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65화
“쇠사슬에 꿰뚫린 소녀여, 검은 날개의 소녀여.”
말은 힘을 가진다. 이는 추상을 현실로 끌어오는 힘을 가지는 순간부터 체감하게 된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마법사는 침묵을 지킨다.
마법사는 추상을 현상으로 이끈다. 스스로 내뱉는 거짓이 의도가 어떻든 간에 추상을 손상시키기에 차라리 침묵한다.
전사라고 해도 이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자신의 의지를 몸 밖으로 표출하는 단계에 도달하면, 거짓말은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갈아먹고 퇴색시킨다.
하물며, 다른 교단의 사도급인 리버밸런스의 신도가 내뱉는 말이라면,
거짓말일 수 없다. 양면을 가져 한쪽에서 보면 진실처럼 보이고, 반대쪽에서 보면 거짓이 될지라도, 진실을 가리더라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 마물은 소녀다. 또한, 신도에게 소녀라고 한정해서 얻을 이득이 있다는 의미다.
적인 나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이득.
나는 깨달았다.
리버밸런스의 신도가 강림당한 마물, 검은 날개의 소녀에게 붙잡혀 나온 것부터가 시작이다.
이력으로 일으키는 기적, 이적의 시작.
주문이 시작되었다. 제례가 시작되었다.
“네 집이 어디냐? 집이 어딘지 기억하느냐? 집으로 가자 소녀야. 네게 엉겨 붙은 악의는 진흙과 같으니 털어내고서.”
강림당한 마물이 절규했다.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땅처럼 보이는 바닥에서 구름으로 가려진 천장까지 모든 곳이 진동했다.
“싫어.”
들어본 목소리다. 아니 느껴본 목소리다. 내가 수희를 강간할 때 공응했던 목소리. 진동, 의미.
의지와 기억이 사방으로 터졌다. 흘러넘쳐 격류가 되었다.
“바리스, 일행을 보호해.”
바리스가 용사의 보호막을 전개했다. 헤스티와 수희, 아리나란을 자신의 원안에 두었다. 바리스와 검은 날개 소녀의 힘의 차이가 무지막지하더라도 용사의 결의는 정신 오염에 탁월한 저항력을 가졌다.
나는 바리스의 보호막 앞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사방을 채우고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 같은 물결은 공격이 아니다.
손바닥 끝에 격류에 떠돌던 파편 하나가 박혀 들었다.
-한때는 인간이었다.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갔었다. 조잘조잘 떠들며.-
검은 날개 소녀의 기억. 분명 돌이키면 행복한 시간이었을 기억.
‘그래서, 어쩌라고.’
공감이 일어나기 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의 감정에 매몰되기에는 나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수없이 반복된 회귀에 딱지가 달라붙고 뜯기고 다시 딱지가 달라붙은 내 마음은 강림당한 마물의 기억을 직감하고도 자아를 유지했다.
-단지 함께 게임을 했을 뿐이야.-
그녀와 함께 놀았던 자는 이미 시간 속에 녹아 흔적마저 알 수 없게 되었다. 남겨진 것은 그녀, 그리고 그녀에게 떠넘겨진 악의.
-나, 인간이야, 나를 가지고 실험하지마.-
시간이 지났다. 그녀를 가지고실험했던 마법사, 아라크라크마저 사라져버린 시간.
거의 모든 것이 마모되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리거나 사라졌다. 그녀가 탔던 방주, 게임 속에 갇힌 다른 모든 이들도.
단지 그들의 절망, 분노, 악의가 뭉쳐진 덩어리만을 그녀에게 남기고.
악의만이 그녀와 함께했다. 그녀가 세월에 무너져 사라지지 않게 했다. 그녀의 악몽을 지속하면서.
그녀를 강간하면서.
*
나는 피를 흘렸다. 입과 눈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떨어졌다.
공격도 아닌 단순한 절규가 심상을 뒤흔들 정도였다. 리버밸런스가 탐낼 만했다. 그들이라면 저 악의를 세상을 뒤덮는 힘으로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너무 불쌍해요.”
내 옆에서 바리스가 눈물지으며 나의 손을 잡아 왔다.
