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영식아 겨울오기 전에 이번엔 하나 만들어야지?"
"만들긴 뭘 만드냐? 더군다나 입대 앞두고 뭐하러?"
"그러니까 있어야지 마! 이번에 가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민간인으로 마지막 20대가 될지도 모르는데,
올 겨울 만큼은 따땄하게 보내고 가야 할 거 아냐?"
"난 그런거 몰라 마! 그렇게 걱정되면 하나 소개 시켜 주던지...?"
"어라? 야 마!...소개 준다고 되냐? 줘도 못 먹는게..."
"흐흐...그건 그러네...하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먹자!"
장기복무로 자원입대를 앞둔 바로 전 겨울의 길목에서,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이었다.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은 홀로 있는 사람들에겐 참 견디기 힘든 계절임엔 틀림없다.
지난해엔 이사며 뭐며 해서 겨우내 정리하느라 어찌 보냈는지 몰랐는데, 올해는 유독 밤이 길게 느껴지기만 하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 버리는데는, 뭐니뭐니 해도 몸을 혹사 시키는 편이 최고 였다.
침실을 제외하곤 유리창을 다 열어놓고 빨래도 돌리고, 바닥 걸래질에 집안 정리 하느라 한겨울 임에도 이마에 땀이 맺힐 만큼 움직여 댔다.
어느정도 청소며 정리가 마무리 됐다 싶어, 잠시 앉아 쉬며, 시계를 쳐다보니 아직도 9시가 안됐다.
"휴~우...이거 진짜 시간 안가네..."
시간도 시간 이거니와 움직여서 그런지 왠일로 배에서 신호가 온다.
침실문을 빼꼼 열고 안을 들여다 보니, 두 팔을 위로 올린채 여전히 고른 숨을 쉬며 잠들어 있다.
'피곤하긴 했나보네~~'
데이트 후 소영이 사온 빵을 들고 쇼파에 앉아 TV를 켰다.
예전에는 성탄절이면 공중파가 앞다투어 다양한 가족영화를 해 주곤 했는데,이젠 그것도 옛날일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케이블에서 해주는 미드나 영화를 보는 편이 훨씬 나이진 것이다.
미드 하나가 끝날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소영에게 전화를 했다.
"와우~~ 오라버니?"
"그래~ 일은 잘 봤고?"
"당근이죠...근데...우리 오늘이 첫 통화인건 알아요?"
"그렇구나~...문자만 했었지? 하하"
"아~~ 좋다!...오라버니 목소리 들으니까 꼭 옆에 있는거 같다"
"나도 그래~."
"아니다 오라버니! 우리 얼굴 보면서 통화 할까?"
"뭐? 어떻게 얼굴 보면서 통화해?"
"이그...지금 전화기는 다 화상통화 돼잖아요?"
"화.상.통.화? 나 안해 봤는데?"
휴대폰으로는 화상통화를 해 본적이 없었다.
스카이프를 이용해서 은지나 아내와 화상대화를 한 적은 있었어도,
함께 지낼때도 요금이 비싸니 어쩌니 하는 통에 화상통화를 해 본적은 없었던 것이다.
"제가 전화 끊고 다시 할테니까, 얘기 드린대로 누르시고 받으시면 되요? 알았죠?"
"어...알았어"
퇴물 소리 들을까봐 젊은애들 한 다는 것은 왠만하면 다 따라해 봤는데,
매일 들고 다니는 이 전화기에 대해선 사실 통화와 문자, 알람, 사진, 메일 확인 정도랄까?
그 나머지 기능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보니 모르는게 많긴 할거다.
특히 화상통화는 누가 나에게 한 적도 없고, 걸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오라버니 저 보여요?"
"어! 잘 보여...야~~ 이거 좋은데...하하"
"거봐요! 그리고 여기가 제 집이예요...자아~~소개 들어갑니다~~"
폰을 들고 움직이며 집의 구석구석 까지 모두 비춰주는지 방의 한쪽 부터 시작해서 모든것이 화면에 고스란히 보여진다.
은지와의 화상대화 때 보다 훨씬 선명하고 자연스럽다.
"혼자 사는거 맞아?"
"보시다 시피요"
"되게 넓은거 같은데?"
