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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동안의 내기
마리코나 츠부미가 능력을 한계까지 사용하자마자 그대로 차를 타고 온 것이기 때문에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 둘이 왔다고 해서 바로 담 너머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우는 잔 다음 일어나서도 적당히 불을 피워놓은 곳 앞에 마리코와 츠부미, 셋이서 함께 자리를 잡았다.
워낙 아는 사이인 세 명인데다 두 아이의 관심사는 오로지 서우였으니, 자연스레 다른 능력자는 공기 취급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 써 주지 않아, 세 명의 목소리 주로 마리코의 목소리만이 불 앞에서 울렸다. 마리코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기가 좀비를 어떻게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마리코가 이렇게 목을 팍- 하고 뜯었거든요! 그래서 피가 파아악 튀고 막 그랬는데..”
짤깍짤깍,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박수까치 치며 이야기 하는 통에, 서우는 되려 아무런 말없이 어색하게 웃는 츠부미가 어른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서우는 마리코의 이야기를 적당히 들으며 슥, 츠부미를 훑어보았다. 여전히 어릴 뿐인데도 일도 하고, 능력자로서 이것저것 일본 정부의 트레이닝에 맞춰 일하다 보니 볼살이 살짝 빠져 뽀얀 얼굴이 갸름해져 있었다.
거기에 부드러운 생머리가 등까지 흩어져 내려와서일까? 츠부미는 왠지 모르게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렇지만 굉장히 순수해 보이고... 아무튼 그래봐야 어린애지만, 좀 더 크면 남자 여럿 울리는 건 식은 죽 먹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때가서 나 모르는 척하지 마라, 츠부미야. 서우는 츠부미를 위 아래로 스캔하던 것을 멈추려다가 아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안녕?”
“네에?”
...더럽게 어색하다. 그때 일도 그렇고 팔 벌려 줬더니 도망간 것도 그렇고.. 귀엽긴 하지만, 서우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츠부미랑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다고 말한 호타루는 직접적으로 츠부미가 널 좋아하는 것 같으니 좀 잘해줘라, 라고 말해 주었고 그래서 나름 이렇게 대해주는데 어쩌라는 건지, 하지만 별 내용 없는 말에 츠부미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오빠아..”
“........?”
“아하하, 갑자기 안녕? 이러시구... 오빠 표정이 너무 웃겨요. 헷...”
여자의 미묘한 심리속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여자의 마음은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서 전혀 모르겠다고, 서우는 생각했다.
싸운 뒤-> 여자: 우리 헤어져-> 남자: 그래 헤어지자->여자: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 살쪘어?->쪘어.->우리 헤어져.
나 살쪘어?->안 쪘어.->거짓말 하지 마, 우리 헤어져.
후자의 경우에는 가슴이 쪘냐고 은근히 말하면 된다고는 하는데 아직도 전자의 경우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서우였다. 뭐, 다행이도 지금은 그런 말 같은 건 하지 않는 쿨한 여자들에 둘러 싸여 있지만..... 서우는 츠부미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예전이라면 츠부미가 무슨 표정을 짓든, 애라서 그런지 그 감정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나 딱히 관찰력이 없는 자신이라도 대충 보면 알 수 있었는데.. 뭔가 묘하게 츠부미는 변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렇게 세 명은 나름대로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며 두 시간 정도를 보냈다. 주로 마리코가 떠들고, 츠부미가 맞장구치고 서우는 간간히 그 이야기에 반응하는 정도. 워낙 비쥬얼적으로 뛰어난 소녀들이다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문제는 쉬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마리코의 능력이 아직 원상복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역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염력의 사용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 전에 스스로 생각해도 능력의 사용이 과했던 것을 알았는지 마리코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본능적인 감으로 휴식이 더 필요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절부절하는 것은 수행원들과 서포터들이었다.
“마리코님, 지금은 좀 어떠세요?”
“으응... 잘 모르겠는데요......”
“저기, 레이코 씨가 들고 있는 돌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끙...... 우우, 안 돼요. 마리코 못하겠어요오.. 안 닿아요.”
마리코가 울상을 짓자 서포터들이 바로 움찔하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예전...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코가 능력을 각성하고 그녀를 실전에 투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지나친 실전 투입에 화가 난 마리코가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서포터를 땅에 메다 꽂고, 근처에 있던 좀비들은 모조리 다 찢어서 사방으로 던지며 난동... 이 아닌 투정을 부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그럼 일단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리코님.”
“네에.. 마리코 좀 쉴래요.”
물론 그때와 지금의 마리코는 다르다.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겠지만.. 서포터는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다가 멀리 있던 다른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일단은 안 되겠다는 표시였다. 해서 당분간 더 대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더니....
“뭐라구? 돌연변이가 갑자기 벽에 돌진해?”
“예, 예...! 사람 소리를 들은 건지 갑자기 방어벽에 달려들고 있어요, 이대로면 금방 벽이 넘어갑니다. 게다가 보통 크기의 돌연변이나 좀비들도 한꺼번에 달려들고 있어서...!”
