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51화
알았다.
네크로맨시.
피의 제단은 법칙을 거스르기 위한 매개체다. 아리나란은 나를 잡기 위한 덫이다.
죽은 아리나란을 이용해서 나를 노릴 수 없지만, 다시 움직이는 아리나란을 이용하면 나를 노릴 수 있다.
두 개의 시간.
베르칸이 그의 동료와 함께 와이번의 둥지로 입장하기 전과 입장한 후.
원래의 역사와 내가 레리아나의 검으로 변성을 일으킨 역사.
변성이 일어나기 전,
아리나란은 베르칸이 입장하기 전에 이미 죽었었다. 하지만 입장할 때쯤, 카르미단이 그녀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바꿔, 베르칸을 굴복시켰다.
베르칸에게 나를 유인하라고 명령했다.
카르미단의의도대로 진행되었다면, 베르칸은 아리나란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외형만 같은.
나는 일행과 함께 아리나란을 파괴하고 베르칸을 죽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르칸이 아리나란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리더라도, 카르미단에게 복종하면 혼을 돌려주겠다고 유혹할 테니까.
리버밸런스가 나를 노릴 이유는 많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그들을 방해한 나를 처단해야한다. 신성을 모욕한 자를 처단하지 않으면 신성은 손상되는 법이다.
그리고, 레리아나의 검.
레오나드의 성에서 일어난 일은리버밸런스 교단 전체에 상세하게 전파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레리아나의 검은 리버밸런스에게 먹음직한 먹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페로처럼 세계의 이치를 거스른 모습이니까.
거꾸로 세워진 천징처럼, 인간의 혼은 검에 담길 수 없으나 담겼고, 페로는 젊은이였으나 신성의 저주를 받아 늙은이가 되었다.
“베르칸을 구해낸다.”
일행은 나의 지시를 되씹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카르미단을 처치하는 것이 아니라 구출이었다.
이는 카르미단이 강하다는 의미인 만큼, 일행은 방심하지 않고 병력을 전개했다.
“호, 이건 초대하지 않은 손님인가 기다렸던 손님인가. 초대하지 않았으나, 선물까지 들고 오셨군.”
그가 말하는 선물은 뻔했다. 레리아나의 검과 페로다.
“베르칸 물러서요. 이리로 합류해요.”
“네 아이다. 시체까지 이용당하게 할 수 없어.”
바리스의 말에 베르칸은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 저 아저씨는.”
수희가 눈초리를 올렸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도 강요하지 못했다. 그저 나와 보조를 맞추며 전진했다.
“헤스티, 바리스.”
둘이 중요했다. 그동안 내적인 성장과 더불어 바리스의 스킬도 추가되었다. 헤스티의 스킬은 스펠을 구해야만 추가할 수 있지만, 용사인 바리스는 달랐다.
[휠 버스팅]
헤스티의 파이어 볼트가 달려나가는 바리스의 앞에 던져졌다. 적을 공격할 때와는 다르게 완만하고 느렸다.
바리스가 달려나가며 검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헤스티가 날린 파이어 볼트처럼 바리스의 휘두르기는 빠르지 않았다.
검면과 파이어 볼트가 닿았다. 검과 파이어 볼트는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마법검처럼 화염이 검날을 감쌌다.
‘바리스는 빛과 상성이 좋아. 파이어 볼트는 불과 빛으로 이루어져 있지.’
바리스와 헤스티가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마법과 스킬의 조합에 이점으로 작용했다.
“호오, 한 수가 있구나.”
감탄하는 어투와 다르게 카르미단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제단에서 뻗어 나와 베르칸을 노리던 피막이 뒤로 물러났다.
“너도 꽤 눈치가 빨라.”
나는 바리스가 닿기도 전에 피막을 거두는 카르미단을 비꼬았다. 바리스가 [휠 버스팅]으로 유지시키는 양손검에 머문 화염은 단순한 파이어 볼트가 아니었다.
용사의 특성이 적용되는 만큼, 제물을 바치거나 희생자를 만들어 이끌어내는 힘에 상성을 가졌다.
제단의 붉은 피막은 베르칸의 도끼는 튕겨낼지라도 바리스의 화염검에는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래 네놈은 눈치가 필요해 보이군. 유인하기도 전에 찾아와 줘서 고맙지만 말이야. 여러 수고가 줄어들었어. 끌끌.”
“외로웠나? 말이 많군.”
나도 카르미단도 괜히 말을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호흡으로 상대의 호흡을 덮기 위한 시도, 다음 스킬을 위한 기세의 증폭이었다.
바리스는 제단을 향해, 나는 수희와 함께 카르미단을 향해 달렸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다. 미리 선점한 장소에 준비하는 마법사는 마법사보다 탁월하게 뛰어난 자도 이기지 못한다.
