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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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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차감이 워낙 좋은 탓에 차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서우는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 있다가, 우연히 차창에 비추는 제 얼굴을 한번 쳐다 보았다. 눈썹은 눈에 가까운데 눈은 삐죽 올라갔다. 머리는 눈색과 마찬가지로 무지하게 까맣고 마른 편이어서 그런지 콧대나 턱은 날카롭다. 서우는 높이 올라간 제 눈썹을 씰룩이다가 사쿠라를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한국에 온지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돌연변이를 추적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려 잉여시간이 잔뜩 생겨 버렸다. 해서 서우는 그 이후로도 종종 밖을 쏘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종종 감시인원이 붙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쯤은 와이어로 빌딩벽을 간단하게 타고 올라가면 우스울 정도로 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되려, 그렇게 붙은 감시인원을 따돌리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은, 그들의 얼빠진 표정을 볼 수 있어 재미 있기까지 했다.
"....와아, 병신들."
제 발밑에서 노는 것 같은 개미를 보는 느낌이랄까. 건물 최상층에 올라서 감시인원들이 밑에서 아둥바둥이는 꼴을 보자니, 그것 참.....
서우는 와이어로 파괴하는 것 말고도 잡아 끌어 당길 수도 매달릴 수도 있었다. 물론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운 것은 들지 못했고, 정확도도 그닥 좋지 않은데다 그렇게 했을 때에는 와이어를 한 갈래로 밖에 만들 수 없어 이렇게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쓰지 않는 방법이었다.
아무튼 서우는 그날 밤도 적당히 사쿠라를 재워놓고 마실을 나가려 차비를 하는데, 하필이면 건물의 최상층 복도에서 딱- 김성희와 마주쳤다. 그떄와 변함 없는 날카로운 눈매, 위로 높게 묶은 머리, 대신 옷만이 달랐다.
'다들 여기서 사는 건가?'
왜 다른 능력자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여자인가. 참 재밌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잠이 덜 깨 살짝 몽롱한 것이 있어, 서우는 김성희가 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서우는 앞에 있는 김성희를 보며 입술을 실룩이다가 엘레베이터에 올랐다. 김성희도 엘레베이터에 같이 올랐다.
"......."
당연히 엘레베이터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김성희는 서우를 깔 보고, 경멸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서우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경멸하든 말든, 서우는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 엘레베이터 거울을 슥 쳐다 보았다. 언뜻 성희의 얼굴이 보였는데, 능력자는 얼굴 보고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김성희도 역시 미인이다.
유우리와 하네다가 아무래도 체구가 조금 작다면, 성희는 기럭지도 긴데다가 늘씬하고 잘 빠졌다고나 할까?
'.....이런 새우깡 같은 여자, 자꾸만 눈이 가네. 눈이 가.'
특히 처음 봤을 때 같은 옷이 아니라, 그녀는 여성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또 장난이 아니었다. 허리는 뇌살적으로 잘록하게 들어가고, 투 버튼 식이라 가슴쪽은 부풀어 보인다. 가슴은 옷 때문에 부푸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척 보기에 손에 꽉 들어찰 정도로 컸다.
거기에 신체 스펙까지 기본 탑재, 감사한 얼굴에 황공한 몸. 서우는 은근슬쩍 그녀의 몸을 스캔하고 있다가 김성희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을 느꼈다. 왠지 웃음이 나서 픽, 웃는 순간. 김성희의 팔꿈치가 서우의 쇄골을 쾅! 하고 밀어 붙혀 벽으로 밀쳤다.
"어?"
딱히 못 피한 건 아니고, 뭐 하나 싶어 내버려 뒀더니 벽치기라? 서우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너 같은 쓰레기 발정나라고 있는 몸 아니니까 눈깔 돌려."
"그럼 눈에 보이지를 말던가. 그나저나 이 좁은 공간에서 이러면 뭐 하자는 거야. 싸우자고?"
날카로운 공격이기는 하지만 빈틈이 많았다. 하지만 저돌적으로 공격을 하는 것으로 보아, 성희는 원거리가 아닌 단거리에서 공격하는 능력자 같았다. 그렇지만 말이지... 서우는 한 손으로 김성희의 머리를 세게 쥐었다. 순식간의 일이라 성희는 서우의 손을 피하지 못했고, 서우는 그 상태에서 씩 웃었다.
