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0 / 0198 ----------------------------------------------
츠부미
눈에 띄게 비쩍 마른 츠부미는 들어온 이후로 내내 이불에 쌓여 덜덜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이 비를 잔뜩 맞은 강아지 같아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붙히지 못하고, 서우마저도 뭐라 말하지 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츠부미의 배에서 심한 소리가 들려왔다.
"츠부미 배고파?"
"예?.... 예....... 배, 배고파요."
"자, 잠깐만 기다려! 가요, 모모 씨!"
"네!"
피골이 상접해 있는 츠부미를 안쓰럽게 보던 모모와 나나는 재빨리 식사를 차려주었다. 서우의 기억속, 나고야에서 함께 식사할 무렵의 츠부미는 밥을 굉장히 느리게 먹고, 그리고 무척이나 입이 짧은 아이였는데....
"츠부미 체 할라, 천천히 먹어."
"죄, 죄송합....."
"아니, 죄송할 건 없구...... 좀 더 가져다 줄게."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정신없이 밥을 입에 집어 넣고 있는 츠부미는 더 작고 가녀려진 체구 때문인지 안쓰럽기 그지 없었다. 그새 못해도 10kg 이상은 빠졌을 것 같은 모습.... 서우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츠부미에게서 진한 소독약 냄새와 정체 모를 불쾌한 약 냄새가 섞인 체취가 풍겼다.
'대체 어린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얼핏 식사 중인 츠부미의 손목을 보니 주사 바늘 자국, 혹은 시퍼렇고 노란 멍이 한가득이었다. 생각해 보니, 츠부미의 옆에는 정체 모를 링거 같은 것이 잔뜩 놓여 있었고 츠부미 옆의 테이블 위에도 주사 바늘이 여러 개 있었던 것 같다.
그것 떄문에 손이 퉁퉁 부어 올랐는지 다른 곳은 다 삐쩍 말랐는데도 양손만이 이상할 정도로 통통했다. 츠부미는 그런 손으로도 열심히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 물도 제대로 마시지 않았다. 왠지 며칠은 굶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서우는 이런 순간에마저 에리가 더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다.
'여기 있으면 더 심란해지기만 하겠군.'
길게 한숨을 쉰 서우는 츠부미에게서 눈을 돌리고는 위를 수리하려 가겠다며 올라갔다.
그렇게 서우가 위로 올라간지 10분, 이제 츠부미는 두 그릇 째를 비우고 있었고 유리는 잠시 그런 츠부미를 가운데에 두고 안절부절 못하는 나나와 모모를 보다가, 위에 가서 뒤 늦게 창문을 수리해주고 있는 서우를 찾으러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음, 내가 가서 지금 물어봐도 되나? 분위기 되게 이상해 보였는데... 아 어쩌지, 어쩌지.'
유리는 저도 모르게 계단 앞에서 망설이게 되었는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아 몰라, 내 집이야.'
그 녀석도 거침없이 자기 집을 발로 차고 들어왔겠다, 이쪽이 망설일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유리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들어오면서 창문을 깨끗하게 조각낸 덕에, 서우는 창문에 새 유리를 끼워주고, 부순 부분을 다시 고치고 있었다. 자취 경력으로 알차게 다져진 손맛은 순식간에 창문을 원래대로 복구하고 있었다. 되려 전보다도 튼튼해진 모양새여서 유리는 속으로 감탄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츠부미는 좀 어때요?"
"응? 내가 온 거 알고 있었어?"
유리는 조금 놀랐다. 자기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올라온 것도 있고, 서우가 시끄럽게 땅땅, 부숴진 창 근처를 수리하고 있었기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단 밟을 때부터 들었어요, 처음에 올라올까 말까 망설였잖아요. 아, 다 됐다. 꽤 됐어요, 감각도 예민해지고 신체 능력도 많이 향상 됐다고 할까."
창을 마저 다 끼우고 나서야 서우는 몸을 돌리고 유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유리는 잠시 그런 서우를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사뭇 진지한 유리의 표정.. 서우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호오, 그럼 이제....."
"예?"
"몸으로 갚는 걸 기대하도록 하지."
서우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 참. 저는 충분히 만족시켜드린줄 알았는데요."
"몰라, 간만에 와서 다 까 먹었어, 뭘 하고 지냈던 거야?"
"아니다. 확실히 만족시켜드리지 않았나요? 유리 씨 장난 아니게 좋아하셨던 것 같으데...... 특히 모모씨랑 셋이서 했을 때."
서우가 그날 일을 들먹이자 유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리고는 아프지 않게 서우의 팔을 퍽- 때리며 큼큼, 목청을 가다듬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다른 이야기 하자."
"예."
"츠부미는 어쩌다가 저 꼴이 된 거야? 게다가 세트로 같이 다니던 에리는?"
