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위직 공무원 고관
그래서 이 이야기 중에서 가장 먼저 알아봐야할 인물이 ‘고관’이 되었다. 물론 ‘고관’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구석구석에서 아주 긴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관은 ‘ㄱ시’에 위치한 청사의 ‘ㅂ부’의 주무 국장으로 보건과 질병 관련 업무에 관한 한 최고의 결정에 관여하는 고위공직자이다.
그래서 이름도 ‘고관’이다.
‘고관’은 당연하게도 ‘고시’출신이다.
그는 ‘최고 대학’을 나온데다가, 아버지 ‘고 장군’의 덕으로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다.
고시 합격 후 사무관을 얼마 지내지도 않았는데, 서기관이 되었고, 서기관이 되자마자 주무부서의 과장을 꿰찼으며, 부이사관, 이사관을 거쳐 ‘관리관’이 되었다. 거기에는 ‘최고 대학’의 ‘학맥’과 아버지 고 장군을 통한 ‘인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다.
‘고 장군’은 군사정권 시절 득세한 인물이다.
그가 속해 있었던 공군 뿐 아니라 군대에서라면 육군, 해군에서도 그의 존재를 인정해 줬다.
사실, 그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대접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왜냐하면 그는 김 상사가 관장하는 ‘해동청’의 ‘실세 수장’이기 때문이다.
고 장군의 의견이나 요청을 무시한 자들은 수일 내로 엄청난, 그러나 말을 꺼내지도 못할 협박과 린치를 받았다.
협박의 하수인들은 대부분 김 상사의 지시로 움직였는데, 이들은 김 상사 수하의 무술 고수로서 북파공작원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특기는 남의 집 흔적 없이 숨어들어가기, 각종 도청 장비 설치하기, 도촬이나 심지어 전화를 통해서도 통화 내용을 알아내는 재주를 가졌다.
그것은 본래 북파 공작원들이 평양의 김일성 저택에 숨어들어가 각종 정보를 빼내기 위해 다양한 훈련을 받았는데, 고 장군은 그들의 이런 특기를 활용하여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을 처단하는데 절대적인 무기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본래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특공무술’로 길러진 ‘인간 병기’이기 때문에, 총검을 다루는데 능숙하였을 뿐 아니라, 단검을 던지는 것 등 일종의 암기를 사용하는 데에도 귀신같은 녀석들이었고, 맨손의 육탄 공격에는 당연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대부분 이들은 초창기 헌원기공의 후계자였던 정현의 제자들이었으나, 후일 김상사의 꼬드김에 의해 무예를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길로 나선 타락자이며, 배신자들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고 사람 하나 골로 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게다가 이들은 시체를 소형 트럭이나 승합차에 싣고 와 실미도 같은 서해의 무인도에 묻어 버리면 절대로, 아무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서해의 무인도 등은 <공군20특무전대>에서 관할하므로 이들의 허락이 없으면 섬에 상륙하는 것도 어려웠다.
실제로 이 무인도에는 일반인들이 불법으로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접근금지> 팻말과 함께 <불법 상륙 시 발포함>이란 커다란 두 개의 팻말과 함께 각각 그 밑에 <공군20특무전대 부대장>의 명의와 시뻘건 도장이 콱 박혀 있어서 호기심 때문에 일반인들이나 어부들이 이 섬들에 상륙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군대의 요직에 있던 인물들은 고 장군과 척지고 사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들은 한국전쟁 때부터 고 장군이 매우 특이한 인물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고 장군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그만큼의 지위가 올라간 장성들이 뒤를 캐면 한 가지 이상의 구린 부분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고 장군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고 장군은 특이하게도 <공군 20특무전대>를 떠나려고 하질 않았다.
정권의 최상부에서는 그에게 그보다 더 높은 직위를 준다고 하여도 그는 몸을 사리고 <공군 20특무전대>의 부대장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군사 정권의 최상부에서 그를 불러 공군본부 전체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발령을 내주겠다고 하였지만, 그는 몸을 사리며 수도권 외곽의 특무전대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런 그의 태도는 당연히 군사정권 최고 윗선에서 매우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놈이 공군참모총장이나, 사령관을 시켜준다 하는데, 마다하고 기껏 부대장으로 만족할 위인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고 장군이란 놈이 청렴하고나, 혹은 겸손해서 그런 고위직을 마다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공군 20특무전대> 부대장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호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비밀조직 ‘해동청’의 ‘통령(統領)’ 자리였다.
