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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1화 (1/139)



〈 1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1화

태양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 커다란 벽돌이 연결되어 이루어진 바닥과 벽과 천장.
그리고, 인간 세 명, 앞서서 가고 있는 두 여자와 한 남자.
미궁.
익숙한 곳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고통의 여운에 몸서리치며 손을 떨었다.
또다시 죽고 회귀했다.

죽은 순간의 고통, 재생될 때의 고통.
다시 살아나자마자 고통의 기억이 떠올랐다.

*

미궁 공략의 실패는 죽음과 이어진다.
덫에 걸려 죽거나, 몬스터에 죽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함정에 빠져 굶어 죽거나.
형태는 다르지만, 죽는 순간까지 고통이 이어진다.

하지만, 죽음의 고통도 부활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다.
영혼 형태의 내가 세포 단위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져 가루가 되어버린 내가 다시 짓이겨지며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피할 수 없다. 죽을 때 운이 좋으면 의식을 먼저 잃을 수도 있지만, 재생될 때는 아니었다.
영혼에 새기는 고통이 주어졌다.

*

"하아."

나의 숨소리가  귓가에 걸렸다.
수없이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고통의 시간은 끝났지만, 몸에 그 여운이 남았다.

"시발."

앞에 가고 있는  명, 특히 두 명의 여자를 보니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이번에는 좀 더 진행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고 기록인 지하 29층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지하 24층에서 저 바리스년이 죽어버렸다.

"제기랄, 정말 저년들."

저 헤스티는 죽어도 바리스는 죽으면  된다. 그런데, 바리스가 헤스티를 구하다가 죽어버렸다.
나는 반복되는 굴레를 떠올렸다.

*

내가 죽으면 회귀가 일어났다.
지독한 고통을 받고, 지금 이 시점, 미궁 탐험의 극초반 때로 회귀했다.

그런데, 용사인 바리스가 죽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바리스가 죽으면 미궁 전체에 '침식의 물결'이 휘몰아쳤다. 저항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파동이 미궁 전체를 뒤덮었다. 지하 24층은 물론, 지하 1층으로 도망쳐도 피할  없었다.
즉, 바리스가 죽으면 나도 죽었다.

*

"아이 씨발, 짜증 나."

나는 지고 있던 짐을 내던졌다.
5일 치의 식량이 담긴 배낭이 거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회귀 당하면 극초반 파티로 재시작되었다.
탱커 역할을 하는 용사 바리스와 마법사인 헤스티, 그리고 도적인 티릭으로 이루어진 저렙 파티.
그 파티에서 나는 식량 등을 지고 따라다니는 짐꾼이었다.

"준영씨, 무슨 짓이에요?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해요."

앞서서 걷던 헤스티가 고개를돌렸다. 부드럽게 롤한 머리카락이 고갯짓에 찰랑거렸다.
미궁에 들어온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곱고 앳됐다.
헤스티는 예뻤다. 목선을 살짝 감싸고 허리를 넘어 무릎까지 내려오는 개량형 로브는 재질이 두꺼움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를 연상시켰다.
두꺼운 재질인데도 허리가 워낙 가녀리니 오목한 허리선을 만들어냈다. 피부마저 맑고 깨끗해 처음에는 미궁을 모험하는 모험가가 아닌 줄 알았다.
예쁜 얼굴에 끝이 살짝 올라간 입초리는 밉다기보다는 고아해 보였다.

그런 헤스티가 두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노려봤다.
바리스는 딴엔 용사라고 내가 일으킨 소음에 반응하는 마물이 없는지, 주변을 먼저 훑었다.
바리스와 헤스티는 악독하지 않았다.

'차라리, 비정한 년이었으면···.'

미궁이 아니었다면,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좋은 재능에 적당한 심성으로 잘 먹고 잘살았을 년들.
하지만.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 그녀의 심성은 장애물일 뿐이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다가, 죽어버리는 용사는 단지 악몽일 뿐이었다.

저들은 미궁 밖으로 나갈  있지만, 나는 나갈  없다.
그래서, 이때까지 토닥이며 키웠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입술 끝을 구겼다.