"내 능력은 빛으로 구성된 와이어다. 최근엔 여기에 독까지 심어서 중독 시키는 수준까지 올라갔거든? 그런데, 그 와이어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성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전에 보았던 '최서우'의 정보에 나오던...... 아ㅡ 성희는 뒤로 벗어나려 했지만, 여전히 서우의 손을 그녀의 작은 머리를 세게 쥐고 있었다.
"...!"
"잘못 걸렸어. 머리 터지고 싶어서 작정한 거지? 그렇지?...... 이렇게 가까이 오면 어쩌나."
서우의 말에 성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서우는 겉으로만 무섭게 웃으며, 속으로는 폭소했다.
성희의 걱정은 쓸데없다. 이 예쁜 머리를 괜히 터뜨리거나, 볼썽 사납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 이렇게 예쁘게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저... 예쁜 얼굴이 사색이 되는 것이 보고 싶었다. 놀라서 달달 떠는 게 보고 싶기도 했다. 그저 장난이 치고 싶었다.
"무슨...?!"
서우는 성희의 머리를 쥡 손에 힘을 강하게 줌과 동시에 그녀의 뽀얀 볼을 슥, 핥아 내렸다. 워낙 하얗고 매끈해서 화장이라도 했을줄 알고, 화장품 맛을 각오했더니 의외로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그저 살. 그렇게 서우의 혀가 눈 언저리까지 올라가자 힉- 하고 성희가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서우의 손 힘이 더 강했다.
"미,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네가 잘못이지. 괜히 반항하지 마. 와이어로 머리 쑤셔지기 싫으면."
"놔, 놓으라니까?!""
반항도 애석하게 서우의 입술이 제 입술 근처에 닿고, 그 두툼한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성희는 눈앞이 새하얘짐을 느꼈다.
"건드리지 마!"
성희는 정말 있는 힘껏 서우를 밀었다. 그리고 서우는 반항없이 뒤로 밀려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가볍게 덜컹일 정도로 강하게 밀려났지만 서우는 별 생각 없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 상태로, 방 안이라면 모를까... 모두에게 생중계 라이브 하고 싶은 게 아니면 엘레베이터에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흥분해 봤자 이쪽만 걸어나가는 게 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순히 물러난 서우는 씩,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마치 내가 언제 그랬어? 라고 되려 그쪽에게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김성희라고 했지? 앞으로는 그렇게 머리 세 개 들이대지 마."
"뭐? 머리 세 개?"
"출렁거리는 거 두 개만 들이데도 곤란하거든. 알겠지? 기왕이면 좀 감싸라고. 시선 가니까."
"......?"
성희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서우가 아예 그곳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 말을 이해했다. 그렇게 분노한 김성희 덕에 건물 1층 로비에 있던 물건은 무엇 하나 제대로 남아나질 못했다. 하지만 서우는 그런 김성희를 두고 유유히 밖으로 빠져 나와, 다시 서울의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후우......"
썩 좋은 밤공기는 아니지만,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내키면 안 돌아올 수도 있고. 그러니 서울 공기나 잔뜩 마시자는 생각으로 서우는 기분 좋게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치안도 나쁘지 않아서 도쿄처럼 쓸데없이 양아치가 덤비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도 상당히 좋았다. 귀찮은 잔챙이가 덤벼들면 서우에게 있어서는 죽이지 읺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썰기 실어도 어차피 충분히 썰어 버릴 수 있고, 썰고 왔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고 싶지는 않다. 마치 친정에 오면 여자가 쉬고 싶은 것처럼.....? 서우는 왠지 적당한 비유라고 생각하면서 거리를 쏘다녔다.
그러다 문득 보게된 것이, 길게 늘어진 배급 줄이었는데, 보아 하니 여기로 몰려든 피난민이나, 일반인들은 저기에서 배급을 받는 것 같았다. 왠지 일본에서 보았던 것이 그대로 여기에서도 보이고 있으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서우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에 걸리는 것이 있는 게 아닌가?