고 장군은 정권 최고 윗선에서 승진을 시켜준다는 언질이 있을 때마다 <공군 20 특무전대>의 활동 영역을 조금씩 넓혔으니, 이로 인해 기존의 북파공작을 담당하는 일을 확장시킬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북파를 위한 각종 정보의 수집과 활용을 하는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이런 정보 수집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그가 비밀을 알고자 하면 그 대상은 - 심지어 국회의원이나 장관급의 정부 요인들조차 -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후일 거의 1980년대에 <국군보안사령부>란 조직이 별도로 만들어지면서, 모든 군사 첩보, 정보활동이 통합되지만, 한국동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는 미군 켈로 부대가 철수하고 그 직무활동을 인계해 준 <공군 20 특무전대>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였던 것이다.
<공군 20 특무전대>는 대북정보활동을 하던 <23 첩보대>, <25 첩보대>와 국내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26 특수수사대>로 구성되었는데, 이 <공군 20특무전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는 예하 부대 중의 하나였던 <26 특수수사대>가 당시에는 보통 로 알려져 보통 사람들은 이 조직이 특무전대의 예하부대가 아니라, 아예 공군을 대표하는 정보기관인 <공군특수수사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나라를 움직이는 대통령의 권력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이 첩보, 정보부대장이며, 비선조직 ‘해동청’을 이끄는 ‘통령’이라 할 수 있다.
딱 한 가지 약점이라면 이들은 철저히 음지에서 움직이고 일한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또한 실제로 군사 정권의 실세들 쳐놓고 고 장군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지역구에서 투표를 할 때마다 고 장군의 수족들이 선거 지역에서 행한 각종 협박과 린치, 흑색선전 등의 술수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자가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선(大選)에서도 이들의 비선조직이 작용하여 군사정권에 유리하도록 공갈과 협박 등을 동원하여 선거에 개입하였으나, 이들의 행색이 워낙 비밀리에 움직이기에 어떤 비리의 꼬투리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군사 정권의 최상윗선에서도 그를 비호하고 두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약삭빠른 고 장군은 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
이들은 비선 조직의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꼬투리를 잡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의 행적을 꼬투리 잡기가 힘들었던 것은 만약 누구에게라도 꼬투리를 집한 놈은 그 자리에서 죽든지, 아니면 조직에 돌아와서 병신이 되도록 얻어터지든지 둘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보통의 수사나 첩보 활동으로는 비선조직, 해동청에 속한 인물들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고관은 이런 아버지 고 장군의 배경을 잘 이용하였다.
당연히 고 장군을 잘 아는 장성 출신들이 ‘ㅂ부’의 장관으로 오면 제일 먼저 그를 불러 ‘ㅂ부’의 상황을 파악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사람의 말보다 고관의 말이 씨알이 먹혔고, 나름대로 최고 대학을 나온 놈이라 계산에는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남들이 가는 길보다 더 빠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관이 주무부서의 ‘국장’이 되자 현업에 쪼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의 사무실 옆에는 전담 여비서를 두게 되었는데, 현업에 관해 필요한 것은 여비서가 다 알아서 처리하도록 맡겨 두었다.
또한 주무 과장들을 모두 최고 대학 후배들로 채워 인맥을 탄탄하게 구성해 놓고 무슨 보건이나, 무슨 건강 정책이니, 무슨 의료 자원이니 이런 일들은 주무 과장들이 잘 처리하게 만들었으므로 그는 눈치껏 그냥 놀기만 하여도 그가 맡은 부서는 저절로 굴러 갔다.
고관은 그래도 마냥 놀 수만은 없으니, 아침에 출근하여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나가 돌아 다녔다.
