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6화
미궁 2층에서의 일곱 번째 전투.
고블린 네 마리가 일행에게 달려들었지만, 능숙하게 마주했다. 헤스티마저도 무거운 짐을 바닥 내려놓고 억지로 마법을 쓸 타이밍을 노렸다.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고,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바리스가 크게 검을 휘둘러 산뜻하게 마무리했다.
"나, 성장한 것 같아."
"축하해. 바리스."
헤스티가 환하게 웃으며 축하했다.
"접근전 관련 능력인가?"
"네,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숨길 수도 있겠지만, 여력을 숨기고 싸울 상황이 아니다 보니 밝히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탐험가에게는 상태창이나 스킬창, 메시지창이 없었다. 그저 감으로 느끼다가, 특별한 장소나 아이템 등을 이용해서 알아내곤 했다.
바로 변화를 느끼는 것을 보면 사용해야 효과가 있는 스킬이 아닌 항상 효과가 발휘되는 패시브형 스킬을 얻은 듯했다.
아마도, 방어 관련 스킬일 것이다.
'계속해서 방어적으로 싸웠으니까.'
그래도, 둘의 성장은 나의 성장에 비하면 초라했다.
나는 2층에서 필요한 전투 스킬은 이미 올렸고, 독 저항을 2레벨로 올릴 경험치까지 모았다.
[독 저항 스킬 2레벨을 취득했습니다.]
독 저항 스킬 2레벨.
스킬창에는 표시되진 않지만, 1레벨과 차이점이 있었다.
경험으로 알아낸 것인데, 독 저항 스킬이 2레벨이 되면, 몸속에 항체가 생겼다.
특히, 체액에 항체가 포함되었다.
이는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없는 미궁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독에 당한 동료가 있을 때, 해독약이 당장 없더라도 침을 발라 독성을 낮출 수 있다는 뜻이었다.
'기본적으로, 독 저항은 독을 쓰기 위한 준비지.'
독성이 감도는 무기를 쓰다 보면 상처 입지 않더라도 조금씩 중독되었다.
하지만, 독 저항이 2레벨 정도 되면 이를 극복해낼 수 있다.
'독은.'
고블린이 나오는 층에서는 독을 구하기 위해 헤맬 필요가 없었다.
나는 쓰러트린 고블린의 혀를 쭉 잡아당겼다. 그리고 고블린 워리어에게 얻었던 단검의 검면을 고블린의 혀에 비볐다.
어떻게 보면 몬스터에게 배운 셈이었다. 더 아래에서 나오는 고블린들이 자신의 침독을 단검에 중첩시키는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거니까.
다만, 이렇게 만든 독단검은 고블린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고블린은 자신의 침독에 중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잘 통했다.
'슬슬 식량을 생각해야겠지.'
식량과 의약품과 인간에게 최적화된 장비.
이것들이 없으면 미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리스와 헤스티의 분위기가 살짝 밝아진 이유기도 했다. 둘은 이제 내가 이유 없이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들을 굶겨 죽일 것 같지 않으니, 식량을 구하려 할 테고, 그때, 방법이 생길 것 같아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확실히 꺾어주지.'
미궁은 층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누구도 반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층과 층이 계단으로 연결된다는 단정에는 다른 견해가 많았다.
미궁의 계단은, 평범한 건물의 계단과 달랐다. 혹자는 계단이 아니라, '워프 포인트'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작용이 일방통행 워프와 같았다. 올라가는 계단은 올라갈 수만 있고 내려가는 계단은 내려갈 수만 있다.
그리고, 첫 번째 통행자가 지나가고 나면 수 분 내에 사라졌다.
워프와 닮은 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한 층에서 계단으로 내려간 후,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해 올라가도 처음의 장소로 도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층수만 같은, 전혀 다른 장소로 도착하는 것이다. 지하 1층에서 지하 2층으로 내려간 후 다시 올라갔을 때, 원래 지하 1층이 아닌 와본 적 없는 지하 1층으로 가지는 것이다.
다만,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고, 직업이 있었다.
길찾기 스킬, 길잡이라고 불렀다. 길잡이는 매개물이 있다면, 이전에 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반 이후에는 필수적인 인원이었다. 특히, 상위의 길찾기 스킬을 가진 길잡이는 한 번에 여러 층을 건너뛸 수 있었다.
이 길잡이 스킬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미궁 내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상인의 요새'나 '무법자의 뒷골목' 층이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냥 후에 휴식을 취할 때, 헤스티에게 다가갔다.
"뭐예요? 또, 먹어야 해요?"
