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72화
푸르름이 짙어졌다. 숲의 입구에서 나는 수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스킬, 은신, 전체.’
잠행이 중요했다. 우든 엘프든 다크 엘프든 인간을 발견하면 공격했다. 반격해도 되지만,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자가 나오면 진영 합류가 힘들어졌다.
이쪽에서 먼저 발견하고 대화를 열어야 진행이 편했다.
“훗, 좋아. 내가 필요하다는 거지?”
수희가 미소지었다.
“나의 그늘 아래로 들어오렴.”
몸매를 강조하는 자세로 몸을 살짝 비틀더니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힛.”
그러고 나서 자신도 우스운지 뺨이 살짝 붉어진 채로 키득거렸다.
예전 회차 때의 여왕님 모드의 수희는 나만이 기억하는 모습이 되었다.
그래도 원래 성격이 그런지, 일행과 위기를 함께 경험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 건지, 장난치는 분위기가 튀어나오곤 했다.
어투는 장난이었지만, 스킬은 적절했다.
수희가 가지고 있던 은신이 확장되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일행을 그녀의 그늘 아래에 이끌고 숨겼다.
다만 범위인 만큼, 은신 자체의 위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은신의 특징이기도 했다. 회귀를 통틀어 내가 보았던 최상위 은신도 동급이 경계하면 들키고, 한 단계 아래의 상대라도 집중한 자에게는 들켰다.
그럼에도 악마가 쓰던 범위 은신은 끔찍했다. 바리스의 광역 보호막이 아니었다면, 은신한 악마가 나오는층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수희는 저번 일로 광역 은신을 얻었어. 신도급에게만 통한다고 해도 유용해.’
수희의 광역 은신은 사제급이 특별히 집중하지 않더라도 들킬 가능성이 존재했다.
하지만, 아군의 경계 능력과 합쳐지면 비전투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전투 피로는 미궁에서 가장 무서운 디버프 중에 하나였다. 자신의 몸 안의 기운을 밖으로 표현하는 단계에 이른 강자라도 누적된 전투 피로는 이길 수 없다.
외부에 자신의 규칙을 강제하는 수준에 올라야 전투 피로를 극복할 수 있다.
수희의 광역 은신은 연속된 전투를 강제로 끊을 수 있다. 짧은 시간일지라도 일행에게 휴식을 제공할 수 있다.
“숨어서 적을 고를 수 있다니 대단해요.”
“그렇지? 더 칭찬해. 칭찬해줘.”
헤스티가 웃으면서 분위기에 호응했다. 수희가 스스로도 낯간지러워하면서도 관심에 즐거워했다.
“그럼, 브리핑했던 건 기억하지?”
“네, 숨어서 이동한다. 우든 엘프들을 발견해도 피한다. 다크 엘프 역시 마찬가지. 그들에게 사제급이 있어 들키면 일단 퇴각.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의 전투가 보이면 개입한다.”
나의 확인에 바리스가 요약했다.
“그럼 가자.”
시선을 수희에게 주자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한없이 진지해졌다. 들리지 않게 속삭여 은신 권능을 완성했다.
일행의 기척이 희미해졌다.
헤스티와 페로의 긴장이 느껴졌다. 마법사의 아군 기척 파악은 전사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근접 전사는 한번 흘낏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일행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익숙하지만, 마법사 계열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할 정도로 자기 집중을 중요시했다.
자기 집중을 중요시하는 만큼, 기척 감지가 떨어졌다.
물론 낙오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미궁층 넘어까지 인지해내는 나의 감각에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
* * *
* * *
* * *
드리아데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열한 다크 엘프들.’
쭉 뻗은 팔과 다리, 잘록한 허리, 가녀린 모습과 다르게 드리아데는 전사였다. 나무의 호흡을 몸 안으로 담을 수 있기에 숲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적인다크 엘프 역시 엘프인 것이 문제였다. 동굴에서 사는 주제에 숲을 보고 숲의 길을 파악할 줄 알았다.
숲의 길은 인간의 길과 완전히 달랐다.
인간의 길은 식물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풀과 나무가 짓밟혀 통로가 되어버린 곳, 잡초마저 자라지 못해 땅을 드러낸 곳이 인간들의 길이었다.