그런데 그가 요즘 한 가지 재미를 붙인 것은 신문이나 잡지에 야릇한 기사가 나온 것을 보면서,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고위직 국장으로 국민들 사이에 '민원사항'이 발생하면 그걸 우선적으로 파악하고 처리해 주어야 마땅하므로, 그는 언제나 그런 사건에 관심을 갖고 내막을 알아내어 피해자가 없도록 조처하였지만, 그가 관심을 갖는 ‘사건’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예를 들면, 부산매일 19xx년 9월 20일 보도를 보면 제목이 “어떻게 아버지가 친딸을 --”이란 제목으로 선정적인 기사가 상세히 나와 있다.
당시의 지방신문들은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지금도 별반 차이는 없지만) 거의 소설에 가까운 기사를 내보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었다.
그래서 고관은 이런 기사에 관심을 갖긴 하였지만 ‘사실 확인’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직위와 인맥을 이용해서 기사의 내용과 사건의 사실 여부 및 후속조치 등에 대해 상세히 묻고 어떨 땐 사건을 재구성해 보기까지 하는 인물이었다.
참고로 위의 기사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중간 제목은 “도덕성 회복이 시급하다”로 “자매 번갈아 8년 동안 성폭행, 반인륜적인 범죄로 사회 기강 흐려-”가 발문(跋文)으로 뽑혀 있다.
그러나 뭐 ‘한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이 시급하기는 어제 오늘 이야기도 아니고, 이미 동란 통에 도덕이고 나발이고 다 뭉개지고, 날이 가면 갈수록 ‘성적 문란(性的 紊亂)’은 폭력적, 개방적, 공개적이 되어 가고 있는 판이라 사실 이 기사도 ‘도덕성’ 때문에 기사를 쓴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선정적인 내용을 써 갈기느냐?’ 그래서 ‘신문을 얼마나 더 팔아 먹냐?’ 이것 때문에 기사를 썼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고관은 이 기사를 보면서 ‘자식들 그런 것 가지고 뭘 그래 -- ’ 이렇게 홀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고관이 신문 기사에서 본 사건의 내용은 <최근 울산 동구 지역에 아버지가 친 딸 자매를 번갈아가며 8년 동안이나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지 5시간 만에 다시 둘째 딸을 성폭행하여 딸의 신고로 아버지가 구속되는 근친상간 범죄가 발생하였다.>는 것이 사건의 요지였다.
계속하여 이 신문 기사는 <울산 동부경찰서의 사건 기록에 따르면 전모씨(41. 무직. 동구)는 지난 x8년 12월,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경남 거제군 거제면 사정리 모 건재상 숙소에 찾아 온 큰 딸(현 19세) 전모 양(당시 12세)을 성폭행 한 뒤, 지난 x6년 8월까지 한 달에 4∼5차례 강간을 일삼아 왔다는 것이다. 또 전씨는 위와 같은 장소에서 둘째 딸 전모 양(현 15세)을 x2년(당시 12세)부터 4년에 걸쳐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 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9일까지 평균 하루에 한 번씩 성폭행한 것으로 밝혀져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게다가 큰 딸은 이 일로 인해 벌써 두 번이나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으며, 작은 딸도 현재 임신하여 중절 수술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관은 생각하기를 <8년이나 부녀간에 성관계를 가져왔다면 이는 ‘부녀간에 위압에 의한’ ‘근친강간’이라고 보기 어렵고, 이런 경우는 대부분 어쩌다 남에게 들켜버려 하는 수 없이 ‘강간’이라고 둘러 댄 것이지, 실제로는 부녀간에 짝짜꿍이 맞는 ‘화간’>이라고 보는 게 그의 관점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요즘 12살이면 알 건 다 아는 나이이다.
요즘 술집에 국민학교 고학년짜리 접대부가 생겼다는 기사도 나오는데, 그런 나이에 아버지가 근무하는 건재상 숙소에 찾아왔다는 것은 기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울산 동구’에서 멀리 ‘거제’까지 찾아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아버지란 작자는 건재상 숙소에서 야근하면서 밤에는 자재도 지키고, 낮엔 건재상 점원으로 물건도 파는 일을 하는 놈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밤엔 숙직실에서 야방을 돌면서 혼자 잘 것이 뻔하다.
시골이든, 도시든 건재상은 어디라도 인가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기 마련이다.