"독성이 약해졌을 텐데."
내가 핵심을 찔렀는지, 헤스티는 움찔거렸다.
"준영씨, 우리 이제 도망 안 가요. 준영씨가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성심성의껏 도울게요."
"그래, 나를 따르겠다는 건가?"
"네, 그래요."
"그래, 그럼, 이걸 먹어봐."
"아흐, 당신 정말."
헤스티가 눈을 흘겼다. 결국, 인상을 쓰면서 손을 뻗었다.
"지금 이것을 먹으면 더 괴로울 거야. 독이 있는 상태에서 중첩되는 거니까."
헤스티가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나와 입 맞추고 내 침을 마시면 된다."
헤스티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리스가 끼어들었다.
"준영씨, 독 저항 스킬이 있는 건가요? 아, 그래서, 그 독풀을 같이 먹었군요."
"오호라, 독 저항 스킬에 대해 아는 건가?"
"네, 들어본 적 있어요. 전사에게는 독 저항이 중요하니까요."
헤스티의 눈빛이 흔들렸다. 바리스의 말에서 내가 단순한 음심으로 수작 부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다가가자 헤스티가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올렸다.
초췌한 눈썹에 눈물이 살짝 어렸다.
나는 턱을 살짝 잡았다. 지쳤음에도 여린 피부가 온기를 전해왔다.
"흐으."
헤스티의 가쁜 호흡을 뒤로 한 채,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빨을 건드려 열고 혀로 혀를 불렀다.
헤스티의 혀가 내 혀와의 접촉에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나는 헤스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혀로 쑥 파고들어 헤스티의 혀와 엉겼다.
"음-."
얕지만 촉촉한 숨, 거부가 조금씩 당황으로 변하더니 머뭇거림이 조금씩 사라졌다.
성적으로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내 타액이 넘어갈수록 고통이 줄어드니 본능처럼 응하는 것이다.
헤스티는 어느새 두 손으로 나의 팔을 잡고 키스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내 타액을 마시는데 몰입했다.
내가 입을 천천히 떼자 따라오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살짝 몽롱해진 헤스티에게 모크라크 풀을 내밀었다. 헤스티는 풀을 보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내 손에서 풀을 낚아챘다.
이로써 바리스와 헤스티는 내게 독 치료할 방법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헤스티는 내가 낸 소리에 눈을 홀겼다. 이내 나의 무례한 행동에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획 하니 돌렸다.
헤스티의 여운이 입안에 감돌았다.
이 여운은 헤스티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성적인 여운이 아니었다.
'몇 회차였더라.'
싫은 기억,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저 헤스티는 나와의 키스, 아니 키스 자체가 처음이겠지만, 나는 헤스티와의 키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수많았던 회귀 중에 한 번, 헤스티와 진득하게 연애한 적 있었다. 성장을 내버려 두고 함께 시간을 공유하며 지냈다.
하지만, 나는 미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꿈결처럼 다가왔던 사랑은 꿈결처럼 사라졌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헤스티는 미궁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래에서 밀려오는 '침식의 물결'에 죽었다.
'그 여파가 꽤 오래갔었지.'
죽고 회귀 후 다시 만났을 때, 꽤 힘들었다. 나를 처음 보는 눈빛을 하는 헤스티의 시선은 비수 같았다.
'상처를 곱씹을 필요 없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상념에서 깨어났다.
* * * * * * * * *
이어지는 전투에서 바리스는 빠르게 성장했다.
근접 방어형태의 전투를 계속 치러 조건을 만족시키면서, 고블린을 죽일 때마다 분배되는 경험치를 받았다.
거기에 재능까지 있어, 나의 싸움을 보고 자신에게 적용시키니, 싸울 때마다 나아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스스로도 이런 성장을 느끼는지, 나를 경계하기를 잊고 자신의 성장을 뒤돌아보는 순간이 많아졌다.
'성장의 체감은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이지.'
성장의 순간은 여러 번 찾아오지만, 처음처럼 크지 않다. 열에서 열하나가 될 때보다, 하나에서 하나를 더 쌓을 때 더 크게 느끼는 법이다.
원래라면 지하 1층에서 파티원과 함께 고블린을 잡으면서 천천히 성장했을 텐데, 나와 둘이서 고블린 워리어를 잡으니, 나를 보조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해도 성장 속도가 남달랐다.
이는 현 상황에 대한 느낌도 다르게 만들었다.
"식량은 얼마나 남았지?"
나는 헤스티를 돌아보며 물었다.