“젠장 가지가지 하는군...”
서포터들의 지휘관은 한숨을 쉬며 별 수 없이 3인체제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리코가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기에 어깨가 몹시도 무거웠다. 하필 저쪽 담 안에는 좀비 및 돌연변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초대형 폭탄이 있었는데, 그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는데다 일정 충격을 받으면 폭팔하다 보니 마리코에게 먼저 그 폭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달라 말할 예정이었다.
폭탄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 츠부미나, 강력한 음파를 만들어내는 이토의 경우 혹시나 그 폭탄을 건드리면 그 충격으로 연속적으로 비밀스럽게 매장되어 있는 폭탄들이 다 터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마리코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리코는 저 모양이고 돌연변이는 저리 되었으니, 한숨을 쉬던 지휘관은 일단 급한대로 작전을 구상하다가 급하게 정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예? 하네다님이요?"
*
“지금부터 우리끼리 간다고요? 진짜?”
마리코가 더 쉬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이대로 또 시간을 때워야 하는 건가 싶어 여배우마냥 우유주사 프로포폴이라도 맞고 깊게 자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던 서우였다. 그래서 지나가는 서포터를 붙잡고 프로포폴 없냐고 농담 따먹기 하고 있던 서우였는데, 셋이서 먼저 간다니 절로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예에, 갑작스럽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서우 님, 츠부미 님, 이토 님, 이렇게 세 분이서 먼저 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갑자기 돌연변이가 이쪽을 향해 진격해 와서.. 금방이라도 벽이 기울기 일보직전이 되었어요.”
“아..... 그래요, 과연..”
“예, 해서 지금 바로 준비해 주셔야겠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뭐 이쪽은 기다리던 바니까요. 안 그래도 좀 쑤셨고....”
서우는 목에 걸고 있던 망원경을 쓸까 하다가 대충 눈을 찌푸리고 멀리 있는 담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도 같고, 아까보다 이쪽으로 훨씬 더 기울어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새 저 정도로 기울였단 말이지......’
서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쿵, 쿵.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 같은 것이 묘하게 발바닥을 타고 스물스물 올라와, 맛있는 음식이라도 앞에 둔 것처럼 입에 스읍 침이 고였다. 혀로 제 입술을 슥 훑던 서우는 가만히 눈을 떴다. 죽여달라고 앙앙거리는 돌연변이의 외침이 여기까지 들리고 있지 않은가. 서우는 일단 텐트 안으로 돌아가, 거대 돌연변이 때 도와준 공로로 받은 슈트와 함께 사쿠라가 지원해준 기계를 들었다.
한국에서의 일 이후, 사쿠라는 서우가 얼마만큼 살육을 좋아하는지 깨달아, 말릴 수 없을 바엔 차라리 다치지라도 말라는 심정으로 도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돌이들을 들들 볶아 서우에게 선물을 해 주었다.
서우의 힘의 원천은 빛이었다. 그래서 대낮일 때 특히 더 힘이 강해지지만 그저 라이터만 있을 때에도 힘을 쓸 수 있었다. 또한 실험에서 햇빛과 동일한 세기의 빛을 쬐는 방 안에 들어갔을 때에 서우는 대낮에서와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즉, 빛의 면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의 세기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사쿠라가 서우에게 선물해준 것은, 직접적으로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도 있는 세기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기계였다.
빛이 제 신체에만 닿으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것은 팔찌 같은 형태를 띄고 있었고, 빛이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해서 서우에게는 안전하고 그 능력을 배가 되게 만들어 주는 최고의 무기였다. 단점이라면 3시간 정도를 사용하면 충전해 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너무 강한 빛이 나오는 나머지 살이 그을린다는 점 정도지만 그 정도는 자가치유 능력으로 금방 회복이 되어, 딱히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후로는 처음인데... 기대되는데, 이거......"
이리저리 제 팔찌를 둘러보던 서우는 자박자박 들려오는 여자의 발 걸음 서리에 텐트 입구를 쳐다 보았다. 옷 갈아 입는 것을 도와준답시고 여자를 보냈을 리는 없고, 그럼 누구? 의아하게 생각하는 순간 슬쩍 텐트가 걷어졌다.
“저 서우님.”
여자였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쉭쉭 들어와? 서우는 픽 웃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죠?”
“혹시.... 그러니까.................”
처음 보는 서포터가 머뭇머뭇거리며 말을 삼킨다. 서우는 무슨 내용이 뒤에 따라올지 알 것 같아 부러 웃음을 삼키며 말해보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어차피 뻔하겠지, 하네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을 터였다.
"저 혹시 하네다님, 그러니까.. 능력자인 하네다님의 행방에 대해 뭔가 알고 계신가요?"
결국 서포터는 머뭇거리다가 하네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어렵사리, 분명 위에서는 실토하게 만들라고, 추궁하라고 시켰을 텐데 추궁은 개뿔. 안절부절 못하는 여자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서우는 입꼬리 한쪽을 쓰윽,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