본래 건재상이란 목재를 비롯하여 모래니 시멘트 등을 비롯하여 플라스틱 파이프 등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물건들을 쌓아 두기 때문에 외진 곳에 자리 잡기 마련이므로 밤에 야방은 필수이다.
이런 곳에 큰딸이 12살부터 ‘8년’ 동안 ‘지속적’으로 찾아왔다는 것은, 특히 <한 달에 4∼5차례 강간을 일삼아 왔다>는 진술은 곧 이 딸이 주말마다 ‘아빠를 찾아와 섹스를 나눈 것’으로 밖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근친 강간’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당연히 서로 즐기는 ‘화간’이라고 봐야 한다.
게다가 무려 ‘8년’이라면, 더욱이 그 동안 ‘두 번’의 ‘임신과 낙태’도 있었다면 -- 적어도 ‘강간’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다.
단지 아직 큰 딸이 십대이고, 근친상간은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일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므로, 여기서 큰 딸이 고소만 하지 않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딸'이 아닌 <작은 딸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특기할 사항은 둘째 딸이 <열두 살 때부터 같은 장소에서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기록을 분석해 본다면, 이들의 본래 주소지가 울산시 동구란 점을 감안해 볼 때, 언니인 첫째 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생인 둘째를 데리고 아빠가 근무하는 경남 거제로 놀러(?) 갔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열두 살부터 아빠와 섹스를 해왔던 '큰 딸'이 자기 '동생'이 자기가 처음 당한 나이인 열두 살이 되었는데, 이제 자기의 그 때 나이와 똑같은 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 고관의 생각이다.
게다가 큰 딸은 열아홉의 나이에 이미 두 번에 걸쳐 임신을 하고 낙태 수술을 했다는 건데, 낙태 수술에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할 터인즉, 그 비용은 누가 어떻게 감당했단 말인가? 십대의 학교 다니는 소녀가 그런 큰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그녀를 임신 시킨 아버지가 그 비용을 대고, 병원에도 ‘보호자’로 동행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의사가 그런 아빠를 보고 ‘누구에게?’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모르는 사람에게 강간당한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그러면 왜 작은 딸이 경찰에 신고를 했는가?
전씨(41세)란 놈은 아무것도 몰라서 <경찰에 긴급 구속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지 5시간 만에 다시 둘째 딸을 성폭행하여 딸의 신고로 아버지가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재구성해봐야 한다는 것이 고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관은 이런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어 울산 동구 경찰청으로 전활 걸었다.
마침, 동구 경찰청장이 최고대학 출신이어서 그 다음날 사건 담당 형사로부터 사건의 진짜 개요를 상세하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담당 형사 이야기로는 이 사건의 뒤엔 두 딸의 엄마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담당 형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사건 이야기를 얼마나 장황하고 재미있게 해주는지, 고관은 전화기를 하기를 든 채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게 되었다. 그 중에는 고관이 듣기에도 형사 이야기는 허풍과 과장이 상당부분 섞여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들어줄만 했던 것이다.
“마, 그 딸년들은 쬐맨할 때부터 --- 지 아빠란 놈카 붕가붕가 안 했능교 -- ”
담당 형사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써가면서 고관에게 상세한 현장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인즉슨 울산 동구에서 살고 있는 전모양의 엄마인 김 여인(46세)은 현재 화장품 가게 점원으로 얼굴이 반반한 미인 타입인데, 남자보다 여자가 연상인 부부라는 것이었다.
전모씨는 지금 41세로, 19세의 딸을 두었으니 22세란 젊은 나이에 결혼한 셈이다.
그건 순전히 이웃집 누나인 김모양(당시 27세, 현 부인)의 꼬드김에 빠져 그녀와 날마다 육체의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어느날 이 누나란 년이 임신하여 아기를 가졌으니 어떡하냐?
이제 우리 결혼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날마다 집을 찾아와 졸라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5살이나 연상인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젊을 땐 잘 몰랐는데, 아기를 낳고 딸들이 차츰 커가자 전모씨는 나이가 들어 점차 육체가 탄력을 잃어가는 부인에 대한 관심이 점차 줄어들어간 반면, 뽀얗게 성장해가는 큰딸이 눈이 들어오더란 것이었다.