"야이, 애송이 새끼들아, 말하면 알아 쳐들으란 말이다."

그녀들이 했던 짓을 떠올리니, 저절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저거.  병신 새끼가 왜 지랄이야."

티릭이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나머지 둘은 나의 폭주에 어리둥절해 했다.
나는 회귀했지만, 이들은 막 탐험을 시작하는 상황. 잠자코 따라오던 짐꾼이 갑자기 멈춰서서 소리 지르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 저거, 처음부터 마음에  들더니만. 야, 무슨 짓이야? 죽고 싶어? 미궁 안에서 사람 하나 사라지는 거, 일도 아니야."
"그래, 너 티릭, 말 잘했다. 여긴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모르지."

시건방진 자식. 시작부터 함께 한 도적, 티릭이다.
중간 넘어가면 오리지날 멤버라고 콧대만 높아지는 놈이다.
파티에 악영향만 끼치는 놈. 전리품을 뒤로 빼돌리는 거 다 알고 있다. 내가 여기서 쌓은사냥 경험이 얼마인데, 총수입을 파악하지 못할까.
그 돈으로 장비라도 산다면 감안해줄 텐데, 유흥비로 탕진하는 놈이다.

비꼬는 내 말에 티릭이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엉성하게 들고 있던 단검을 다시 쥐고, 어깨에 힘을 주고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나뿐만 아니라 헤스티도 단검의 파지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분위기가 완전히 험악해졌다.
헤스티의 롤한 머리카락이 급하게 찰랑거렸다. 처음에는 내게 눈썹을 치켜세웠던 헤스티가 오히려 티릭의 진로를 살짝 막았다.
헤스티, 이년이 하는 짓을 보니 짜증이 울컥거렸다. 여전히 어중간하게 착했다.

"비켜, 저런 놈은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놓아야지. 아니면 우리가 위험해져."

티릭이 자신을 막는 헤스티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너 같은 놈은 초장에 잡았어야 했다. 뭐, 지금은 그럴 인내심이 사라져서 불가하다만은.
바리스도 한발 가까워졌다.

"티릭씨, 침착해요. 미궁이라 광증이 생긴 것일 수도 있어요. 죽이지 말고 그냥 교육만 시키고 철수하죠."

살벌한 대치에 바리스가 나섰다.

"휴···."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바리스야, 바리스야, 너는 왜 그렇게 모질지 못하니. 그러니까, 틈이 생기지.
이럴 때는 그냥 짐꾼을 죽이고 버리는 거야. 시체는 몬스터들이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교육만 하고 철수하자는 말은, 나를 공격하더라도 죽이지 말자는 뜻이었다.
미궁광증이라는 말 역시 나쁜 의도가 아니라,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괜찮아질 테니 버리지 말자는 뜻이었다.

나를 살리려는 것이다.
고작 짐꾼의 목숨 때문에 철수를 언급했다. 아무리  층이라도 어떤 성과도 없이 나가면 물질적인 것이든 명성이든 손해가 생긴다.

"그래, 바리스의 생각이 그렇다면."

티릭이 은혜를 베푼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리스가 실질적인 리더이다 보니 말을 듣는 척했다.

"지랄은."

나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이어, 어깨를 들썩였다.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잘도 뒷일을 얘기한다.
도적과 짐꾼, 승부는 뻔해 보이겠지. 거기다가 티릭은 마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죽여본 놈이다.

나의 시작 클래스는 짐꾼이다. 하지만, 하는 행동에 따라 어떤 클래스로도 전직할 수 있다.
전사는 물론이고, 도적, 마법사, 치료사까지 가능했다. 유일하게 '침식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용사 클래스만은 불가능했다.

"씨발, 이번 판은 포기다."

죽고 부활할 때 가해지는 고통이 두렵지만, 이놈들을 오냐오냐하면서 다시 키울 생각을 하니 열불이 났다. 그것도 이제는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다만,  고통을 앞당길 생각 역시 없었다.

