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48화
우리는 베르칸과 함께 움직였다.
일단 지하 10층에서 1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야 했다.
조금씩 팀워크를 맞췄다. 베르칸이나 나나 몰울프 한 마리는 혼자서 가뿐하게 감당하지만, 일부러 베르칸과 협공을 했다.
먼저 내가 몰울프 한 마리를 베르칸과 함께사냥해보고, 수희, 바리스가 함께 공격해보았다.
계단과 함께 수문장 몬스터를 발견하고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
베르칸과 함께하니 에리의 탱킹 부담이 덜어졌다. 베르칸이 전방으로 전진해 자신을 크게 노출해서 싸우니, 에리가 헤스티와 페로를 보호하기 더 쉬워졌다.
주변을 정리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계단 앞에 모였다.
“그쪽 일행에 길잡이가 있지? 이 메달을 맡기지.”
“길잡이가 아니었어요? 그럼, 다른 사냥을 어떻게 한 거예요?”
파격적인 제안에 헤스티가 물었다. 길잡이는 자신이 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상인의 요새처럼 명확한 곳은 되던데.다른 곳은 안되더군.”
“와.”
헤스티가 감탄을 터트렸다.
길잡이 스킬이 없어도 상인의 요새로 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상인의 요새의 기세가 워낙 강해, 어느 정도 감만 있어도 요새로 올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다른 층은 달랐다. 좌판에늘어놓았던 무기만 떠올려봐도 베르칸은 그동안 사냥을 했다.
이는 베르칸이 완전히 무작위로 10층 근처를 돌아다녔다는 뜻이었다. 편협한 바바리안의 특성을 생각하면 상성을 따져가며 공략했을 리 없으니, 무작위를 감당할 만큼 강하다는 의미였다.
헤스티의 감탄과 달리 나는 길잡이 능력이 없을 거라고 대충 예상했었다.
길잡이 능력이 있다면 상인의 요새에서 좌판을 깔고 타인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바바리안답게 혼자서라도 숨어 들어가, 뭔가 해보려고 하다가 한 줌의 핏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좌판에 깔렸던 무기도 혼자 와이번의 둥지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돌입에 실패하고 다른 미궁층으로 떨어진 곳에서 구한 아이템일 것이다.
*
“가자.”
나는 앞장섰다. 한 손에는 레리아나의 검을, 한 손에는 리버밸런스의 메달을 들었다.
리버밸런스의 메달은 일행을 바바리안이 갔던 와이번 둥지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레리아나의 검은 일행이 나아가는 길을 비틀어낼 것이다.
레리아나의 검은 결과이자, 변화의 증표였다.
원리를 이해하고, 결과를 예측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레리아나의 검을 얻었던 무기고와 이어진 성에서의 일은 나의 이해를 넘었다.
하지만, 알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다고 해서 이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손에는 메달을, 한 손에는 검을 들었다. 또 하나의, 나의 이해를 넘는 스킬인 [미궁 이해]가 변화가 가미될 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일행은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평상시 계단을 넘어갈 때, 굳이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기에 그와 같다고 여겼다.
나의 뒤를 베르칸이, 바리스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과 베르칸을 경계하는 마음으로 바리스가 베르칸 뒤에 붙었다.
머리가 복잡한지, 맑지 못한 표정의 수희가 뒤따르고 긴장과 호기심으로 헤스티가, 얼굴을 드러낸 헤스티와 달리 여전히 로브를 덮어쓴 페로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에리가 뒤를 경계하며 걸었다. 내가 에리의 감각을 공유하기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만, 에리는자신이 미궁 중간층 탱킹을 맡는다는 부담감에 은근히 긴장했다.
*
조명이 바뀌었다. 보이는 사물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일행은 미궁 지하 11층, 리버밸런스의 메달이 이끈 와이번의 둥지에 돌입했다.
입장하자마자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최소 경계 후 은폐할 지형지물이 있나 훑었다.
순식간에 보이는 모든 지형지물을 파악한 후, 추리에 집중했다. 보이는 지형을 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추측했다.