나는 전율했다. 검은 날개의 소녀가 아닌, 바리스에. 나마저 피눈물을 흘리는데, 바리스는 깨끗한 눈물을 흘렸다.
그저 동정심으로, 그것도 검을 잡은 채로 전투태세를 유지하면서.
“그녀는 끝을 원하고 있어요.”
예측하지 못했다. 수희의 각성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를 유도했다. 하지만, 이 격류에 접촉한 바리스마저 고고하게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
절규는 타인을 향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뀐 환경은 타인을 대하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불려진 검은 날개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리버밸런스 신도를 붙잡은 검붉은 선이 쇠사슬처럼 찰랑거렸다.
“마법사! 마법사!”
검은 날개 소녀가 울부짖었다.
“난 가은이야. 난 천사가 아니야.”
강림당한 마물, 검은 날개 소녀는 현재 상황을 현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에게 가해졌던 충격의 순간과 현재를 제멋대로 잇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끌끌, 당신이 마법사라고 부른다면 저는 마법사입니다. 아니, 틀리지 않아요. 당신을 가둬 존속시킨 자는 마법사, 그분의 유산을 얻은 만큼, 우리 역시 마법사라 불릴 자격이 되지요.”
늘어졌던 검은 날개 소녀와 리버밸런스 신도를 이은 검붉은 선이 다시 팽팽해졌다.
“죽어. 죽어. 죽어라.”
“죽음이라 아직 그런 일차원적인 변화에 얽매이십니까? 영겁을 경험하고도?”
검은 날개 소녀가 온몸을 드러냈다. 검은 날개를 펼쳤다. 작은 몸에 비해 너무나 커서 기괴하게만 보이는 검은 날개.
날개에는 두 개의 검은 사슬이 매달려 있다. 오른쪽 윗날개에 하나, 왼쪽 아랫날개에 하나.
날개를 꿰뚫은 형태였지만, 한 몸처럼 보였다. 뾰쪽한 암석에 찔린 나무가 암석을 가진 채 자라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검은 사슬이 두 개 더 있었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하나씩 꿰뚫은 사슬이 흔들렸다.
“충실한 하인이군요. 과연 탐이 납니다. 주인에게 속했으나 주인이 품은 악몽을 반복하는 악의라니.”
“사라져. 사라져버려. 모두, 모든 것.”
더 이상 리버밸런스 신도와 이어진 검은 선을 끌어당기지 않았다. 검은 날개 소녀가 날아올랐다.
정점에 올랐다.
하늘 조각이 추락하듯 활강했다. 검은 밤하늘을 깨우는 유성처럼,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낙하점에 완전한 파괴를 선사하는 메테오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내 뒤로.”
바리스가 수희와 아리나란에게 말했다. 정신적 격류뿐만 아니라 물리적 투척에도 위력을 발휘하는 보호막을 키웠다.
보호 반경 안에 들어간 아리나란이 한 발 더 바리스에게 다가갔다. 부서진 파편을 막아내는 바리스에게 속삭였다.
“나도 저런 거 할 수 있을까?”
아이처럼 물었다.
“물론.”
머뭇거리는 바리스 대신 내가 대답했다. 아리나란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연극을 보는 아이 같았다.
파괴와 힘의 격돌을 공포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검은 날개 소녀가 날개를 펼친 것처럼 자신이 피막을 펼치고 강력한 위력을 전개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아리나란도 충분히 쓸 수 있는 기술이다. 추진력과 충격량을 버틸 몸이 필요할 뿐, 그 힘과 몸을 가지기까지가 멀 뿐이다.
*
그 충격을 리버밸런스 신도는 버텨냈다.
그를 중심으로 폭풍이 지나가 크레이터가 생겼지만, 그는 땅속으로 처박히지 않았다.
본능과 기술. 기술이 발전하면 본능으로 가한 위력을 뛰어넘는다.
리버밸런스 신도는 힘을 흘려냈다. 마법으로 층층 보호막을 두르고, 단순히 막아서는 것을 넘어 각을 비틀었다.
검은 날개 소녀의 공격에 맞는 대응이었다. 공중으로 떠올라 급강하하며 내리찍는 공격은 강력하고, 회피도 쉽지 않지만, 사도급의 전투에서는 분석하고 대처할 시간이 너무 길었다.