게다가 전모란 놈이 다니던 건재상은 본래 울산에 조선소가 설치되면서 한 몫을 톡톡히 봤는데, 이 건재상 사장이란 놈이 거제에 조선소가 설치될 예정이니 거기에 다른 건재상을 하나 더 차려 운영하면 돈을 엄청 벌 것이라고 전모란 놈에게 거제 건재상을 관리하도록 의탁했던 것이었다.
전모란 놈도 울산 건재상에서 백날 천날 일해 봤자 종업원 신세를 못 면할 것이 뻔한데, 거제에서 조선소 짓는 동안 한몫을 보면 독립할 밑천도 생길 것 같아 울산 건재소의 사장과 합의하여 거제에서 건재상 운영의 전권을 달라고 요청하여 초기 자본은 울산 사장이 대고, 운영은 전모씨가 맡아 운영하되 이익금은 반반 나누어 갖는 조건으로 거제에서 건재상 장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 8년 전에 거제 건재상을 열고 거기에서 장사를 하며, 특히 전모씨는 거제 건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야간에는 숙직실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8년 전 어느 날, 하루는 열두 살 먹은 큰 딸이 울산에서 거제까지 전모씨를 찾아와 ‘엄마가 딴 남자를 만난다’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아빠는 배알도 없느냐?’고 따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모씨는 거제에 사업을 벌려 놓고 장사하는 터라 당장 울산까지 찾아가 부인에게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처지라고 큰 딸에게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큰 딸은 ‘아빠, 그럼 내가 위로해 줄게 -’ 하며 그날부터 거제 건재상 숙직실에서 서로의 육체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 큰 딸, 고년은 말입니더--- 제가 봐도 얼매나 이쁜지, 죽여주게 생겼드라구요!-- 국장님!!”
담당 형사는 전화기에 대고 열아홉 된 큰 딸년의 외모를 말하는데, 고관은 구수한 경상도 식 표현을 듣기만 했는데도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형사 놈은 큰 딸년의 첫인상을 이야기 하는데, 얼굴은 완전 고등학생인데 몸매는 애를 낳은 아줌마보다 더 글래머로 얼마나 육감적이었는지 잊혀지지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 번 길이 난 큰 딸은 그 후 매 주마다 휴일만 되면 엄마에게 아빠한테 간다고 말하고 5시간씩 걸리는 울산에서 거제까지 직행 버스를 타고 거제 터미널에 도착하면, 아빠인 전모란 놈이 나와 딸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제로 사용하는 모텔에 같이 들어갔다가 대부분 건재상 한 모퉁이에 마련된 숙직실에서 둘이 같이 껴안고 자다가 그 다음날 늦게 일어나서 빈둥거리며 거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무려 8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는 것이었다.
“마, 그 큰 딸년은 완전 --- 즈그 아버지의 첩이었어요 -- 첩!!!”
형사 놈은 수화기에 대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 했다.
“그라고 -- 그 짝은 년도 --- 아구, 고년도 -- 말하자믄, - 또 첩에 첩이었든 셈이구라! - 그라서 두 딸년들이 모두 다 -- 즈그 아버지 첩 노릇 안했능교 -- 아이 이년들은 완전 썅년들이야!!”
동생과 네 살 터울인 큰 딸은 열여섯 되던 해 겨울, 이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게 된 동생이 “언니, 나도 아빠한테 데려다 줘! 왜 언니만 가는 건데?”이렇게 졸라대자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얻어 동생을 데리고 거제를 함께 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큰 딸년은 동생을 아버지에게 데려가기 전, 먼저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아 그 전 주(前週)에 거제에 내려와 아버지와 대충 이런 상의를 했다는 것이다.
“아빠, 동생이 왜 나만 아빠한테 가느냐고 자꾸 물어요. 자기도 함께 가겠다는 거예요”
“그럼, 데리고 오지 그러냐?”
“아빤, -- 그럼 -- 아빠와 나 사이가 -- 걔한테 들킬 거 아냐요!---그건 난 싫은데 --”
“갸가 --올해 몇 살이니?”