베르칸이 손짓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
지형을 안다는 뜻이며 이는 길잡이 스킬이 성공해, 베르칸이 싸웠던 와이번 둥지로 제대로 진입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앞장서라는 신호로 응답하자, 베르칸이 앞장섰다.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은폐물로 모두 이동하고 위를 살폈다. 베르칸은 현재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 지형까지 알기에 빠르게 파악하고 빠르게 이끌었다.
“여기서 한 번 싸워줘야 하오.”
“알았다.”
일행은 전투를 준비했다.
이미 왔던 지역이라고 해도 몬스터가 리젠 되었을 테니 싸울만한 장소에서 싸우는 것이 맞았다.
삐익-.
베르칸이 휘파람을 불었다.
적을 부르는 소리.
짧은 정적.
기척이 느껴지기 무섭게 크게 들리는, 공기를 짓누르는 날갯짓 소리.
베르칸이 숨은 채로 발을 굴렀다. 모습을 보이면 와이번을 더 빠르게 유인할 수 있겠지만, 와이번이 일행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는 만큼 기습의 효과가 줄어들 것이다.
* * *
* * *
헤스티는 고개를 들었다.
와이번은 컸다. 머리에서 앞발바닥까지 높이가 성인 남성의 3배에 달하고, 전체 길이는 6배를 넘었다.
크기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은 하피들과 달랐다. 와이번에 가려 어두워지는 시야는 태양과 같은 절대적인 광원이 없는데도 밤이 오는 것만 같았다.
헤스티는 마법을 준비하며 준영의 신호를 기다렸다. 준영의 말을 기억했다.
단순히 스킬을 쓰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상상과 실제를 이어내고 느껴라는 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야 할 길이 될 말이기에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말이었다.
‘스킬인 [그라비티]이자, 와이번을 땅으로 끌어당기고자 하는 나의 의지.’
그저 행했다. 잘하고 있는가를 따지기 이전에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느낄 수 없었지만, 그저 이루려 했다.
* * *
* * *
나는 베르칸이 등을 활처럼 휜 채 어깨를 부풀리는 모습을 보았다. 동시에 마법 시전을 위해 집중하는 헤스티를 느꼈다.
헤스티는 마법에 집중하면서도 나의 신호를 기다렸다.
내가 중간에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헤스티. 지금.”
마법은 시간 차가 존재했다. 얕은 층에서 놀 때는 마법이 시전되고 발동하는 순간까지의 시간 차는 큰 의미가 없지만, 층이 깊어질수록 의미가 커졌다.
베르칸의 작살 투척과 헤스티의 [그라비티]. 원거리 공격과 마법으로 계열이 다를지라도 이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와이번은 작살을 인지하는 순간 경계할 것이다.
인간이 날아오는 주먹에 본능적으로 근육에 힘을 주어 막는 것처럼, 와이번도 공격당하면 방어력을 끌어올린다.
단순한 근력이 아니라 마법적 힘으로 날아다니는 와이번이기에, 이 방어력에는 마법 저항 역시 포함된다.
물론 와이번이 저항하더라도 마법 자체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효과가 줄어드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전투를 생각하고 헤스티 성장을 생각하면 정밀한 운용이 중요했다.
*
푹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칸의 작살이 와이번의 외피를 뚫고 박혀 들었다. 동시에 와이번의 비행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와이번은 억지로 움직이다가 베르칸을 향해 붉어진 눈으로 포효했다.
‘좋군. 좋아.’
와이번의 시선이 헤스티가 아닌 베르칸을 향했다는 것.
와이번은 절묘한 타이밍 덕분에 헤스티가 마법을 쓴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베르칸의작살에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작은 이득이 아니었다. 와이번은 본능적으로 물리적인 작살보다 중력 마법을 더 큰 위험으로 느꼈다. 최악의 경우 치명상을 입더라도 마법사를 우선 죽이려고 발악했다.
급한 상황에서도 헤스티를 쳐다보자 헤스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칸의 작살 투척에 마법을 발동시키는 타이밍을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바리스 가자.”
미리 띄운 4개 주력으로 쓰는 부유 석궁구으로 와이번을 둘러싸 시야를 완전히 확보했다.
나는 바리스와 함께 달려나갔다.
와이번과 거리를 좁히면서 30개의 바윗돌을 공중으로 부유시켰다.