"아, 이 짐꾼 새끼야,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어."

건들거리는 어깨, 아래로 보는 탁한 눈빛. 그리고 이기심이 가득한 얼굴.
어이, 티릭  새끼야,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라고.
네놈이 웃고 있는 거  보이니까,

티릭이 오른발을 전진하면서 단검을 내질렀다. 도둑 클래스인 만큼 하층 수준인데도 꽤나 빨랐다.
잔인과 방심이 뒤섞인 일격. 나를 살려주자는 바리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심장을 노려왔다.

"크흐흐-.“

나는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다짜고짜 심장을 노리는 것을 보면 잔인했다.
하지만, 견제를 통해 자세를 흩트리기도 전에 치명상을 낼 욕심으로 방심하는 것을 보면 멍청했다.

나는 짐꾼용 장갑을 낀 채로 손을 내밀었다.
평범한 속도지만, 쪼렙 도적의 찌르기 스킬 궤도는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다.
팔 거리 안쪽으로 오기도 전에, 내민 손으로 티릭의 손등을 잡고 비틀어 당겼다.
찌르는 속도는 더해졌지만, 더해진 속도를 티릭은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근소한 차이로 옆구리 바깥쪽으로 빗겨냈다.

"큭."

티릭이 놀랐다.
엉성한 놈, 내가 짐꾼이고, 네놈이 찌르기 스킬이 있는 도적이라도 전투 경험의 차이는 무지막지하다.
내 몸과 엇갈려 나가떨어진 티릭이 단검을 다시 잡았다.
무기를 뺏길 위험이 크다고 보고 자신의 무기에 더욱 힘을 줬다. 당연한 반응.

그리고 내가 만든 반응이다.
티릭의 생각은 뻔했다. 티릭은 방금 나의 쥐는 힘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무기를 빼앗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움직임을 유도해냈다.

"멍청이."

나는 정면에서 달려드는 티릭의 무릎을 내리찍듯 찼다. 상체에. 그것도 자신의 단검에 집중하고 있던 티릭의 허를 찔렀다.

체력 강화 레벨이 높지 않은 한, 인간의 약점은 그대로다. 골격 구조를 노린 일격을 감당할 수 없다.
몸무게를 담고 찍어 찬 일격은 무릎을 역으로 꺾지 못했지만, 한쪽 다리를  쓰게, 고통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어 비틀거리는 티릭의 손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찼다.
떠오른 단검을 낚아채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푸극하는 촉감.
찔러넣은 단검에서 느껴지는 몬스터와는 다른 반발감.

실력을 숨기지 않고 약점을 노려 즉사시켰다. 수많은 전투에서 얻은 실력을 그대로 드러냈다.
육체는 미궁 최하층의 짐꾼이라도 익힌 감각과 경험은 흩어지지 않았다.

[경험치 300을 획득했습니다.]

아, 그래, 사람을 잡아도 경험치를 얻을  있지.

 층의 티릭 수준이면 경험치 200 정도 줬다. 300인 것은 스킬이 없는 짐꾼으로 도적을 죽였기에 추가 경험치가 적용된 것이다.
상당한 경험치였다.
일 층의 고블린은 경험치 30 정도를 줬다. 파티를 맺고 사냥을 하면, 이를 나누어 가지니  번에 여러 마리를 잡는다고 해도 실제로 얻는 경험치는 더 작았다.

이때까지는 평판을 생각해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이곳 사람들은 탐험을 끝낼 때마다 1층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나는 미궁 밖으로 나갈  없기 때문에 만날 약속만 한  그들을 보냈다.

그래서 평판이 중요했다. 그들이 다시 들어오지 않으면 난 그냥 죽는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층에서 버티더라도 '침식의 물결'은 용사가 죽을 때뿐만 아니라 용사가 미궁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시작되었다.

"어?"

 앞에 펼쳐진 장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헤스티가 당황했다. 이내 분위기가 돌변했다. 바리스와 헤스티가 바싹 경계했다.
 역시, 바리스와 헤스티를 훑었다. 전투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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