"....츠부미는 연구소에 갇혀 있었어요, 그리고 에리도.. 자세히는 말하기 그렇지만 에리는 뭔가 좀비랑 관련되어 있어요, 츠부미는 아닌 것 같지만 얼떨결에 같이 끌려간 것 같구요."
"연구소? 이 근처에 있는 그거 말야?"
"알아요, 유리 씨?"
"대충은 들어서 알지, 거기서 좀비 잡아다가 실험한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셨거든, 뭐 이쪽이랑은 전혀 관계 없는 이야기지만."
생각해 보니 유리의 집안은 정부의 주요인사였지, 서우는 그 외에도 뭔가 더 알고 있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그거 말고 아는 건 없어,그런뎈 에리랑 츠부미가 거기 끌려 갔다니... 그럼 에리는?"
"에리는 저기 없어요, 뒤져봤지만 나오지도 않았고 츠부미도 에리가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고요.. 일단 츠부미가 진정되면 좀 물어볼 생각입니다."
"그래.. 좀 진정 되면 물어봐, 애가 저렇게 허겁지겁 먹는 걸 보니 너무 안쓰럽더라... 그런데, 이제까진 어디 있던 거야? 언제 도쿄로 다시 왔어? 보니까 내가 준 핸드폰으로 연락도 안 되던데."
"아 핸드폰은...."
"핸드폰 어딨어, 설마 잃어 버린 거야?"
"아... 그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아마 나고야에서 유우리에게 당하면서 그때 잃어버린 것 같았다. 사쿠라가 준 서우의 개인 소지품은 거의 없었으니까.
...뜬금없지만 좀비 게임에서 점수 엄청 올렸었는데, 서우는 왠지 그것에서 아쉬움을 느끼며 유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무래도 지금 서우는 숨어야 하는 입장이고 어쩌다 보니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격하는 입장이어서 [에리만 찾는다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유리에게 상황을 전부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유리는 서우에 대해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너, 헨타이센빠이... 아니, 최근에는 이름을 바꿨다지? 짐승으로."
"어.....엇? 알아요?"
"알고 말고, 그거 한참 난리였는데 요즘엔 갑자기 확 조용해졌더라? 아는 지인이 너네 신도야. 나보고도 같이 믿자고 난리였는데, 그이도 갑자기 확 조용해졌더라구...... 아무튼 그 실체가 눈앞에 있으니 내가 믿을 턱이 있나, 뭐. 우후훗."
"..하하."
"걱정은 마, 나 입 무거워?"
정말 무겁다면서 입을 쭉 늘어뜨리던 유리는, 이내 소리내어 깔깔 웃으면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서우에게도 하나, 나름대로 고프던 찰나여서 서우도 하나 빼어물자 유리가 불을 붙히고는 서우에게도 가져가 불을 붙혀주었다.
"진짜 도쿄에서 무슨 짓을 하고 갔길래 졸지에 사이비 종교 간부도 아니고 교주가 돼? 너 진짜 운 어어어어엄청 좋다."
하긴, 그것엔 서우도 동감하는 바였다. 이렇게 운이 좋을 줄이야. 여기에 와서 3일 정도 고생하다가 소라를 만나고, 소라를 만나서 대피소로 가다가 에리와 츠부미를 만났다. 그리고 거기서 유리를 적당히 몸으로 구워 삶아서[!] 모모를 알게 되었고 나나를 알게된 뒤에, 아키오와 만날 수 있는 플래그와도 같았던 가방을 습득했다.
아키오를 만나고, 좀비인줄 알고.... 나미를 어쩌다 보니 덮쳐 버리고, 그러다가 에리와 츠부미를 다시 만나고, 유우리와 하네다... 사쿠라....... 다시 에리.
'미치겠다.'
서우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유리는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칭찬해줬더니 왠 한숨."
"츠부미도 저 꼴인데 에리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 감도 안 잡혀요."
서우는 사실 지금도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참담한 츠부미의 모습을 보며, 여자들의 앞이니까 참자고 생각하며 간신히 간신히 참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이 갈 수록, 츠부미의 모습을 보면 볼 수록 더 화가 나게 되었다. 츠부미가 저 정도라면 '무시히메'라는 에리는 얼마나 더 끔찍한 꼴일지.... 제발 무사하기를, 서우가 길게 한숨을 쉬자 유리가 토닥토닥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생이네,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럼 츠부미는 일단 데려가겠네?"
"예, 그래야죠. 여기 며칠만이라도 좋으니까 머무르게 해주실래요? 저기 연구소를 폭파시키고 오는 길이라서...."
"뭐? 폭파? 그냥 구해온 게 아니라 폭파였어?"
"...... 당연한 거 아니예요? 츠부미만 쏙 빼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와, 테러범. 너 신고하면 상금 많이 받나?"
"어차피 귀족 히키코모리라 상금 같은 거 필요도 없으실 텐데, 그냥 몸으로 갚게 해주시죠."
"뭐어? 아하하하!"
