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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6화 (26/139)



〈 26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26화

길고 높은 뿔피리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일행은 성벽에 달라붙을 적을 처리하는 것보다 뒤로 빠지는 것을 염두에 두며, 몰려오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니었다. 오크도 아니었다. 굳이 분류한다면 키메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행은 다르게 말할 것이다. 리버밸런스 문장을 보았고 그 교단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 나눴었다.

"리버밸런스 교단신성체···."

헤스티가 중얼거렸다. 수희는 경험했을 수도 있지만, 교단의 신성체를 헤스티는 경험한 적 없었다.
하지만,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달려오는 몬스터는 그녀에게 말로만 들었던 신성체를 떠올리게 하기 충분했다.

인간의 피부를 하고 찢어진 인간의 의복을 걸쳤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부분이 있었다.
곤충의 뿔을 확대해놓은 창과 같은 뿔이  대신 손목에 달렸다. 비틀려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얼굴은 얼굴에 쓰는 가면을 위로 올린 것 같았다. 그리고 원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곤충의 겹눈 수십 개가 번득였다.
인간의 표면을 가졌지만, 머리에, 팔에, 입에 곤충의 신체가 달렸다.

여기까지라면  그대로  이상의 생물을 합친 키메라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인간의 부분, 관절이 역관절이었다.
인간의 팔목과 무릎은 반대로 꺾이면 힘은커녕 생명이 위험했다. 하지만, 달려오는 몬스터 무리는 반대로 꺾인 역관절로 원래의 골격이  힘 이상을 냈다.

"집중해라."

나는 수많은 키메라에 압도당한 헤스티의 목을 꾹 눌러 진정시켰다.

"덩어리를 보지 말고 개체 하나씩 살펴라. 한 놈 한 놈씩 눈으로 붙잡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 공격과 방어, 반격을 떠올려라."

군인이라면, 소모용이 아니라 숙련된 병사가 필요한 군대라면, 해서는  될 지시였다. 집단전을 해야만 하는 무리에게 눈을 감으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일행은 미궁 탐험가였다. 개별 전투가 우선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보에 당황해 평정심을 잃느니, 당장 필요한 정보부터 순차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나았다.

어느새 일행의 호흡이 가지런해졌다. 대규모 몬스터가 몰려오는 상황임에도 집중해냈다.

'그만큼 나를 믿는 건가. 답을 보여줄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건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대만큼 응해줘야겠지.'

천천히 성벽 위를 걸었다. 성벽을 구성하는 기둥 중에 크고 튼튼한 기둥에 손을 올렸다.

[관리 대상 인지]
기둥이 나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기둥 위치에서 확보된 시야는 나의 시야가 되었다.

일행은 성벽 안쪽 아래에서 싸울 것이다. 나 역시 아래에서 싸울 것이다. 그럼 이쪽 성벽으로 적이 얼마나 몰려오는지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컨트롤러 클래스의 [관리 대상 인지]로 해결할 수 있다.
성벽 아래로 내려오는 몬스터의 정확한 위치와 타이밍은 물론,  번째 구역을 포기하고 뒤로 빠져야 할 순간도, 반격해 다시 구역을 확보할 순간도 판단할  있다.

"당신들 정말 준영씨를 믿는구나."

수희가 고개를 옆으로 절레절레 저었다. 수희는 바리스보다 더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위험을 직시했다.
자기보다 약한 바리스와 헤스티의 얼굴에서 혼란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에 대한 믿음을 읽었다.

"까짓거, 나도 한번 믿어보지 뭐."

나는 싱긋 웃었다.
정말 위험해지면 월등한 육체 능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도망칠 수희였지만, 탱커로서 일행의 안정감을 확보하는 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처음은 적당히 연기한다. 나랑 수희가 크게 움직일 테니까, 관찰에 우선해.
내가 지시 내리면 바로 성벽 뒤쪽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몬스터가 달려들 바깥쪽 성벽이 아닌 성 쪽 성벽 안쪽에는 일행을 지켜보는 병사와 지휘관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싸웠지만 이름 없는 용병단답게 쉽게 무너졌다 정도의 인식은 확보해야 했다.
리버밸런스 문장의 남자가 있는 만큼 이 미궁층은 몬스터의 공성을 막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 내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도망자로만 보이지 않으면 된다.‘

* * *
* * *
* * *

차가운 금속이 햇빛에 반짝였다. 전신 판금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안면 가리개를 열어 얼굴을 드러낸 채 묵직하게 말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사수는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사격하지 마라."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선명하게 들렸다. 기운을 실은 목소리가 진중을 가득 채우자 눈에 보일 정도로 웅성대던 불안감이 잦아들었다.