“아빤, 지 딸 나이도 몰라? 올해 국민학교 졸업하잖아요 -- ”
“그럼 너랑 -- 한, 그 때 나이잖아 -- ”
“아빤, 맨날 그 생각만 해! -- 그럼, 아빠가 갸도 나처럼 -- 따먹을려구? -- 이 패륜아빠!”
“야, 갸가 여기 오면 어차피 우리 사이가 들통날 거 아녀? -- 갸가 니 엄마한테 가서 --- 일러바치기 전에 -”
“그럼, 갸가 -- 엄마한테 말하기 전에 아빠가 -- 동생을 따먹는단 말예요---”
“그래야 안전하지 않겠어? -- ”
큰 딸은 작은 딸이 거제에 왔다가 아버지와 큰 딸이 서로 붕가붕가하는 사이란 걸 들키면 울산으로 돌아가서 대번에 엄마한테 고자질할 것이 뻔한 데, 그러면 자기만 골치 아파질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아빠에게 물어 본 것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동생까지 따먹고 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느냐는 대담한 제의가 큰 딸년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해결책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큰 딸은 자기와 아버지와의 불륜적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중간에 작은 딸년마저 같이 붕가붕가하는 사이로 만들어 버리면 동생이 어떻게 하겠느냐? 결국 입을 꼭 다물고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형사는 고관에게 이런 상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고관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 아버지와 큰 딸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갔을 것이란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날, 큰 딸년은 동생의 문제에 대해 대충 마무리를 짓자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정작 큰 딸이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었다.
“근데 --- 아빠, 나 또 애가 들어섰나봐 --- 어쩌면 좋아? --”
큰 딸년은 이제 겨우 고 1인데, 벌써 두 번째로 임신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임신은 중 2때였는데, 그 땐 아빠랑 섹스한 지가 얼마 안되어 덜커덕 애가 들어선 줄도 모르고 있다가 간신히 중절 수술을 하였는데, 이번엔 그동안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임신한 것이었다.
“이년, 몸조심하지 않구 - 어쩔려구 --- ”
“아빤? 내가 얼마나 조심했는데, --- 아빤, 내가 위험일이니깐 보지 안에다는 -- 싸지 말라고 그렇게, 그렇게 애원하구, 애원해도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구선 -- 막 싸 제꼈잖아 ---”
“이년아, 그건 니가 싸도 -- 좋다고 했으니깐 -- 싼 거지 --- ”
“암만, --? 내가 좋다고 했나? 씨 -- 아빠가 그냥 내 말은 안 듣고, -- 그냥 싸지른 거지 ---”
“그래두 그렇지, 니가 니 몸을 조심해야지 -- 내가 어떻게 -- 싸고 싶은 데 -- 안 쌀 수 있냐?”
아빠란 놈은 자기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딸애의 뱃속에 애가 들어선 것이 순전한 딸 탓으로 돌리는 아주 못된 놈이다.
“그럼 나, --- 애를 낳을까? 난 애를 낳아도 좋은데 -- 헤헤 --”
큰 딸년은 철딱서니가 없어도 너무 없다.
전씨란 놈도 딸년이 아기를 낳고 싶다는데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라믄 - 이렇게 하자. 니가 아기 낳는 건 -- 아즉 안 돼니깐 -- 이번 주엔 저번 맹키로 병원 가 알라를 지우기로 하고 --- 니 동생이나 빨리 델꼬 와삐라 -- 어차피 -- 니가 병원 가믄 내가 한동안은 그거 못할 거 아니가 --- ”
전씨란 놈은 큰 딸이 알라를 지우는 중절수술을 받으면 한동안 큰 딸과는 섹스를 나눌 수 없으니 그동안 작은 딸년과 관계를 맺고 싶으니 그러게 조치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큰 딸년은 아빠의 이런 의도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럼 아빠가 나 대신 --- 동생이랑 -- 그거 -- 할라구? ---"
“와? 안되것냐? ---”
아빠란 놈이 큰딸의 눈치를 본다.
아무래도 큰 딸에 이어 동생까지 따먹겠다는 게 말하자면 '본처' 격인 큰딸에게는 조금 미안한 모양이다.