소영의 집은 집이라기 보단 오피스텔 인듯 싶었다.
방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한 켠에 침대가 있고, 침대옆 벽은 책장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곁에 쇼파,
그리고 주방과 식탁이 보였는데, 폰을 통해 봐서 그런지 넓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녜요. 여기 18평인데 뭐...폰으로 봐서 그런거 아닌가? 뭐...혼자 쓰기엔 넓다고 할 수도 있긴 하겠다."
"근데...예쁘게 잘 꾸며 놨다."
소영이도 아무래도 혼자 사는 여인의 집이라 그런지, 전문직 직업을 가진 TV 여주인공의 집처럼 심플하면서도 고상해 보였다.
"근데 오라버니? 휴대폰을 좀 멀리 해야지! 그렇게 가까이 대니까 눈하고 코만 보이잖아요?"
"아하! 그래? 오케이..."
"그래요! 그렇게...이제 잘 보인다!"
"식사는?"
"했어요! 오라버닌?"
"나? 이거!"
말을 하면서 폰으로 빵과 우유를 보여줬다.
"그게 모야? 그만하고 식사 해요! 그건 간식이지?"
"알아! 좀 있다 하려구! 걱정 마~~"
"식사 할때 인증샷 찍어 보내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무슨?? 하여간 알았어!"
"근데 그 옷은 뭐야? 큭큭! 귀엽네..."
소영이 입고 있는건 파랑색의 짧은 원피스 형태인데, 어떤 동물인건지?
하여간 눈이 왕방울 만한 캐릭터가 앞면 전체에 인쇄되어 있는,
반팔도 아니고 뭐랄까 7부 반팔쯤 되는 라운드넥으로 되어 있는 원피스다.
"이거 귀엽죠? 잠옷이예요. 집에 와서 씻고 나면 이것만 입고 자요! 엄청 편하거든요"
"속옷은?"
"속옷? 안 입는데..."
"무슨 여자가 속옷을 안 입고 자냐?"
"엥? 귀찮게 뭐하러 입어요.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요즘은 많이들 안입는데..."
"여자도 벗고 자나??"
"벗고 자는게 아니라 이거 입고 잔다니까?"
잠옷이던 입었어도 아내 같은 경우엔 속옷을 꼭 입고 자는 편이라, 안 입고 잔다는 것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자! 맞죠?"
소영은 순간 몸을 뒤로 돌리는 듯 하더니 잠옷 치맛자락을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살짝 올렸다가 내린다.
"뭐...뭐야?"
"큭큭큭큭...좋았지? 오라버니...큭큭...나 때문에 못 주무시는거 아냐?...큭큭"
뭐가 재밌는지 허리까지 숙여가며 혼자 깔깔 거리며 한참을 웃는다.
나로 인해 웃는 소영의 모습도, 그러한 소영의 모습을 보는 나도, 서로를 웃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게만 느껴진다.
침실에서 자고 있던 문이사의 아내가 별안간 나타나면 어떡하나 싶어, 주방을 등지고 앉아 통화를 하는데도 다소 신경이 쓰인다.
별 내용도 아님에도 우린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럼 일찍 자야겠구나?"
"네! 아무래도 내일 전체 리허설이라...일찍 나가야 해요!"
"그래 그럼! 서울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일찍 자~"
"아~함! 졸려요...후후"
"아 참! 약은 사서 발랐어?"
"네~~ 치질도 없는데 붓고 아프다고 했더니 치질연고를 주길래 사서 발랐어요. 붓기도 빠졌고, 이젠 안 아파요!"
"괜히 미안하네..."
"아녜요! 미안하긴...오라버니도 제 생각 하면서 주무세요...다시 연락 드릴께요"
화상통화란 것이 앞에 두고 얘기하는 거 같은게 생각보다 화질도 좋았다.
더구나 그 상대가 소영이어서 아마 더 좋게 느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남은 빵을 더 먹으며 영화를 두 세편은 족히 본 거 같다.
벌써 새벽 두시가 넘었는데도 문이사의 아내는 깨어날 기색이 없다.