카이바린 교단에서 미궁 5층으로 쳐들어오지 못한 이유도 이와 같다. 나와 에드샤의 무력 때문이 아니라, 에드샤의 마법이 준비되어 선점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곳은 카르미단에게 선점된 곳이다.
‘선점되었지만, 대비가 되지 않은 곳이지.’
카르미단은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나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 아리나란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인간이라는 정의를 뒤집기 위해 준비했다.
카르미단이 나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욕심이 많군.”
나는 그를 보고 공격 태세로 바꿨다. 달려들면서도 공격보다 회피에 대비했던 집중을, 공격으로 당겼다.
카르미단이 공격이 아니라 욕심을 부려 과감히 이점을 가져가려고 했다. 이때, 내가 마냥 회피에 집중하면 이점을 쌓은 카르미단을 상대해야 한다.
그는 아리나란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리나란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녀와 이어진 흐름을 끊으면 그의 대계가 완성되지 않는다.
베르칸에게는 비극이지만, 기회였다.
“넷 샷”
스킬이 아니었다. 기합이자 공격 알림이었다.
내게 [종속된] 돌멩이가 카르미단의 머리 위로 부유하며 상승하고 낙하를 준비했다. 나의 등 뒤로 띄운 석궁구에서 볼트가 쏘아졌다.
마치 거미줄처럼 카르미단의 이동 공간을 압박했다.
어디로 피하더라도 맞을 수밖에 없다. 피하기 유리한 자리로 에리가 돌진해 들어갔다.
넓게 펼친 공격, 넓게 펼쳤기에 방어력이 장기인 전사라면 무시할만한 공격, 하지만 카르미단은 마법사였다. 전사는 무시할 수 있는 공격도 최소한 마법의 흐름을 끊는다.
맞지 않는 위치가 있다. 정면, 회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나는 카르미단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헤스티의 파이어 볼트와 페로의 윈드 스피어가 준비된 것을 느끼며 카르미단을 노렸다.
“감히.”
옆으로 도망 못 치도록 화망을 구성하는 공격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너는 나의 주공격에 피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었다.
노성을 터트리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카르미단은 공격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카르미단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어둠이 더욱 짙어지며, 굴절되어 보일 정도로 두터워졌다.
“학.”
기합을 짧게 당기며 내리쳤다. 기본 중 기본인 내려베기.
정직한 공격, 그만큼 내재한 힘을 토해내기에 충분한 공격이었다.
나의 일격과 카르미단이 압축해 두 손으로 거머쥔 어둠이 충돌했다.
*
카랑--
불꽃이 튀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굴절을 일으키고 그를 가렸던 어둠을 그의 어깨 뒤쪽까지 밀어냈다.
카르미단과 눈빛이 마주쳤다. 전면의 어둠은 밀어냈지만, 두 손으로 꽉 쥔 어둠은 부서지지 않았다.
“왜 그리 감추나 했더니 늙었군.”
나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힘을 더했다. 레리아나의 검은 감정을 표현하는 검이다. 그 감정표현이 무력으로 발현되는 검이다.
칭얼거리듯 웅웅거리고, 질투로 공격에 특별한 효과를 더한다.
레리아나의 검에는 레리아나의 혼이 담겼다. 특별한 효과를 더하지 않더라도 레리아나의 혼에 맺힌 원한은 검날을 더욱 서늘하게 섬뜩하게 만든다.
날카로운 검은 쉽게 무뎌진다. 부서져 버린다.
레리아나의 검이 나를 만나지 못한 채, 리버밸런스와 마주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니었던 레리아나의 검은 리버밸런스를 상대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부서지지 않았다.
나는 기운을 내밀고 흐름을 이끌었다.
마치 절망 속에서 울먹이면서도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소녀 같은 예기를, 예리하나 위태로운 기세를,
그녀의 잃어버린 부모처럼, 평생을 함께할 반려처럼,
검날의 두께가 되어 부서지지 않도록,
기운을 더하며 함께 했다.
격돌.
카르미단의 두 손에 뭉친 어둠이 깨어졌다.
*
“크흐, 네놈, 네놈은 나의 일을 그르치지 못할 것이다.”
카르미단의 입에서 피처럼 어둠이 흘러내렸다. 나의 공격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카르미단의 힘이 다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나의 공격과 부딪히는 순간에도 아리나란과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한 번에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위로하듯이 손가락 끝으로 레리아나의 검면을 훑어 진정시켰다. 이어 헤스티와 페로에게 사격을 지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리나란의 시체를 향해 날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베르칸이 몸으로 막을 것이다.
첫 격돌로 승기를 잡았다. 카르미단이 공격을 위해 뿜어낸 힘을 처리해냈다.
하지만, 아직 승기일 뿐이었다.
카르미단은 제단과 채널링-연결된 상태였다.
제단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워졌다. 이는 와이번 둥지 제단도 마찬가지, 목적은 아리나란의 변화였다.
