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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날씨가 미쳤네."
"서서.. 서우님! 무, 문 좀 닫아 주십시오! 빗물이.....!"
"아, 죄송. 죄송."
서우의 말 그대로 날씨는 미쳐 있었다. 하늘을 찢을 듯이 스치고 지나가는 번개가 번쩍인 뒤에 산사태가 나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거기에 비는 얼마나 내리는지...
돌연변이를 잡은 후, 처리를 하기 위해 30분 정도 그 자리에 있을 때만해도 날씨는 멀쩡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만큼 서늘하기는 했지만 하도 움직여서 땀으로 흠뻑 젖은 서우에게는 되려 고마울 정도였다. 그래서 지원으로 내려온 헬기에 타서 서울로 가려는데 천안, 그 즈음까지 움직였을까, 갑자기 미친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강풍도 모잘라서 번개까지 치기 시작했다.
"더 심해지면 못 가겠는데요... 이거, 이렇게 심해서야.."
서우에 이어, 주원은 밖을 내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비가 너무 내리다 보니 한치 앞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원래 타고왔던 헬기라면 이런 날에도 거뜬하게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 타고 있는 헬기는, 상당히 구식인데다가 급하게 구한 것이라 상태도 썩 좋지 않아 타고갈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평택에 있는 대피소에 임시 착륙해,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물기로 했다.
"우천으로 인해 헬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 해서 오늘은 여기 대피소에서 머물어 주세요. 평택 대피소는 상태가 무척 좋고, 수용 인원도 적으니 능력자님들이 지내기 편하실 겁니다."
서포터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이 말하는대로, 평택 대피소의 시설은 무척이나 좋았다. 그렇게 간만에 대피소에 들어가게 되니, 일본에서의 일이 떠올라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어서오세요! 이,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갑작스럽게 실레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헬기가 도무지 타고갈 수가 없어서요."
"아뇨, 아뇨, 죄송하다뇨. 아닙니다!"
대피소의 관리자가 얼른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며 다섯 명의 능력자에게 한 층을 통째로 비워주었다. 졸지에 거기에 머물던 사람들은 밑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누구 하나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서우는 안으로 들어와 방 하나에 자리를 잡았는데, 혹시나 통화할 수 있는 것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통신시설이 마비되어서 곤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우가 제 핸드폰을 켜 보기는 했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사쿠라에게 전화 한 통 정도는 하고 싶은데....."
서우는 사쿠라의 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눈물 콧물 쏟으며 울고 있을 것 같다. 엉엉 서우님 어떻게 되신 거예요. 엉엉엉. 왜 연락이 없어! 왜애애! 그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귀여워서 서우는 큭큭 거리다가 침대에 누웠다. 먼지 냄새가 심하고, 세탁한지 엄청 오래 되었을 것 같지만 나름대로 푹신한 게 편하다고 할까.
그리고 서우는 과도하게 움직인 것도 있지만 촉수가 몸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달라 붙은 덕에 근육통처럼 이곳저곳, 안 욱씬 거리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대업을 성사했다는 보람 때문인지 슬슬 아픈 것마저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정말로 재미 있었다. 즐거웠어.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 같아 서우는 실실 웃다가,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천둥이 치고 있다.. 시끄럽지만 그래도 좋다. 모든 게 편해서 서우는 최근 들어서는 최고로 편하게 단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세 시간 정도를 잠들었던 서우는 주린 배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숨 푹 자고 나니까, 욱씬 거리는 몸도 많이 나아 배가 몹시도 고파진 것이다.
시설 좋은 대피소이니 만큼 식량도 구비되어 있겠지, 어디에 가면 있으려나. 4층에 있던 거우는 3층으로 내려왔다. 2층까지는 돌연변이의 위협이 있어 잡다한 것을 넣는 것에 사용하기 때문에, 주로 사용되는 곳은 3층 이상부터. 밑으로 내려가자 식량을 모아둔 곳이 있었다.
하지만 대피소가 다 그렇듯, 전투 식량이나 방부제가 범벅이 된 음식들 뿐이어서 썩 좋지는 않았다. 서우는 그 중에 그나마 나은 물만 넣어 바로 먹는 밥이나, 통조림을 꺼내고는 4층의 계단에 앉았다. 마땅한 식탁이 없어서 계단에 앉아 먹고 있으려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까지 일본에서 최고급의 음식만 입에 대고, 좋은 잠자리에만 누웠기 때문인가? 맛없는 거 먹다가 맛있는 거 먹으면 좋지만, 그 반대로 맛있는 거 먹다가 맛없는 거 먹게 되면 기분 주옥 같다고 지금이 딱 그랬다. 서우는 통조림을 수저로 퍽퍽 퍼 먹고는 쓰레기를 대충 밖으로 집어 던졌다. 어쨌든 주린 배만 채우면 되었지, 뭘.