"......?"
결국 뭔가 싶어, 서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 보이는 건 정말로 익숙한. 하지만 길었던 머리만 짧게 잘라 묶고 있는 여자였다. 서우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제 만났던 친구 녀석들이 만났다 어쩐다 했더니 설마 이 근처에 있었을 줄이야. 옛 여자친구였던 박소희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몇 M 되지도 않은 거리에서. 만약에 그대로 박소희가 배급을 받고 뒤를 돈다면, 딱 서우가 보일 터였다.
허허, 서우는 한숨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우연 한번 지랄 맞네."
저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린 서우는 몸을 돌리려 했다. 옛 여친, 엄밀히 따지자면 제 잘못으로 저쪽이 지쳐 떨어진 것이니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몇 년전 인연, 만나 무엇 하겠는가? 서우는 괜한 기분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몸을 틀었다.
그리고 박소희도 몸을 틀었다.
"어..."
저를 딱 알아보는 것 같은 박소희의 눈에 서우는 생각했다.
오늘은 여자랑 엮이는 날인 건가.
아니면 한국에 오자마자 이렇게 여자랑 엮이게 되는 건가. 박소희는 왠지 지나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온 것처럼 서우의 옆에 어색하게 다가왔고, 서우도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 음...... 오랜만이네."
"서.. 서울에 있었어?"
"아니, 다른 곳에 좀.. 있었는데. 서울 다시 오게 됐네. 아, 조심."
뒤에서 무거운 수레를 끌고 오던 사람이 소희를 치고 갈 뻔했다. 서우는 무심코 그녀를 잡아주다가 제법 가까워진 거리에 놀랐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간만에 보는 소희는 여전히, 예뻤다. 하기는 그때도 예쁜 여자애가 쫒아 다니길래 좋다 싶어 수락한 거 아니었던가.
"잘 지냈어..?"
다만 살은 전보다 훨씬 빠진 게 좀 보기 안 좋기도 하고, 피부도 많이 푸석해 보인다. 그게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예뻐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우는 잠시 그런 소희를 보다가 나름 아련한 감정이 드는 걸 느꼈다. 이제와서 쓸데없이. 서우는 푹 한숨을 쉬다가 애가 있다나 어쩐다나 하는 말을 떠올렸다.
그새 결혼한 것 같은데, 그럼 남편도 있겠구만. 아키오 때도 그랬듯, 가지고 싶으면 누구의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는 서우였지만 예전 일도 생각 나고.. 상당히 복합적인 기분이 드는지라, 남편에 애까지 있는 소희를 굳이 만나서 반가워. 그러니까 간만에..! 하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 완전히 잊고 있다가, 어제 들어서 기억 났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잠시 서우는 오래간만에 만난 소희와 상당히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충 잘 지냈느냐, 나도 잘 지냈다. 뭐 이런 식의..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갑자기 소희에게 아기라기엔 큰 아이을 안은 여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얘, 뭐해. 배급 받았으면 가야지. 네 딸도 춥다고 칭얼 거리잖아."
"어... 어! 저기,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응? 아는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어?"
딸? 서우는 그 말에 뭔가 관심이 생겼다. 마침 옆에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고, 소희의 딸이라니 얼마나 예쁜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희는 아이를 바로 끌어 당겼다. 마치 숨기려는 듯이.
"엄마아아아."
"애가 춥다고 하네. 난 이만 가봐야겠다... 저, 안녕. 잘 지내."
하지만 주변이 어둡다고 한들, 서우가 보지 못할 리가 없다는 걸, 소희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서우는 아이의 생김새를 순간이지만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웃었다.
"....얘, 생긴 거."
"어..?"
"....생긴 게 왜 이래? 너랑 하나도 안 닮았다. 너 닮으면 예쁠 줄 알았는데."
============================ 작품 후기 ============================
연참을 하기위해 마트에서 900원 하는 보름달을 먹었습니다.
보름달을 먹고, 제 얼굴을 보름달로 만들었군요..? 큭.
죄, 죄송. 그러고 보니 할머니가 찌그러진 초코퍼지도 하나 주셔서, 그것두 먹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