제단의 목적이 침입자를 처단이었으면, 조금 전의 격돌에서 졌을 것이다. 하지만, 와이번 둥지의 제단은 아직 덫이 아니었다.
카르미단의 공격을 꺾었지만, 카르미단의 존재를 파괴하기에는 부족했다.
카르미단은 제단의 유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지도 제단에 걸어놓았다.
리치와 라이프베슬의 관계와 비슷했다. 제단이 라이프베슬의 역할을 하니 카르미단에게 타격을 입혀도 존재를 파괴시키지 못한다.
“넌 약하지 않아. 하지만, 그뿐이지. 날 배제할 수 없다.”
입으로 어둠을 흘려내던 카르미단이 손을 내밀었다. 헤스티와 페로가 쏘아낸 파이어 볼트와 윈드 스피어를 격멸했다.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막지 못하지.”
제단 위의 아리나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바바리안의 혼은 귀해. 미궁에서 죽어도 미궁에 삼켜지지 않지.”
나는 머뭇거렸다. 고급정보였다. 카르미단이 고급정보를 풀고서 얻으려는것은 시간.
“그들의 신성은 바르하르의 이름으로 싸우는 자의 혼을 거두지, 죽어도 신성의 곁으로 돌아가고 다시 전사로 태어난다네.”
카르미단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어둠이 넘실거렸다.
“신성한 어구는 미궁이 허락한 규칙, 미궁에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건 바바리안뿐이라네.”
어둠이 제단과 이어지며 더욱 짙어졌다.
“그 어찌 이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저 빼앗아 뒤집는 것만으로도 지고한 업이 이루어질 터인데.”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헤스티, 페로.”
지시와 함께 단검을 던졌다. 내가 던진 단검의 뒤로 파이어 볼과 윈드 스피어가 따랐다. 카르미단을 덮쳤다.
카르미단의 어둠이 순간적으로 펼쳐지며 공격을 받아냈다.
“이어 공격해.”
석궁구에서 볼트를 쏘아내는 가운데, 헤스티와 페로가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타격을 주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카르미단이 벌려고 한 시간을 늦추기 위한 공격이었다.
나는 눈치챘다.
‘아리나란은 죽지 않았다.’
차갑게 식었지만, 시체가 아니었다. 완전히 죽었다면 바바리안의 신성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 버린 혼은 아무리 리버밸런스의 사제라도 손아귀에 쥘 수 없다.
이제야 확실해졌다. 아리나란의 몸은 연료가 아니었다. 재료였다.
“베르칸, 카르미단을 상대해라. 아리나란을 이끌 방법이 있다.”
“제발, 부탁하네.”
살려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끌어낸 아리나란이 생명체라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베르칸은 애달프게 대답하고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일행에게 보여준 적 있던 기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마법사를 잡는데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던기술을 썼다.
베르칸은 마치 던져진 투창처럼 카르미단을 향해 돌진했다.
“바리스 검에 마음을 실어라. 나와 타이밍을 맞춰서.”
바리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양손검에 기운을 투사했다.
내게 호흡을 맞췄다. 우리는 제단의 붉은 피막을 향해 레리아나의 검과 선량한 용사의 기운이 서린 검을 휘둘렀다.
‘결을 탄다.’
이때까지 베르칸과 바리스는 붉은 피막을 파괴하지 못했다. 아리나란을 생각하는 마음은 피막을 처치할 생각으로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르다. 의도가 다르면 움직임도 달라진다.
파괴가 아니라 틈을 만들면 된다.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내 손이 아리나란에 닿으면 된다.
바리스의 검이 피막을 밀어냈다. 배격하면서도 이격했다. 처단하고자 하는 의지와 동정하며 검날의 끝에서 밀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동시에 양립했다.
순간적으로 검날에 닿은피막의 구성을 흩트려버렸다. 두 손으로 잡아당긴 나뭇잎이 갈라지듯, 틈을 드러냈다.
나는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레리아나의 원한으로, 수많은 전투와그 전투에서 충돌하고, 격류 하던 기운의 흐름을 경험했던 나의 자아로.
닿았다.
“바리스 그대로 보호막을.”
[어라운드 디펜스]
바리스가 보호막을 일으켰다. 붉은 피막이 보호막 채로 삼킬 것처럼 쇄도해왔다.
종속화.
에리는 내게 종속되었다. 에리를 종속화시킬 때, 에리가 극도로 심약해진 상태이기에 성공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아리나란,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또한, 바바리안의 신성 역시 그녀의 혼을 거두어가지 못했다. 카르미단의 제단이 바바리안의 신성과 그녀와의 이어짐을 약화시켰다.
카르미단의 제단도 아리나란의 혼을 아직 얻지못했다. 제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리나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껴안았다.
[종속]을 시도했다.
“내 것이다.”
나의 선언이 제단 구석구석까지 흘러나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