이 슈리엘을 찾아왔다.

  두 대행자는 침착하게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슈리엘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눈앞의 잿빛 남자의 말대로 나랑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품에 안긴 옷 다발에 힘이 들어간다. 슈리엘은 편지 온 것도 모르고 나랑 어울려주고 있었다. 괜히 양심이 찔린다. 설마 나 때문에 영지 업무를 소홀히 한 건 아니겠지.

  "기껏 추천장 써서 보내줬는데, 이러면 나도 섭섭해. 응?"

  라엘, 프루카이스의 대행자는 흑막 같은 미소를 지으며 깐죽댔다.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만 아니더라도 그저 장난기 있는 남자라 생각했을 텐데. 신실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불경해 보였다. 

  "…라엘. 적색마탑의 붉은마녀입니다. 예의를 보여야 합니다. 당장의 기분에 휘둘려 격분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곳은 루셸리니의 땅입니다."

  옆에서 묵묵히 방관하고 있던 앙그리드의 대행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주의했다. 날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귀족된 자가 평민에게 예의를 보였으니 나도 그에 맞는 예의를 표해야 했다.

  "앙그리드와 프루카이스의 대행자를 뵙습니다. 만나서 영광이에요. 전 적색마탑의 마법사, 유진이에요. 붉은마녀라 부르셔도 돼요."

  "…반갑습니다. 과연, 당신의 반려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 이유가 있습니다.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하하…."

  나는 파윈의 칭찬에 부끄러운 척을 하며 멋쩍게 웃었다.

  '붉은마녀'라는 별호는 부끄럽지 그지없었지만―― 명성과 힘을 알리기엔 이만 한 게 없었다. 나는 앞으로도, 유진이라는 이름보다는 붉은마녀라 불릴 것이다.

  

  "붉은마녀…? 저기 옆에 있는 꼬마애가…?"

  하지만 라엘은 내가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야 키도 땅딸막하고, 손에는 방금 구매한 옷들이 담긴 쇼핑백이 쥐여져 있다. 누가 봐도 데이트 중인 소녀였다. 쌍둥이 악마를 단숨에 처잡았다느니, 냉혹한 성격이 마녀와 같다느니 하는 소문과 비교해보면 믿지 못할 만도 했다.

  나는 부푼 배를 쇼핑백으로 가리며 수줍게 인사했다. 파윈도, 라엘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라엘 님도, 만나서 반가워요."

  "…엘프인가?"

  "인간이랍니다. 아직은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남자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나는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게 느껴져, 시선을 피해 슈리엘 뒤로 자리를 옮겼다. 노예가 돼서 그런가 아무렇지도 않던 이성의 시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짝 있는 여인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실례입니다."

  타이밍 좋게, 파윈의 태클이 들어왔다. 라엘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헛숨을 삼켰다. 슈리엘의 눈총이 따갑다. 그는 내게 멀어지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 흑심이라도 품었냐? 저렇게 키 작은 여자는 내 취향 아니야."

  나도 너 같은 남자랑 어울릴 생각 없다. 나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라엘을 응시했다.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그 안엔 음산한 분노가 깔려있었다. 감히 누굴 보고 땅꼬마라 말하는 거냐. 추천장을 써줬으니 차마 전부 드러내진 못하고 미약하게 퍼트린다. 

  "뭐, 뭐야?"

  라엘은 갑작스레 돋는 닭살에 당황하며 나를 보았다.

  "하아…."

  슈리엘은.

  느닷없이 찾아오더니 콩트나 찍고 있는 우리를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편지 못 읽은 건 미안하지만… 보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빠르게 용건부터 말해줄 수 있나? 약속이라면 오늘 내로 잡도록 하겠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슈리엘은 당당했다. 그는 날 세워두고 어딜 갈 생각이 없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라엘은 이를 꽉 깨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편지를 보냈는데 씹어버리고, 기껏 와봤더니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다. 그는 화가 났다.