'화장실도 안가나? 아유 나도 졸리다...모르겠다'
오랫만에 TV도 너무 오래 본데다, 허기도 대충 해결하고 나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제와는 달리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던지 몇 번을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거실이 환해 질 때쯤 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직도 자고 있다.
벌써 스무시간이 넘게 잠들어 있는 것이다.
약간 엎어지듯 옆으로 누운 자세로 이불을 가랑이에 낀채 한 쪽 다리를 드러낸채 잠들어 있는데,
오픈된 한 쪽 엉덩이가 속옷이 없다보니 항문과 함께 드러나 있다.
'요즘 여자들은 속옷을 안 입고 자는게 유행인가 보네...정말 소영이만 그런게 아니구만...'
아직까지는 다소 어둡긴 하지만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원래의 윤기를 찾은 듯 뽀얀 피부가 되살아 나 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다 보니 식사 준비를 해 놓는게 나을 듯 싶어 아침 식사를 준비했지만, 그녀는 정오가 되어서 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띠리리링,띠리리링"
"아이고 친구야! 니가 왠일이냐? 휴일은 잘 쉬고?"
"그럼...나야 별일없지? 너는 어때? 니 가족은 올 겨울에도 안 들어오냐?"
"어? 어~ 그럼...들어오면 뭐해? 다시 나가야 되는걸!"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번을 안들어 오냐? 에이그...벌써 한 이년 됐지?"
"어!...근데 왠일로 전화를 다 했냐?"
"아...참! 이번 연말에 특별한거 없으면 동문회 좀 나오라구!"
"동문회? 웬 동문회?"
"우리도 나이가 들긴 들은 모양이더라! 내가 다음년도 우리 동문회 회장 됐다!"
"하...그래? 하여간 축하한다!"
"축하는 와서하고... 원래 연말에 이취임식 겸 해서 해 왔는데, 이번엔 규모를 좀 크게 하더라구"
"나야 뭐...안나간지 오래됐는데...이제와서 뭘 가냐? 귀찮기도 하고..."
"알아 마! 진숙이도 너 보고 싶다고 하고, 이렇게 라도 안보면 우리가 언제 또 보겠냐?"
그나마 학교 다닐때도 나랑 제일 친했고, 지금까지도 안부 전화를 가끔 하는 최은호라는 소실적 친구다.
이 녀석이 이번에 초등학교 동문회 회장이 된 모양이다.
동문회는 둘째치고 동창회도 나가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사실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의 부탁도 있고,
나 역시도 이번 겨울 만큼은 적극적으로 해보자 하는 마음에 가겠노라 약속을 했다.
더구나 장소도 우리집 근처에 있는 호텔이라 가까워, 잠시 다녀오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문이사의 아내가 깨어난건 잠이 든지 거의 만 하루가 다 되어서인 오후 두시가 넘어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왠일인지 일어나서는 곧바로 화장실 만을 들른체 식사하라는 권유조차 거절하곤 집으로 간다며 총총히 가버리는 것이다.
의아했던건 나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고, 더구나 짧은 대답외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신경쓰였던 나는 가줘서 고맙긴 했지만, 막상 그렇게 휑하니 가버리고 나니,
내가 뭘 잘못한게 있나 싶어 괜히 마음만 무거워 진 것도 사실이었고,
그녀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까지 돌봐준 셈인데, 형식적인 고맙다는 말만 남긴채 훌쩍 가버리고 나니 살짝 빈정이 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연휴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했을때, 문이사는 여전히 출근하지 않았고, 뜻밖에도 사장이 나를 불렀다.
뭔 얘기를 하려는지 한 참을 뜸을 들이고서도 결국은 하려던 말을 못하는 사장이었다.
함께 일한지가 벌써 20년인데 내가 그의 표정을 모를리 없었다.
"왜? 무슨얘기 하려고 했던건데?"
"아냐~~ 다음에 할께..."
"형! 뭔데? 내 얘기야?"
일을 시작할 때부터 형 동생으로 시작했던 터라, 사적인 얘기를 나눌때는 이렇듯 반말로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다만 회사 조직이 확대되고 직원들이 늘고 나서 부터는,아무래도 사적인 얘기를 나눌 기회가 줄어든 거 뿐이었다.