하지만, 엘프가 밟은 풀은 생명이 꺾이지 않았다.
우든 엘프는 식물에 친숙했다. 이 친숙은 먹는 것을 포함한 생활에 밀접하다는 의미 이상이었다.
기운 운용부터 식물과 함께했다. 인간은 전신에 기운을 돌릴 때,손끝, 발끝에 도달한 기운을 몸중심으로 되돌리지만, 엘프는 발끝 너머에 도달한 기운을 그 너머의 나무까지 흘려낸 후 되돌렸다.
그래서, 성장이 느렸다. 인간 전사의 전신에 기운을 흐르게 해 자신을 확립하는 단계를 건너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머의 단계에 도달한 우든 엘프는 인간 전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같은 무력 수준의 다른 종족보다 쉽게 자신의 기운을 외부로 투영하고 이용했다.
덕분에, 전사의 한계를쉽게 극복해냈다. 전사처럼 기운을 운용하면서도 외부의 식물과 한 흐름으로 호응하기에 전사이면서도 마법을 부렸다.
숲의 길은 이런 우든엘프의 특성과 연관되었다.
우든 엘프에게 밟힌 풀은 물리적으로 눌러졌음에도 생장에 도움을 받았다.
다만, 식물도 어리고 연약한 개체가 존재했다. 엘프가 표출하는 흐름이라고 할지라도 외부의 흐름이었다.
정성을 들여 이끄는 흐름이 아닌, 밟고 지나가는 흐름을 생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고 약한 개체 역시 존재했다.
숲의 길은 이런 어린 식물 개체가 없는 길이었다. 어린 풀이 있더라도 견딜 수 있도록 상급의 엘프가 미리 정성을 들여서 조치를 취해놓았기에,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길이었다.
‘다크 엘프 놈들, 우리의 순찰로를 파악했어. 나무와의 교류를 잃은 주제에.’
적이 엘프가 아니라면 숲의 길을 파악 당할 리 없었다. 다크 엘프는 불을 가까이하면서 나무와의 교류를 잃었다.
하지만, 나무를 자르고 불에 태우는 주제에 숲의 길을 볼 줄 알았다.
‘마드리, 피멜리. 제발 무사해야 해.‘
드리아데는 두 엘프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린 엘프였다. 몸이 가벼워 풀을 짓누르지 않았다. 품은 기운이 약하기에 숲에서 마음껏 달려도 기운으로 어린 식물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다만, 그만큼 감각이 떨어져 숲의 길을 느끼지 못했다.
‘병력에 여유가 있었다면.’
전쟁 상황은 어려웠다. 아니 밀리고 있다.
싸울 수 있는 어른은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식량 마련은 어린 엘프의 일이 되어버렸다.
원래 엘프는 숲에서 식량을 걱정하지 않았다.
광활한 숲이 있다면 열매만으로 살았다. 광활한 숲이 없으면 엘프는 나무가 나누어주는 어느 부분이라도 먹어 자신의 영양으로 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그루의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은 한계가 있었다. 나무를 상하게 하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다크 엘프가 하는 짓과 같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어린 엘프들이 식량을 구하러 가는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다크 엘프들은 우든 엘프의 이런 사정을 너무 잘 알았다.
* * *
* * *
* * *
수희의 범위 은신을 유지한 채 숲 외곽으로접근했다.
‘엘프의 전장’ 미궁층은 크게 두 가지 지형이 맞물린 형태였다.
접경 지역을 경계로 숲과 암석지대가 서로 반대편 끝에 위치했다.
다만 암석지대라고 해도 나무가 없지 않았다. 바닥에 암석이 보일 정도로 나무가 드문 정도였다.
접경 지역에서 멀어질수록 숲은 웅장해졌고, 이는 반대쪽 암석지대도 마찬가지였다. 암벽이 계곡을 이룰 정도로 거대하고 거칠었다.
일행은 주 전선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숲 외곽 쪽으로 접근했다.
예전 회차와 지형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주의.’
나의 신호에 일행이 경계했다.
두 명의 어린 엘프가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나무줄기로 듬성듬성하게 짠 가방을 등에 메고 나무에게 다가가 속삭이는 모습은 목가적이기까지 했다.