  "추천장도 써줬는데 너무 야박하게 구는 거 아니야? 나 없이 그놈들 잡을 수는 있고?"

  

  루셸리니가 대행자가 될 수 있던 건 오로지 피를 통해 내려온 압도적인 무력 덕분이었다. 부수고, 꺾고, 쳐낸 뒤 무너뜨린다. 신성력이든 마나든 뭐든 공평하게. 항거할 수 없는 물리력으로 상대를 짓누른다. 루셸리니의 토벌 방식은 사냥이 아니라 파괴에 가까웠다. 

  허나 한가지 쪽으로만 파고들면 한계를 맞이하는 법. 당장 내 경우만 봐도 쌍둥이 악마에게 마법을 봉인 당해 곤욕을 치뤘다. 슈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검기는 무한대로 뽑을 수 있지만, 간단한 클린 마법조차 쓰지 못한다. 한 달 뒤 악마 토벌 계획에 파윈을 데려가는 이유도, 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도망칠 수 있는 플뤼톤의 발을 묶기 위해서다.

  루셸리니가 물리력에서, 앙그리드가 성역에서 막강한 힘을 낼 수 있다면, 프루카이스는 신성력 그 자체로 적들을 압도한다. 신관을 방불케 하는 막대한 양의 신성력. 프루카이스의 일족은 타고난 신성력으로 악마들을 징벌하고 정화한다.

  라엘 프루카이스가 슈리엘의 계획에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정확히 잘 모른다. 듣기도 전에 얼굴을 부비며 암캐처럼 달라붙어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신성력이 필요한 것이라면 세르티를 불러도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이름 모를 네 명의 신관을 부르면 되지 않는가. 아니면 그걸로도, 나로도 불가능한 프루카이스만의 일이 있다는 걸까.

  부르르.

  라엘의 귀에 걸린 정십자 모양 귀걸이가 떨린다. 신성력으로 떨리고 있었다.

  "…일단 진정해라."

  슈리엘은 한숨을 쉬며 라엘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 말의 간절함과 달리,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날뛰든 말든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대행자 가문 중 대인전 최강이라 평가받는 루셸리니였다. 거기에 뿔까지 달려 두 배나 강해졌으니, 얼마나 셀지 감도 안 온다.

  라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슈리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비굴하게 말하면 약했고, 굳이 정정하자면 분야가 달랐다. 나는 저놈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서로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둘의 신경전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파윈은… 몸에 새긴 수백 개의 성흔으로 싸운다고 들은 바가 있다.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새긴 끔찍한 문신. 옷으로 꽁꽁 싸매 티가 나지 않을 뿐이다. 눈을 반쯤 감고 있는 것도 성흔 탓이라 했다.

  그러면 프루카이스는.

  프루카이스의 대행자는 어떻게 싸울까.

  하지만.

  내 소악마적 욕구는 해소되지 못했다.

  "…라엘. 시간은 많습니다. 저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슈리엘의 계획은, 아주 긴 공백을 두고 나아가야 합니다. 고작 셋이서, 아니 넷이서 다섯 신관과 황실 병력을 움직이려 하는 게 쉽지 않음을 압니다."

  "아니, 난 그냥 이놈이…"

  "그리고 저는 슈리엘을 압니다. 겉은 오만방자하고 싹수없어 보일 수 있으나 속은 늘 철두철미한 사내입니다."

  "그게 아니라…"

  "슈리엘이 붉은마녀와 시간을 보낸 게 못마땅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또한 계획 일부라 생각하겠습니다. 그가 정말로 헛되이 시간을 보낸 게 아니라면 신께서 그를 보살펴주실 겁니다."

  "…."

  파윈 앙그리드.

  그녀가 둘을 중재했다.

  "쯧…."

  "뭘 잘했다고 혀를 차?"

  "들렸나? 사과하지."

  "미친놈."