하려던 얘기를 못 하는 걸로 봐서는, 혹시 내 얘기가 아닌가 싶어, 말을 돌리지 않고 직접 물은 것이었다.
"아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해~. 니 얘기 아냐! 하여간 다음에 얘기하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표정이 심각한 것이 말 못할 고민이 무엇인지 궁금해 졌다.
"뭔 일인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 보고...그럼 나중에라도 얘기하던가?"
"그래...좀 만 더 알아보고...그 때 얘기할께..."
"그럼 전 갑니다! 사장님!!!"
올해는 유독 나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까지도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오랜 시간동안 안에서 곪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염증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동안 안 보였던 것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이제서야 내 눈에도 보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항상 힘없고 없이 사는 사람들만 더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도,어쩌면 지나친 편견이 아니었나 싶다.
소영인 국제회의가 시작되고 나서 부터는 밤에만 잠깐 잠깐 얼굴을 보며 통화를 하게 됐고,
은지도 하나 하나 작은일 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톡으로 알려주곤 하고 있었다.
휴일이 길었던 데다,이젠 며칠 후면 해가 바뀌다 보니,
그 동안 미뤄뒀던 회사일을 정리하느라 평소 보다는 시간이 훨씬 빨리 지나갔다.
"부장님! 사장님께 한번 여쭤봐야 되는거 아닐까요? 아직 퇴근 전이시던데..."
"뭘?"
"문이사요! 오늘은 나온다고 했다는데, 오늘도 안 나왔다는데요?"
"그래?"
화요일에 늦은 퇴근을 하려는데, 직원들 눈치를 보며 김과장이 다가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야 김과장! 근데 문이사가 뭐냐? 회사에서..."
"그거야 뭐...헤헤...근데 진짜 무슨일 있는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느낌이..."
"뭐가 그렇게 궁금한게 많냐? 어? 그냥 본인 일이나 잘 하세요~~"
"아뇨~ 힘은 있는데로 주고 다니더니만, 연락도 안하고 며칠씩이나 회사를 안나온다는게 말이 되요? 더구나 연말인데..."
"그래서 어쩌라구? 나보고 가서 사장님께 물어보라고?"
"네~! 혹시 알아요! 이 기회에 확! 짜르실지?"
"이런...말 따구 하구는...너도 녹을 먹으면서 짜른다는 소리가 쉽게 나오냐?"
"솔직히 싸가지 맞잖아요! 잘난척만 졸라 해대고, 직원들도 그 인간 좋아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
"오죽하면 지가 데려온 윤팀장까지 그 인간을 디스하겠어요"
"윤팀장까지?"
불과 며칠 이긴 했지만, 아직도 출근을 안했다면, 뭔 일인지는 몰라도 사단이 나긴 난 모양이다.
김과장의 얘기를 듣다 보니까 문이사 아내가 문득 생각이 났다.
홀연히 가버린 것도 이상했지만, 그것보다 아직도 안들어 왔다면, 나에게 전화가 왔어야 하는데,
그날 이후 아무 연락도 없는것이 조금은 불안해 지는 것이다.
'아니겠지...누구랑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연락이 없겠지...아니면 따로 연락을 받았거나...'
불안한 생각이 드는건 맞지만, 애써 내 뱉진 않았다.
나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말대로 된다는 어릴적 어르신들의 얘기를 난 아직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동문회에 가는 날이었기에, 아침 부터 평소와 달리 옷차림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동문회이다 보니, 굳이 없어 보이거나 기러기를 티 낼 필요는 없는거 같고,
더구나 친구가 회장이 됐다는데, 쪽팔리게 입고 갈 수도 없었다.
구두는 회사에서 출발하기 전에 닦자고 마음먹고는,
검은색 양복과 연회색 와이셔츠 그리고 보일듯 말듯한 작은 물방울 무늬가 있는 빨간색 넥타이를 매곤 출근을 했다.
"와우 부장님! 오늘 데이트라도 있으세요? 아님 사모님 오시는 날인가?"
"연말 음악회 가시는 거 아니세요? 멋진데요?"