'역시, 강자다.'

이 성의 영주, 레오나드. 추측했던 데로 문서만 보는 깍쟁이가 아니었다.
친히 성벽에 올라 오만하게 달려드는 키메라들을 내려보았다. 더욱이 비반사 처리가 되지 않은 갑옷을 입었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주.'

금속 제련 기술 발전과 상관없이 모험가들은 가죽 갑옷을 주로 입었다. 금속 갑옷은 방어력이 뛰어났지만, 무거워 속도가 떨어졌다.
몬스터와의 전투는 인간끼리의 전쟁과 달랐다. 무조건 피해야만 하는 공격이 존재했다.
그래서 가죽 갑옷 이상 입지 않고, 모자란 방어력은 마법이나 특별한 재질의 물질을 가죽 위에 덧붙이는 식으로 보충했다.
그럼에도 레오나드가 판금 갑옷을 입었다는 것은 가진 무력이 달려드는 몬스터의 수준을 넘는다는 뜻이었다.
비반사 처리가 안 된 금속 갑옷의 반짝임은 자신에게 공격이 집중돼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걸, 전략으로 이용하는 군주.'

빼어난 모습을 드러내자 대번에 올라간 사기가 이를 증명했다. 강자의 존재는 약자의 생존율을 올리는 법이고 병사들은 이를 알고 있다.

'전술적 효과도 노리고 있다.'

성 쪽은 인원이 부족했다. 성벽 위에 병력을 균일하게 배치하면 두께가 너무 얇아졌다.
그러니 아예 적에게 공격목표를 제시하고 그쪽 방어에 치중하는 것이다.

'적에게도 먹음직한 먹이지.'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 사기를 올린 만큼, 죽으면 바로 전투가 끝나버린다. 적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병사들이여, 적에게 죽음을!"

레오나드의 외침에 병사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사수들이 사격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집중 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성 병사들의 복장과 저 키메라에 남아있는 옷조각이 같군요."

바리스가 슬픈 눈빛으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레오나드의 외침과 옷조각은 원래 이성의 주민과 병사들이 키메라로 개조되었음을 알렸다.
나는 바리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바리스의 나를 향한 의존심을 늘이려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좋지만, 병사들도 있는 자리였다.

*

꾸웨에에엑
꾸룩 거리는 기이한 키메라의 울음과 인간의 함성, 격돌이 시작되었다.
묵직한 공성추를 떠올리게 하는 변형된 어깨를 가진 백여 체에 가까운 키메라가 미친개처럼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문 위에서 사수들이 돌진 예상 경로에 화망을 구성해 사격하기 시작했다. 사격에도 살아남은 돌격병이 성벽에 부딪혀 광음을 만들어냈다.
성문으로만 달려들지 않았다. 공성용 사다리는 없었지만, 등에 긴 촉수를 말고 다가온 키메라가 성벽 위로 촉수를 쏘아내어 성벽 위까지 이르는 밧줄을 구현해냈다. 다른 변형 키메라가 밧줄 역할의 촉수를 타고 기어올랐다.
병사들이 성벽 위까지 걸쳐진 촉수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일부가 끊어지고 기어오르는 키메라가 성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키메라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마귀의 팔을 가진 키메라가 성벽의 흠과  사이로 팔을 박아넣으면서 기어올랐다.

"수희 너랑 나만 움직인다. 특히 바리스는 움직이지마."

나는 수희와 함께 우리 쪽으로 기어 올라오는 키메라와 전투를 시작했다.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번 바리스를 단속했다.
증오와 광기가 터져 나오는 전장에서도 슬픔을 느꼈던 바리스였다. 수많은 병사의 죽음은 바리스를 폭주하게 만들 가능성이 존재했다.
감당할 수 없는 폭주는 숨 쉬는 존재에서 한낱 핏덩이로 변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

수희의 쌍검이 곤충의 뿔로 의태한 키메라의 팔을 잘랐다. 채찍처럼 날아드는 촉수를 쳐냈다.
경험해보지 못한 적이지만, 경험과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측대응 가능한 적.
기괴한 형태 이전에 속도와힘이 수희에  미치는 수준.
수희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을 정도로 전투에 흥분했다.  눈 끝에 전투의 광기를 품고 마음껏 몸을 움직였다.