그렇게 되어 큰 딸은 그 다음 주초에 거제 무슨 여성의원에서 아기 지우는 수술받기로 예약을 한 후, 주말에 울산에서 동생을 데리고 아빠가 근무하는 거제에 나타난 것이었다.
바로 그 주말 저녁 전모란 놈은 건재상에서 자재 나르는 소형 트럭을 터미널까지 몰고 나와 두 딸내미를 싣고 해금강 근처의 콘도를 겸한 호텔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열두 살 먹은 작은 딸을 아작 내 버렸다.
큰 딸은 오히려 동생에게 어떻게 하면 쉽게 뚫릴 수 있는지 요령을 알려 주기 위해 먼저 홀딱벗고 시범을 보여 주었다.
작은 딸은 언니의 시범을 충실히 배워 별로 아프지 않게 첫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모란 놈은 두 딸의 처녀를 모두 다 따먹는 행운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 후 둘째 딸은 왜 언니가 주말만 되면 아빠를 찾아 거제로 내려갔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고, 언니와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 하며 남녀의 줄거움을 본격적으로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둘이 함께 거제로 가는 날엔 셋이서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그런 날은 건재상 숙소가 좁아 해금강 인근의 모텔을 이용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들 사이가 들통이 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이일로부터 만 3년이 지나 둘째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가기 전 한달 이상의 방학 기간 동안 거제에서 아빠와 함께 건재상 아르바이트하며 고등학교 학비를 벌겠다고 하여 내려왔던 기간 중 일어난 일이었다.
앞서 보도된 기사를 보면 <전씨는 위와 같은 장소에서 둘째 딸 전모 양(현 15세)을 x2년(당시 12세)부터 4년에 걸쳐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 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9일까지 평균 하루에 한 번씩 성폭행한 것으로 밝혀져 -- >라고 되어 있는데, <4년에 걸쳐 수차례에 걸쳐>란 기사의 내용은 4년 동안 거의 매 주에 한 번씩이므로 한 달에 3∼4차례에 걸쳐 섹스를 나누었다는 표현이 될 것이고, <평균 하루에 한 번씩 성폭행 당한>이란 말은 둘째 전모 양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가기 전 약 한 달 동안 거제에 내려와 아빠와 같이 살면서 밤마다 그 짓을 했으니 하루 평균 한 번씩이란 표현이 전혀 틀린 말이라 하기 어려운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둘째인 동생은 아마 언니처럼 용의주도한 면이 미흡했든지, 그만 한 달 동안 아빠와 함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평균 하루에 한 번씩 성관계를 가졌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덜커덕 애를 밴 것이었다.
큰 딸에게도 생으로 싸는 놈이 작은 딸이라고 조심했을 리 없고, 사전 지식이 부족한 작은 년은 ‘언니도 뭐 그냥 생으로 하는데 뭐 - ’하며 조심하지 않고 생으로 좆물을 받다가 애를 배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 년은 그런 것도 모르고 한 달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여, 아빠로부터 용돈을 두둑히 받고 울산으로 돌아갔는데 그만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객객 -’ 오바이트를 하다가 소리에 깬 엄마한테 들켜 이실직고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엄마란 년은 두 딸이 아빠와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이, 사춘기도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아서 기특하게만 여겼는데, 둘째 딸년이 오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오바이트를 하며 깩깩거리는 것이 너무 수상하여 산부인과에 델꼬 가보니 임신이라면서 후속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에 그만 너무 속상해 둘째를 닥달하여 남자가 누군지 물어보니 아빠라는 것이 아닌가?
엄마란 년은 이 사건을 그냥 두면 안될 것 같아 분명한 증거를 잡기 위해 그 다음날로 둘째를 앞세우고 거제를 찾아가 건재상 주변에 숨어 있다가 아빠란 놈이 둘째 딸년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불시에 들이닥쳐 정황 사진을 찍고, 증거를 확보한 후 바로 경찰에 고발해 버렸던 것이다.
고관은 형사로부터 이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메모장에 사건 정황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긴요하게 써먹을 데가 있을꺼야!’라고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