베르칸이 와이번에게 박아넣은 작살에 연결된 사슬을 당겼다. 당기는 힘과 함께 사슬이 길어지기를 멈추며 와이번의 움직임을 억제했다.
베르칸뿐이라면 아무리 힘이 좋아도 몸무게의 한계에 베르칸이 끌려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사슬 반대쪽을 바위 등에 묶어놓고 던졌을 것이다.
즉, 원래 베르칸의 작살 투척은 묶어둘 지형지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중력 마법의 존재가 이 한계를 부쉈다. 어느 곳에서도 투척 가능하게 바꾸었다.
와이번이 몸부림쳤지만 위로 날아오르지 못했다.
나는 2m 단위로 바윗돌을 배치했다. 높이 역시 다양하게 배치했다.
달려가는 힘 그대로 뛰어올랐다. 바윗돌을 연속으로 차내며 속도와 높이를 더했다. 와이번의 고개가 나를 향했다.
“늦어.”
높이는 힘이 된다. 나는 와이번보다 높은 곳에서 검을 머리 위로 치켜세웠다.
검을 내리찍었다. 하강하는 나의 몸무게가 힘으로 전환되고, 전환된 힘이 온전히 검에 더해졌다.
끼에에에-
마법 파장이 담긴 비명을 와이번이 내질렀다.
와이번의 비명 이전에 검 끝으로 느껴진 감각은 뼈까지 긁어냈음을 알려왔다.
와이번은 날개에 큰상처를 입었다.
낙하 되는 속도를 부유시켜둔 바윗돌을 밟아 감소시켰다. 반발에 추락하는 바윗돌을 박차 다시 떠올랐다.
검을 송곳처럼 세웠다. 나를 노리는 와이번의 쫙 벌린 입의 위쪽 끝, 이빨과 코 사이를 노렸다.
푸윽이라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검이 와이번의 인중에 해당되는 곳에 파고들었다.
“허허.”
아래에서 베르칸의 기가 차 토해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큼 나의 전투는 일반적인 전사의 전투와 궤를 달리했다.
와이번이 이빨로 나를 물어뜯으려고 머리를 내밀던 힘은 검을 뼈까지 가르게 했다.
박힌 검을 잡고 위로 뛰어올랐다. 단순히 뛰어오르지 않고 팅겨나가는 힘을 회전력으로 이어냈다.
그 회전의 선에 보조용 단검을 올렸다.
일행의 무장, 특히 나의 무장은 나의 힘을 전달하기 충분한 수준을 이루었다. 고블린이 쓰던 단검을 주워 쓰는 수준이 아니었다.
회전에서 끌어내는 힘을 그대로 와이번의 이마에 이끌었다.
“아.”
격전 중임에도 저 아래에서 수희가 흘리는 신음이 인지되었다. 방금 쓴 레리아나의 검과 보조용 단검을 같이 쓰는 수법은 그녀가 추구하는 바를 담고 있었다.
바리스는 내가 부유시킨 바윗돌을 믿고 낮은 궤도에서 와이번을 노리는 데에 비해, 수희는 시도하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쓸 만큼 약해진 자기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상실감은 나에 활약에 더욱 깊어질 테지만, 이겨내야 할 벽이었다.
박아넣은 보조용 단검 옆에 레리아나의 검을 박아넣었다.
와이번은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고통과 죽음의 예감에 뒤흔드는 몸짓은 거칠었지만 나를 떨구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헤스티의 중력 마법을 밀어내지 못하고 허용하는 약점이 되었다.
나에게 약간의 저항으로 작용하던 중력 마법은 와이번에게는 와이번의 무게와 비례해 집어삼키는 늪이 되었다.
추락.
땅에 떨어진 와이번이 두 날개로 땅을 쳐냈다. 앞발로 땅을 밀었다. 하지만 지상 생물이 되어버린 비행 몬스터가 가진 날개는 피하기 쉽고 노리기 쉬운 타겟일 뿐이었다.
바리스, 수희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놈을 이런 식으로 잡아낼 줄이야.”
감탄을 터트리며 베르칸이 도끼를 들고 달라붙었다.
나는 뒤로 살짝 빠져 호흡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