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84화
단정한 단발머리, 먼 곳을 바라보는 눈, 긴 팔과 긴 다리.
어린아이로 착각할 만큼 앙상했던 몸은 이미 매혹적인 선을 만들었다.
에리가 얼굴을 드러낸 채, 앞장을 섰다. 그 뒤를 다섯의 우든 엘프와 다섯의 다크 엘프가 로브를 덮어쓰고 뒤를 따랐다.
징-. 에리는 레리아나의 검의 진동을 닿은 손으로 느꼈다.
잘하고 있다는 신호.
에리는 살짝 숨을 내쉬었다.
레리아나의 검은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투영하는 검. 에리 자신이 레리아나가 즐거워한다고 느낀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흐르는 핏자국’의 소유지.
대리인 ‘에리’는 첫 번째 외부활동을 시작했다.
저택 주변의 몬스터와 도적의 제거.
에리가 아니라 신도급인 엘프들만 보내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양민과의 접촉 가능성 때문에 에리가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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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는 잘하고 있어.”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에드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귀찮게 해서 미안. 이어져 있으니 어련히 준영씨가 알아서 할 텐데.”
“아니, 귀찮지 않아. 에리의 성장을 위해서 간섭하고 있지 않지만, 나도 집중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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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일 전에 수희가 사다 준 땅과 저택에 도착했다.
오는 데는 반나절 정도 걸렸다. 미궁 입구에서 꽤 멀었지만, 다른 교단이나 권력자가 없는 험지였다.
원래라면 숲과 숲을 소유한 귀족이 숲에서 나는 채집물과 짐승들을 사냥해 수입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버린 땅이 되어버렸다.
저택 아래쪽으로 가면 작은 강이 있어 소수의 사람이 모여 살지만, 마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규모였다. 세금을 피해 모여든 가난한 난민에 가까웠다.
국가의 소유가 아니다 보니 치안의 공백 지대였다. 인간 범죄자뿐만 아니라 토벌되지 못한 소형 몬스터도 덤벼드는 곳이었다.
‘침식 저항을 보니 보통은 일주일, 무리하면 십 일까지 미궁 밖에 있을 수 있어.’
도착한 첫날은 바리스, 헤스티에게 경계를 지시하고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궁 지하 5층에서 가져온 순수한 광물을 이용해, 저택과 땅에 대한 종속력을 늘이기 위한 균일하고 흐름이 원활한 도형을 그렸다.
에리와 에드샤를 비롯한 내게 종속된 이들을 [종속물 배치]를 통해 불러들였다.
그렇게 저택에서 적응과 휴식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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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리아나가 그렇게 좋아할지 몰랐어.’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 일부까지 불러들여 배치를 완료해 상황이 안정되자, 핑크빛 검기를 흩뿌릴 정도였다.
원래 목적이었던 바리스와 헤스티는 상념에 빠질까봐,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모습인데, 레리아나는 거의 허물어져 가는 저택을 마냥 좋아했다.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들을 마치 메이드처럼 부렸다. 레리아나도 나와 함께 한 만큼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알았다.
저택을 새로이 꾸몄다. 흙으로 벽을 보강하고 우든 엘프로 하여금 가구를 만들게 했다.
안주인의 기분을 냈다.
그 결과, 에리가 주변의 몬스터와 도적을 토벌하는데도 따라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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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는 허리에 찬 레리아나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레리아나의 검은 괜찮다는 듯이 다시 징하고 울렸다.
눈앞에 엎드린 사람들, 허가 없이 살던 이들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에리가 로브로 몸을 가린 엘프들과 함께 오자 공포에 떨었다.
“허가 없이 숲으로 들어서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농지를 늘이는 자 역시 마찬가지다.”
에리는 미리 준비했던 데로 선언했다.
다시 한번 레리아나의 검이 징하고 울렸다. 잘했다는 의미였다.
엎드린 사람들을 한 번씩 노려봐주고 에리는 몸을 돌렸다.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들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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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변을 토벌하고 저택 아래쪽에 자리 잡은 농민들에게 경고를 전하고 온 에리를 맞이했다.