나무에게 허락을 받고 가지고 있던 짧은 칼로 가지를 잘라냈다. 살짝 다듬어 등에 멘 가방에 담았다.
어린 엘프라도 엘프는 엘프였다. 잘라낸 가지는 다른 나무에 가려 금세 시들 가지였다.
바리스가 어깨를 살짝 올렸다. 당장 끼어들고싶다고 신호를 보내지 않았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만 봐도 품은 생각을 추측할 수 있었다.
두 어린 엘프 때문에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엘프만이라면 얼마든지 숨어서 지켜볼 바리스였다.
’참아라.‘
나는 바리스에게 손짓했다. 은신 중이기에 미약한 신호지만 바리스는 알아볼 것이다.
얕은 갈색으로 살짝 태운 듯한 피부의 엘프가 우리처럼 숨어 있었다. 그 다크 엘프는 일행이 지켜보고 있음을 몰랐다. 그저 두 어린 엘프를 사냥감을 쫓는 짐승처럼 주시했다.
일행은 바로 다크 엘프를 처리할 수 있다.
바리스의 마음이원하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바로 어린 엘프는 도망칠 것이다. 그 뒤를 쫓는 건 또 다른 약탈자임을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숨어 있던 다크엘프가 움직이려는 낌새를 느꼈다.
’나에게 어린 엘프 생사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 엘프가 둘인 덕분에 타이밍 잡기가 수월해졌다.
어린 엘프 하나가 다크 엘프에게 상처를 입되, 치명상이 되기 전 타이밍에 끼어드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어린 엘프 하나가 죽고 또 다른 어린 엘프가 죽기 전에 끼어드는 건 쉬웠다.
다크 엘프가 수풀에서 뛰어나갔다. 땅을 박찼다.
땅 위에 돋아난 풀을 밟고 달려나갔다.
흔적이 남아 우든 엘프에게 추적당할 테지만, 그때쯤이면 이곳을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힘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바리스가 인상을 썼다. 그래도 뛰어나가지 않았다.
나의 지시를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크 엘프의 검이 어린 엘프의 목이나 심장이 아니라 무릎 아래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끼악.”
놀린 비명이 터졌다. 어린 엘프가 어찌할 틈도 없이 장딴지를 긁었다.
연속 공격처럼 바로 나머지 한 엘프의 배를 주먹으로 쳤다.
나는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천천히 나갔다. 급하지 않았다. 다크 엘프의 의도는 파악되었다. 살해가 아니라 납치가 목적임이 분명해졌다.
“멈춰.”
바리스가 흉맹한 기세를 키워 달려나갔다. 인질까지 휩쓸어버릴 것 같은 투박한 압박이지만, 세세하게 계산된 동작이었다.
인질도 함께 쓸어버릴 것처럼 달려들면, 적에게인질이 단순한 짐이 되어버림을 알고 유도하는 것이다.
다크 엘프가어린 우든 엘프가 차냈다. 배를 맞아 고통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소녀가 튕겨 나갔다. 바리스의 의도대로움직였다.
다크 엘프의 검과 바리스의 검이 부딪혔다.
다크 엘프가 위험을 각오하고 어린 엘프를 차냈다는 사실이 바리스의 검에 망설임을 심었다. 미혹에 빠진 바리스는 다크엘프를 일격에 격살하지 못했다.
나는 바리스에게 지적도 위로도 보내지 않았다. 바리스가 이 미궁 끝까지 안고 가야 할 고뇌이자, 번뇌였다. 그리고 이 지독한 세상은 이를 성장과 엮어놓았다.
나는 그저 목적을 위해 움직였다.
장딴지에 상처 입은 어린 엘프에게 다가갔다. 상냥하게 웃으며 깨끗한 천을 내밀었다.
“괜찮아?”
어린 개체는 타인의 호의와 악의를 본능적으로 파악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본능을 뛰어넘는 속임수에는 속절없이 넘어가는 것이 어린 개체였다. 거기에 엘프는 더 쉬웠다.
“고맙습니다.”
어린 엘프가 내가 내민 천을 받았다. 상처 입은 장딴지를 감싸고 내게 고개 숙여 감사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