"하루 치 남았어요. 아껴먹는다고 해도 이틀이에요."
"아, 벌써."
헤스티의 대답에 바리스가 탄성을 터트렸다.
아차 싶은지, 바리스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감탄을 얼버무렸다.
실력이 급성장할 때는 이 성장세가 지속되길 바란다. 이는 심성이 착한 바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협박당하는 상황임에도 성장의 쾌감에 이 상황이 끊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헤스티는 달랐다.
중독도 중독이지만, 마법사가 아닌 짐꾼 역할이기에 성장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조금씩 나누어지는 경험치도 체력 수련과 독 저항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얻는 경험치라도 많다면 독 저항 선행 스킬과 독 저항 스킬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즉, 고통뿐인 시간이기에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를, 상황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는 대로 올라간다."
"네."
"알았어요."
같이 대답했지만, 느낌이 달랐다.
바리스는 상급자의 지시에 따르는 어감, 헤스티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어감.
"일 층에서 다른 탐험가를 추적해. 약탈한다."
"네, 무슨 그런···."
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차라리, 당신과 싸우겠습니다."
바리스가 결연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헤스티도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배낭을 내려두고 독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도 지팡이를 꽉 잡았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느린 만큼 단호하게 자세를 잡았다.
헤스티는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고 바리스는 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바리스가 성장한 이상으로 내가 강해졌다.
적극적으로 싸운 나와 수비적으로 싸운 바리스의 경험치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바리스는 싸우겠다고 말했지만, 더이상 끌려다니지 않고 여기서 죽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상대의 배낭만 빼앗을 것이다. 죽이는 건 너희 둘이 선택해."
"아니, 그게 뭐예요."
헤스티가 대번에 분통을 터트렸다.
던전에서의 약탈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다.
약탈하고 살려 보내면 범행 사실이 알려지지만, 죽이면 몬스터가 시체를 먹어버리기 때문에 흔적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약탈한다는 말은 단순한 강도짓을 뜻하지 않고 다 죽이고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둘은 지쳤지만, 나의 의도를 파악해냈다.
"우리를 범죄자로 만들 생각이군요."
"대상을 죽여도 돼, 그럼, 범죄 사실이 알려지지 않겠지."
나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노렸다.
식량 등의 보급과 바리스의 도망 방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고, 헤스티를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것은 단기적일 뿐만 아니라, 심력이 크게 소모된다.
대신, 도망쳐도 갈 곳이 없게 만들면, 도망치려는 의욕 자체를 꺾어버릴 수 있다.
바리스가 검을 꽉 줬다.
"그리고, 한가지 약속하지."
나는 바리스와 헤스티의 얼굴을 눈에 힘을 준 채 주시했다.
"나는 너희에게 중범죄를 시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희에게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둘을 억지로 이끌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이 둘을 노리는 고블린들을 처치했다.
이는 사냥이지만, 보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말을 하지 않은 경우는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약자는 더 강한 자가, 특히 보호까지 해줬던 자가 강하게 말하면 믿는 쪽으로 기우는 법이다.
'구석으로 몰더라도 도망칠 곳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바리스처럼 선하지만, 의지가 굳은 자를 범죄자로 만들기 어렵다.
선한 의지를 꺾는 것은 어렵지만, 범죄자로 취급당하도록 만들기는 오히려 쉽다.
선한 의지를 가진 자들은 자신의 선량한 의도를 더 크게 생각한다.
살아가는 데에는 자신의 선한 의도보다 외부의 평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믿지 않는다.
즉, 자신이 죄를 짓는 것과 죄인으로 취급받는 것 중에 죄를 저지르는 것을 더 꺼린다.
"그리고, 헤스티에게 독을 먹이지 않겠다."
헤스티는 나쁜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하기 위해 고행을 택하는 여자도 아니었다.
살 수 있다면, 당장 고통을 멈출 수 있다면, 양심에서 눈을 돌리는 선택을 하는 여자였다.
바리스가 천천히 검을 늘어트렸다.
헤스티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들어 올린 지팡이로 바닥을 딛고 기댔다.
나는 조용조용히 계획을 말했다.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하면 내려간다.
내가 다른 탐험가의 흔적을 발견하면, 헤스티에게 간신히 움직일 정도로 독을 먹인다.
헤스티가 탈출하기 전에 죽을 정도의 강도. 내가 죽거나 내가 타액을 전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닥치면, 헤스티도 살 수 없도록.
나와 바리스는 얼굴을 보여주면서 탐험가를 상처입히고 쫓아 보낸다.
바리스도 헤스티도 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