직원들이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며 좋은 평을 하는 걸 보니, 그나마 선택을 잘 한 듯 싶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워낙 이런 모임에 참석을 안 해 버릇하다 보니, 시간이 가까워 질수록 긴장이 되는게,
나도 모르게 갈까 말까를 고민하게 된다.
"부장님! 화이팅!"
김과장이 엄지 손가락을 펼치며 잘 다녀오라며 격려를 해 준 덕에, 다시 용기를 내 보기는 하는데,
가는 내내 어찌나 조바심이 나는지, 호텔까지 가지 못하곤 인근에서 내려 마음도 달랠겸 걸어 가기로 했다.
호텔 입구에 도착할 즈음, 낯 익은 얼굴이 호텔에 들어서는 것을 보게 된다.
"어? 서이사?..."
호텔이라는 것이 요즘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가족 동반으로 식사를 하거나 패키지 이벤트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은 곳이다 보니,
괜히 아는 척을 해서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서이사 부부는 로비를 통해 이미 사라졌고, 로비 입구에는 누가봐도 알만큼 커다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서 쉽게 동문회장을 찾을 수 있었다.
"어~~ 여기! 영식아! 여기야 여기!"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은호가 손을 흔들며 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이 보인다.
은호는 짙은 재색의 정장을 입었는데 어깨부터 가로지르는 신임 동문회장 이란 글씨가 씌인 티를 두르고, 가슴엔 꽃을 꽂은채 아내 진숙이와 함께 나를 맞아 주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왔구나? 곧 이취임식 할거야!"
"그래? 다행이다! 그리고 제수씨 오랜만예요?"
"오빠도 잘 지내시죠? 너무 오랜만이다! 언니하고 은지는 잘 지내요?"
"그럼요...덕분에..."
진숙은 우리하곤 6년 차이가 나는 초등학교 후배다.
당연히 나나 은호가 학교를 다닐땐 그녀를 알고 있지 못했다.
은호가 직장 생활을 시작 할 무렵 쯤, 동창회장이 되면서 동문회 일도 함께 거들었던 모양인데,
그때 동문회에 참석 했다가 이제 갓 스무 한살이 된 그녀를 만났고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내가 제대를 할 무렵쯤 소개를 시켜준다며 면회를 함께 왔는데,
그 때가 둘이 사귄지 한 일년 남짓였을까,하지만 내가 본 그녀의 첫 모습은 배가 봉긋하게 나온 상태였다.
은호 처는 한 십여년 만에 만난거 같은데, 40대 중반으로 가는 여자 답지 않게 피부도 좋아 보이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전에 봤을 때 보다 더 젊어진거 같은데요?"
"이런 자식! 별 소릴 다하네..."
"진짜야 마!..."
"고마워요~~"
은호는 자신 주변의 동창이며 선 후배를 소개 시켜주는데,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인지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대엔 동문회와 특히 회장의 이취임식을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고, 동문회 간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 앉아 있는 모습이 무슨 국회의원 경선장을 연상케 했다.
연회장은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원형 테이블이 줄지어 있고, 그 사이에 음식이 갖춰진 테이블이 다시 줄을 맞춰 늘어져 있어서,원하는 음식 테이블로 옮겨 식사를 가져다 먹거나,
웨이트리스 들이 들고 다니며 권하는 작은 쟁반에 담긴 술을 한 잔씩 들어 마시면서 오랬만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수 있었다.
취임식이 끝나자 은호 내외는 인사를 하느라 바뻤고, 난 이 곳 저 곳을 두리번 거리며, 사람들 보단 음식 구경을 하고 있었다.
"오빠?"
"네? 누구...??"
"저 기억 안 나세요? 은영이요! 이은영!"
"글쎄...미안한데...기억이..."
30대 중반? 아니면 30대 후반쯤 될까?
짧지 않은 커트머리를 하고 키가 큰데다, 특히 가슴이 커서인지 앞이 파인 검정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가슴골이 훤히 보인다.
자신을 소개하며 아는 척을 하는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너무 오래되서 그런가? 저 문방구집 막내딸요? 언니가 오빠랑 동창인데! 기억 안나세요?"
"문방구 집이면...아! 그래! 생각난다! 아아~ 니가 이렇게 컷냐? 그 땐 쬐끄만게 귀여웠는데..."