쓰레기를 처리한 서우는 남자들이 사용하는 욕실로 들어가서, 여분의 칫솔로 양치를 했다. 성인이 사용할만한 치약은 없고 아기들이나 쓸만한 딸기 치약, 초콜렛 치약 뿐이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이를 닦고, 몸을 간단하게 씻은 서우는 아직까지 여기저기 결린 느낌이던 몸을 풀면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때, 저 멀리서 무엇인가 온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잠시 멈칫하니, 그 느낌은 더 확실해졌다. 김성희였다. 서우는 그제야 아까 그녀에게 뺨을 맞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실 별 생각은 없지만.. 김성희가 펑펑 울었던 것이 떠올랐다.
ㅍ
흐음... 잠시 생각하던 서우는 가만히 자리에서 김성희가 오기를 기다렸다. 성희 또한 마악 씻고 오는 길이었는지 언뜻 비누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낀 듯한데, 서우를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어 복도의 끝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서우는 방금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어, 김성희. 안녕? 기분은 좀 어때?"
물론 서우가 그녀의 기분을 살펴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서우는 궁금했고, 재미 있었을 뿐이었다. 억울하다는 듯 펑펑 우는 그녀는 단순히 장난 같던 내기에서 져서는 아니었다. 뭔가 더 쌓인 것 같아 보였고.. 그래서 재미 있었다. 서우가 한 발자국 그녀에게로 다가가자, 김성희는 순간 뒤로 물러 나려는 듯했지만 다시 앞에 섰다.
뭔가 도전적인 눈빛, 그녀는 독기에 가득 차서 서우를 올려다 보고 있었고 서우는 그 눈이 썩 마음에 들었다.
"왜 그렇게 봐?"
"........."
"한 대 또 떄리기라도 하려고?"
낄낄거리던 서우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으로 몸을 틀었다. 그때, 김성희의 입에서 잔뜩 억눌린 듯한 새어나왔다.
"..... 아니, 내기."
"내기한 거? 아아......"
"...그렇게 말했으니.. 까."
내가 저 좀비를 잡으면 넌 내가 하라는대로 해야 한다. 김성희는 너 따위가? 어디 해봐. 식으로 나왔고, 서우는 로리웹의 명대사를 읊어 주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났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일본 피겨 심판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돌연변이를 잡은 건 전적으로 서우의 공이었다. 누구도 그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우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김성희의 자존심이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완전히 깎여 나갔던 그 자존심. 서우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 했던 그녀는 서우와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서우는 픽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니, 그거라면 이제 됐으니 없던 일로 하지."
"뭐?"
서우의 목적은 이미 달성 되었다. 자존심 상해서 펑펑 우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걸로 족하다고 할까. 게다가 왠지 모를 현자타임이 지속 되어, 성희를 보고도 별로 혹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몸매는 훌륭하다. 얼굴도 감사하다. 하지만... 그냥 갑자기, 혹하지를 않는다고 할까, 속된 말로 꼴리지 않는다고 할까.
'..돌연변이 한 마리 잡았더니 너무 뿌듯한 나머지 고자가 된 건 아니겠지..?'
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서우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인지 묘한 느낌이었다.
"난 이만 가볼 테니 너도 그만 자라."
서우는 저를 노려 보고 있는 성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을, 김성희는 강하게 잡아 끌어당겼다.
"뭐야?"
확 끌려가면서 서우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잡힌 손이 좀 아프기도 했고, 기껏 선심 써줬더니 귀찮게 나오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서우가 보았던 것은, 성희에 눈에 담긴 건... 이미 꺾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선심 쓰는 척 하지 마. 누가 그래 달래?"
"너..."
거기에 묘한 도전 의식 같은 것.. 그리고 투지. 서우는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 성희가 의아했지만, 한 편으로는 재미 있기도 했다. 서우는 나름 차분하게 가라 앉았었던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메마른 입술을 슬쩍 혀로 핥았다. 기이한 고양감이 가슴속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어. 김성희. 그냥 내가 보내준다고 할 때 얌전히 가지 그랬어? 서우는 저도 모르게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나랑 같이 일본으로 갈래? 너 혼자 나를 따라와."
"뭐?"
"거기 가서도 내가 시키는대로 전부 해. 그게 내기에 이긴 내가 너한테 명령하는 거야.... 이거면 할 건가?"
성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도 사실은 서우가 어떤 명령을 내릴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머리를 냉정하게 굴렸다면, 하다 못해 차분하게 생각이라도 잠깐 했다면 이 정도의 요구 조건은 충분히 나올만한 것이었는데...
하지만 한국을 제가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직 가족들이 있었고... 그렇다면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성희가 입을 꾹 다물자 서우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예전, 저를 보고 픽 웃던 서우의 모습 같아서 성희는 더한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런 성희의 표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던 서우는 이내 느릿하게 그녀를 쳐다 보며 웃었다.
"그럼 같이 일본으로 가자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건가?"
"....아마."
"그런 시덥잖은 대답은 필요 없어.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서우는 부러 그녀를 자극했다. 성희는 서우를 올려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몹시도 만족스러워, 서우는 결국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하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았다.
"어디 보자, 시간이.... 아홉 시네, 딱 좋아."
성희는 여전히, 서우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되려 아직까지 의아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서우는 악마처럼 웃으며 그녀에게도 시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지금 당장 내 방으로 같이 가자.....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마침 둘 다 씻었으니 딱 좋네. 샤워 한답시고 기다릴 필요 없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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