힘을 비껴내고 완충해냈다.
다만, 검은 날개 소녀에게도 반발이 작용하지 않았다. 소녀가 바로 이어 움직였다.
격돌할 때 끊어진 검붉은 선을 거두고 팔을 꿰뚫은 쇠사슬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녀를 괴롭히며 강간을 재연하던 악의가 무기가 되어 리버밸런스 신도를 노렸다.
이는 리버밸런스 신도도 소홀히 대하지 못했다. 보호막을 믿고 버티지 못했다.
보호막은 공격해 들어오는 힘의 면적이 넓을수록 효과를 발휘했다. 송곳처럼 찔러오는 공격보다 몸 전체로 부딪혀오는 것을 쉽게 막는다.
하지만, 점으로 찍어 들어오는 공격에 약했다.
치러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검은 쇠사슬은 선이었다. 선으로 파고들고 점을 노렸다.
리버밸런스 신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검은 날개 소녀가 다시 팔을 내밀었다. 리버밸런스 신도를 놓친 쇠사슬이 팔에 감겼다.
“블링크···.”
수희가 침음을 흘렸다. 사도 이상급 스킬인데 수희가 알고 있을 정도의 스킬.
그만큼 유명한 스킬이었다.
상성 자체를 와해하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는 전사가 접근하기 전에 화력을 쏟아 쓰러트려야 하고, 전사는 죽기 전까지 마법사에게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블링크는 전사의 접근을 무효화시켰다. 전사는 블링크를 익힌 마법사를 이길 수 없다.
“고마워.”
“무슨 뜻인가?”
다른 곳에서 나타난 리버밸런스 신도가 나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거리를 확보한 마법사는 대화를 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누구를 먼저 잡아야 할지 정할 수 있게 해줘서.”
“나를 잡는다고 해도, 저 소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텐데?”
“그건,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네가 쓰러지고 난 후의 일이니까.”
“클클. 마음먹은 대로 세상일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젊은이군.”
“틀렸어.”
무엇이 틀렸는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신도와 다르게,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젊은이라는 호칭이다.
리버밸런스가 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모두 리버밸런스를 잡는다. 검은 날개 소녀의 반경에 주의하고.”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살해당할 생각이지? 저 검은 날개에게. 스스로 매개물이 되어 제례를 벌이려는 거지?”
리버밸런스가 공간을 격해 이곳으로 소환된 순간부터 의심했다. 리버밸런스 신도는 이를 끊어낼 수 있었다.
무려 블링크를 쓸 정도로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자다.
결코, 능력이 부족해서 끌려온 것이 아니다.
더욱더 거대한 이적을 노리는 것이다. 어떤 이적인지, 무엇을 위한 이적인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힘과 의지, 그리고 매개체.
이적을 발휘하기 위한 3가지 요소.
스스로 제물이 될 생각인 것이다. 의지를 품은 매개체가 되려는 것이다.
다른 교단이라면 어려운 방식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자를 희생시킬지언정 정점에 가까운 자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죽음이 가벼운 리버밸런스라면, 죽음이 완전한 종말이 아닌 상태 변화 중 하나일 뿐인 리버밸런스라면 완전한 희생이 아니다.
나는 검을 들어 리버밸런스 신도를 노렸다.
“수희, 어버스나이트의 이름을 불러도 좋아.”
제물을 다른 신성과 나누는 것, 제단을 더럽히는 좋은 방법이다.
다른 신성을 따르지 않는 내가 가한 공격 역시 제례의 방해가 된다. 나의 공격 역시 마찬가지 방해가 된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경험치 시스템과 비슷했다. 검은 날개 소녀가 신도를 죽이면 신도가 온전한 제물이 되지만, 나와 검은 날개 소녀가 함께 리버밸런스 신도를 죽이면 제례가 퇴색되어 버린다.
“슬슬 약한 척 관두지 그래. 내가 너와 함께 검은 날개 소녀를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2, 3위는 힘을 모아 먼저 1위를 잡는다. 오래되고 명확한 전략이지. 3위가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해야 할 전략이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 네가 먼저 죽으면 제례가 완성될 테니까.”
리버밸런스 신도의 몸이 떨렸다.
“네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