유리는 자지러져라 웃음을 터뜨리다가 서우의 손을 잡고 밑으로 내려갔다. 서우의 꼴도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빡빡 씻고나 나와, 네가 먹을 것도 만들어 놓을게."
그렇게 문을 닫고 서우를 욕실에 밀어넣은 유리는 모모와 나나와 함께 서우가 먹을만한 것을 차리고, 츠부미에게 적당한 옷을 바꿔 입혀 주었다. 잔뜩 먹고 옷까지 갈아 입은 츠부미는 그제야 조금 얼굴이 피어 보였다. 마악 씻고 나온 서우도 그런 츠부미와 만났는데, 츠부미는 서우를 보자마자 그제야 활짝 웃어 보였다.
"오, 오빠아...!"
"츠부미...."
그리고는 와락, 서우는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품에 안긴 츠부미를 도닥여 주다가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너무 급작스럽기는 했지만 서우의 머리속은 거의 '에리'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츠부미, 저기... 너무 급하게 물어봐서 미안한데, 에리는? 아까 어디로 갔다고 말했
잖아."
그 말에 츠부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모모와 나나는 당황했고, 유리도 조금 당황해서는 서우를 말렸다.
"저어,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듣는 게 좋지 않을까? 츠부미도 힘든 일도 많이 겪어서 피곤할 텐데...."
"아... 그래도, 그냥... 에리가 좀 걱정 되서요. 츠부미, 그건 모르는 거야?"
여전히 츠부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니, 더 어두워진 것 같은 표정에 여자들도 당황했고, 서우도 조금 당황했다.
물론 츠부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츠부미는 연구소에서 했던 말만을 반복했다. 며칠 전에 삼촌, 후지야마가 데려갔으며 자신은 그걸 볼 수밖에 없었노라고.... 정말 츠부미가 아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서우는 길게 한숨을 쉬며 짜증섞인 한숨을 터뜨렸고, 나나는 그런 츠부미를 좀 쉬게 해주자며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젠장, 그 새끼...... 찾기만 하면 정말...!"
"그 삼촌이라는 사람이 에리랑 츠부미를 연구소에 넘긴 거야?"
"아뇨, 그 새끼 자체가 과학자였어요. 에리랑 츠부미를 받아들인 것 자체가 함정이었던 거죠."
"뭐어?... 세상에....."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유리는 끄응- 낮은 신음 소리를 내다가 쇼파에 주저앉은 서우의 옆에 앉았다.
"너, 에리한테 푹 빠졌구나?.... 예쁘긴 하지만 말야. 동글동글한 게 귀엽게 생겼지."
"아.... 뭐..."
"쯧즈, 그래도 애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지."
"네?"
"어린애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너 츠부미 몇 번씩 구해줬지? 그래서 이번에도 츠부미는 그때 생각을 하면서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걸."
유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서우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짓자, 유리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 나이 때 어린 여자 애들은 괜히 그런 거 있어, 그러니까 괜히 츠부미 앞에서 너무 에리 챙기지 말아. 에리 찾고 나서 걔랑 잘해 보려면 츠부미랑 사이 나쁘면 안 되잖아?"
서우는 당췌 유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서우가 눈치가 없다기 보다는 츠부미 같은 어린 아이 자체를 이성으로 보고 있지 않기에, 여자로 보고 있지 않음에 기인한 것이었다. 서우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리를 보다가, 그녀가 머리에 푹 씌워주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렸다.
그 덕에 머리도 좀 식은 기분이 들었지만, 반대로 분노는 차갑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후지야마, 두고 보자.'
눈앞에서 낄낄 거리고 있는 후지야마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아예 회를 쳐주겠노라고 생각하며 서우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실룩거렸다.
*
============================ 작품 후기 ============================
*
저는 교회가 좋습니다.
자주 저에게 물티슈를 주는데, 저는 늘 물티슈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책장에 쌓인 먼지를 닦는다거나 노트북의 먼지를 닦는다거나 책상의 먼지를 닦는다거나 방이 더러워서 물티슈가 엄청 필요함. 걸레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저도 이래뵈도 노블레스 작가, 노블레스하게 일회용 물티슈를 사용하고 싶네요. 아무튼 오늘도 밖에 나갔는데 시온 교회 분이 물티슈를 주셨습니다. 커피도 마시고 가라고 하셨지만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커피믹스가 가족이 하루에 하나 씩 타서 먹어야 1년 후에는 없어질 정도로 수 많은 커피믹스가 있는데, 예전에 알바하던 곳 사장님이 새해 선물이라며 커피믹스를 엄청 주셨거든요. 돈은 돈을 부르고 커피믹스는 커피믹스를 부르고... 아아, 슈퍼하다.
+) 그나저나 철컹철컹이라니?! 츠부미는 실험만 좀 당하고 말았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덧글에 깜짝 놀랐슴다. 정말 슈퍼한 생각들....! 역시 저보다 한 수 위에 계시는 분들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