  둘은 찌릿 노려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쿡쿡, 하고 웃었다. 서로  자존심을 세우다, 중재자가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전형적인 남자들이라서, 지극히 인간다워서, 그래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파윈은 웃음보를 터트린 나늘 보며 슬며시 미소지었다.

  "잘 하셨습니다. 모두 빛 아래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저렇게 나오는데 주먹다짐을 할 리 없지. 나는 파윈의 중재력에 감탄했다. 발음이 또박또박하고 말투도 사근사근한 게 딱 사회자 타입이었다.

  "그래. 부디 빛 아래에 평안해라."

  라엘은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며 과장된 몸짓을 취했다. ―둘이서 그 잘난 '계획' 잘 실행하고 있으라고. 속에 악의는 없어 화가 나진 않았다. 내가 슈리엘 시간을 잡아먹은 건 사실이니까. 그는 그렇게 한참을 비아냥거린 후, 나와 슈리엘을 쓱 노려보곤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저희는 근처 식당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후에 저희를 만날 준비가 다 되었다면, 2번 지구 신전으로 오면 됩니다."

  "하아… 미안하군.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가겠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하이라크에겐… 제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걱정 마라. 비밀로 할 테니."

  그리 말하고 파윈마저 등을 돌린다. 백작저에 머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들일 생각도 없어 보였고.

  "…불쌍한 여자야."

  슈리엘은 파윈을 유독 달갑게 대했다. 파윈은 원래 하이라크의 약혼자였다. 대행자가 되면서 약혼이 깨지긴 했지만… 그의 형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약혼 파기는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앙그리드의 가주가 동의도 없이 멋대로 진행한 일이었다.

  슈리엘은 다시 발을 옮기며 말했다.

  "우리도 빨리 들어가지. 유진, 계속할 건가?"

  슈리엘은 내게 '더 할 거냐고' 물었다. 돌아가면 또 짐승처럼 박힐 거냐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대행자들이 찾아왔는데 눈치 없게 계속 물고 빨 수는 없었다.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이 정도면 나름 충분했다.

  허나 이대로 만나긴 조금 부끄러웠다. 튀어나온 배를 들키지 않아서 망정이지, 들켰으면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프루카이스는 분명 비아냥댈 거고, 파윈은, 음. 셰멜처럼 축복이라도 해주려나. 뭐가 됐든 부끄러워서 얼굴 못 든다.

  나는 슈리엘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하아… 들킬 뻔했잖아요."

  "음? 뭘?"

  "이거, 정액으로 튀어나온 배요. 옷 가방으로 가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그, 그리고 이렇게 오래 있으면 임신해버린다구요."

  "인제 와서? 언제든지 임신하겠다 하지 않았나?"

  "어, 어…"

  …그, 그러면. 그냥 둬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를 낳는다 해서 문제 될 게 있나? 돈도, 능력도 있다. 수십 명을 낳든 수백 명을 낳든 책임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노예였다. 주인님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응당 기쁘게 임신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에일린이 세계수에게 넘어간 지금, 내 뱃속은 텅 빈 상태였다. 그러니 임신도 문제없지 않을까. 이번엔, 정말 뱃속에서부터 키우는 거다. 에일린도 동생이 생기면 좋아할 거다. 그래. 어차피 자살할지도 모르는데 말동무할 가족 정도는 있어야겠지.

  나는 슈리엘의 옷자락을 붙들고 쭈뼛거렸다.

  "그, 그럼. 가는 길에 배란제 있으면, 하, 하나만 살까요…?"

  나는 어딘가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깔았다.

  "하…."

  슈리엘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농담이다."

  "아…."

  힘이 빠진다.

  …진짜 괜찮은데. 나는 아쉬운 얼굴로 다시 옷자락을 당겼다. 슈리엘이 뒤를 돈다. 이번엔 또 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또 뭐지?"

  "이 상태론 드레스 입기 불편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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