"오빠! 그때가 언젠대? 키는 진작에 컸지! 근데 오빠는 그대로다.
아까 은호오빠하고 얘기할때 봤거든요. 혹시나 했는데, 오빠가 알려주더라구. 한참 찾았잖아요."
"그랬구나? 나야 뭐 도통 사람들을 모르겠어서...그나저나 아저씨하고 아주머니는?"
"몇 년전에 두 분다 돌아가셨어요."
"음...그랬구나! 우리 부모님도 그랬으니 뭐...그럼 언니는 같이 왔어? 언니 이름이 뭐였지?"
"수영이요! 근데 언니도 작년에 사고로..."
"어? 아니 왜?"
차로 출퇴근을 했던 모양인데, 퇴근길에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사실 동창인 수영이 보다, 나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은영이는 쬐끄만 것이 하도 졸졸 따라다녀서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다.
더구나 국민학교 근처 중학교를 다닐때 까지도 은영이네 문방구를 이용했던 터라,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랬구나...이런...그러고 보니 이제 우리 나이도 슬슬 준비 할 때가 돼 가긴 하나보다!"
"무슨 그런말을...아직 젊어요! 이제 시작이지 뭐..."
"그래 남편하고 애들은?"
"큰애는 내년에 중3이고 작은애는 이제 중학교 가요.큰 애가 딸, 둘째가 아들"
"그~래? 한참 신경 쓸 때구나? 남편은 뭐하고?"
"혼자예요! 이혼 했거든요! 언니 죽던해에..."
어느순간 멈춰버린 기억들을 되찾을까 싶어 나온 동문회인데, 안타까운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제 불과 반백년을 살아 왔을 뿐인데, 동창 중에서도 사고나 병으로 인해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저세상 사람이 됐으며,
이혼을 해서 혼자 살거나, 재혼을 한 친구들의 소식도 간간히 듣게 된다.
물론 유명세를 타거나 사업이 번창해서 잘 나가는 친구들의 소식도 듣긴 했지만,
대부분은 현실의 무게감을 그대로 떠안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는 아이들 때문에 곧 가야한다며, 은영은 행사장을 빠져 나갔다.
배나 좀 채우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홀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는데 평소 못 보던 음식들도 많다보니 나름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새로운 음식을 찾아 테이블을 돌다가 먹음직 스럽게 보이는 음식을 조금 담아,
남자 셋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빈자리에,살며시 앉고는 가져온 음식을 맛보려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얘들아? 쟤야 쟤!"
"누구? 누구?"
"저기 쟤! 오른쪽 제일 끝에 있는..."
"아~~ 몸매도 좋고,예쁜데?"
"얼굴 값 하는거지...씨발년! 아...씨발 나도 함 먹어봐야 되는데..."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내가 얘기 했잖아? 저년이 보기엔 조신해 보이는데, 속으로는 졸라 까진 년이라니까..."
"진짜야?"
"야! 너 은혁이하고 진수 알지? 그 삐리 같은 새끼들도 저 년이랑 잤다니까..."
"진짜? 참 내 ...그야 뭐...그 새끼들 지금은 잘 나가는 새끼들이잖아!"
"잘 나가긴? 잘 나가면 빠구리도 잘 한다냐?"
"아...씨바...니 얘기 듣고 보니까 나도 먹고 싶다..."
"저년 오늘 우리가 따 먹을까? 씨발 먹히고 나면 졸라 좋아할거야 아마!"
"어떻게? 뭐 좋은 계획이라도 있냐?"
"그럼...오늘 저 년이 타켓이다!.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이 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학교 동문일 것이었다. 같이 왔다고 해야 가족 일 것이었고, 그렇다면 이 녀석들도 동문일 터이다.
글쎄 나이는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싶은 녀석들인데, 무슨 고딩들 이야기 하듯 하는걸 보니, 손발이 좀 맞았던 동창들인 모양이었다.
누구를 저렇게 씹어대나 하는 호기심에 그녀석 들이 가리킨 곳을 슬쩍 보게 된다.
그들이 얘기한 곳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미간이 찌푸려 지면서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이 튀어 나올 뻔했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같으니라구!'
그들이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서이사와 그의 와이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