'딱 성장에 적당한 상대야. 육체의 기술과 경험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경험치도 제대로 쌓이고 있겠지.'

수희는 일행보다 단계가 높았다.
그래서 지하 7층을 향하면서 사냥했던 6층에서는 바리스나 나와는 달리 경험치를 제대로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키메라는 수희에게 경험치 페널티를 주지 않을 것이다. 7층 수준에 맞는 움직임에 새로운 몬스터, 변칙성까지 부리는 적이기에 마른 땅에 내린 봄비가  것이다.

'몰입하게 되는 이유지.'

수희는 자신의 성장 수치를 숫자로 듣지 않아도 감각으로 감지하고 쾌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 비해 바리스는···.'

맞서 싸우는 수희보다 뒤로 빠진 바리스가 전쟁에  힘들어했다. 달려드는 키메라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키메라에 당해 쓰러지는 병사까지 인지하고 있다.

한두 명이라면, 아니 대여섯이라도 미궁에서 거친 생활을 한 바리스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하지만  숫자가 열을 넘고 스물을 넘고 마흔에 가까워지면 더이상 객관적인 자극이 아니다.
죽음이, 내 손에 쥔 칼끝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법칙이 아니라, 나를 포위하고 울부짖는 불길이 된다.
죽음이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된다.

일반인은 공포로 질식한다. 신병들은 눈을 감아버린다. 숙련된 병사는 한쪽 눈만 얇게 뜨고 얇게 뜬 눈으로 비친 적을 찌르는 행위를 반복한다.

수희의 반응은 크게   숙련된 병사와 다르지 않다. 한쪽 눈이 아니라 양쪽을 뜨고 적을 제대로 본다는 차이는 있지만, 눈앞의 적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없는 자신의 영역 밖의 자극은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자신에게 심취했다.
광기에 몰입했다.

'빠르고 충실하게 성장할 수 있지.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바리스. 부릅뜬 눈과 꽉 다문 입술.
휘두르지도 않고 그저 검을 꽉 쥐고 있을 뿐이지만, 바리스는 전장을 마주했다. 수백의 죽음을 느끼고, 광기를 직시했다.

'바리스는 성장의 한계가 없다. 수희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벽을 넘지 못했어. 눈앞의 적에 집중할 뿐.  집중은 눈 밖의 적을 차단했고 이는 결국 수희의 성장한계가 되었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용사도 여왕님도."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헤스티가 듣고 움찔거렸다. 나는 쿡 웃었다.
이 광기의 현장에서도 나의 중얼거림에 반응할 정도로 헤스티는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스승만 바라보고 가르치는 것만 배우는 학생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스승이 회귀를 거듭한 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쩌면 이번 회차에서 헤스티는 이때까지의 그녀가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를 이룰지도 모르겠다.

"바리스, 헤스티와 에리를 데리고 성벽 아래로 빠져라. 성벽 아래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를 상대해. 정해두었던 두 번째 구역까지 밀려도 좋아."

바리스를 강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성장도 좋지만, 전장의 광기에 미쳐버리게 할 수 없다.
미쳐버린 바리스는 한계를 넘은 힘을 보여주겠지만, 전장의 피가 식는 순간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나는 빠르게 움직였다. 내게 몰려들었던 키메라를 처치하고 수희의 전장에 끼어들었다.

"킥, 왜!"

몰입에 방해받은 수희가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였다.
성장의 쾌감, 몰아의 순간이 깨어지는 감각은 땀에 젖은 옷으로 꿈에서 깨는 불쾌감과 비슷하다.

"오른쪽 끝을 봐라."

치켜뜬 두 눈이 나를 볼  멀리 보지 않았다.

"끝에서 왼쪽 벌판 끝까지 심호흡하면서 바라봐라."

이제야 내 말이 심상찮다고 느꼈는지, 바깥쪽으로 눈을 흘깃거렸다. 내가 수희가 상대하던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동안 조금씩 시야를 확장했다.

"칫,뭐. 뒤로 빠질 때이긴 하네. 크흠, 화내서 미안."

수희는 어색한 미소를 남기고 방어태세로 전환해 뒤로 빠지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현재 수희는 내 말을 단순한 후퇴 지시로밖에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말을 기억하는 수희는 전투 몰입 중에도 시야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는 그녀의 한계를 깨는 기초가 될 것이다.

대가는 훗날 받을 것이다. 수희가 경지에 달했을 때 크게 돌려받을 것이다. 채권자가잊지 않는 한 빚은 오래될수록 커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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