“잘했어.”
“부끄러웠어요.”
“편하게 생각해. 그들에게 우리는 행운이니까.”
물론, 농민 중에 행운이 아닌 자도 있다.
강가의 농민과 산속의 도적. 단순하게 보면 도적이 농민들을 마냥 약탈할 것 같지만,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도적들도 생활은 하는 법이었다. 또한, 단순히 노동과 식량 등을 제공하는 정도를 넘어, 여행자나 다른 난민이 마을에 들리면 그 정보를 도적에 팔아먹는 농민도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무력을 본 이상, 떠날 테지.’
“아마, 그들 중에서 촌장을 뽑아 인사하고자 할 거야. 그때도 에리가 나서줘.”
“으, 부끄러운데.”
“중요한 일이야. 부탁해.”
“네, 알겠어요. 사실 어렵지 않아요.”
외부인을 대하는 일을 에리에게 전담시키자, 바리스와 헤스티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사회 경험만 보면, 수희가 가장 탁월했다. 살벌한 권력 다툼을 딛고 홀로 섰다.
다음으로 바리스와 헤스티가 일반적인 신참 탐색자의 경험을 가졌다.
하지만, 수희는 이미 이름이 알려졌다. 어버스나이트와 수희에게 원한이 있는 자는 이 저택까지 노릴 것이다.
나와 바리스, 헤스티는 초반의 강도짓으로 악명이 있었다.
‘강해졌으니, 초반 악명은 다 덮을 수 있지만.’
다만, 바리스와 헤스티가 나와 만나기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문제였다. 아는 사람들을, 특히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비난은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차라리, 권력까지 얻은 다음에 만나는 것이 나아.’
미궁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 미궁으로 들어와야 할 사연을 가진 바리스와 헤스티의 예전 인연이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리가 사회 경험이 미숙해서 어떤 실수를 하든 우리가 가진 무력은 굳건했다. 지켜보다가 혹 수작을 부리면 개입해서 보복하면 될 뿐이다.
또한, 에리에게 동정을 바라며, 연기하고 속이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심약하지 않아. 에리는 귀족 아가씨가 아니라, 뒷골목에서 굶어 죽어가는 거지 아이들 사이에서 자라났으니까.’
그 때문인지 에리는 아래를 보며 나서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택을 대표하며 외부인을 만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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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요. 와서 좀 들어줘요.”
저택의 밖에서부터 수희가 소란스럽게 떠들며 다가왔다.
에리가 주변 지역을 엘프들을 이끌고 소형 몬스터와 도적을 토벌하는 동안, 바리스와 헤스티는 저택과 주변을 엘프들과 함께 꾸몄다.
그동안 수희는 이동 인구가 있어 상시 열린 상점이 있는 도시에 가서 생활필수품을 사 왔다.
바리스와 헤스티가 웃으면서 에리를 데리고 나갔다.
생활필수품들, 미궁 안에서는 관리가 번거로워서 생략하는 물품들.
“뭐가 이리 높아요?”
“대부분 천이야.”
향신료처럼 충격에 약한 것은 배낭 안에 넣고, 머리 위로는 그녀의 키만큼 높게 천을 사 왔다.
“천이 이렇게나 필요해요?”
“뭘 모르는 소리. 난 바닥이 딱딱한 거 싫어.”
헤스티의 의문에 수희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나를 살짝 보곤 고개를 확 돌렸다.
“침대용이군요.”
바리스마저 뺨을 살짝 붉히고는 수희가 가져온 천을 받았다.
미궁 안에서는 침대를 쓰지 않았다. 로브와 망토가 잠자리 깔개가 되고 덮개가 되었다.
아무리 로브와 망토가 비싸고 고급품이라도 여행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효율적으로 차단해주고, 긁히는 상처가 없도록 보호해줄지언정 풍성한 천의 폭신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깊이 잠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미궁 생활이 더 익숙한 에리가 물었다.
“흠흠. 잘 때 쓰는 용도가 아니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리를 두고, 수희를 비롯한 바리스, 헤스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목공에 익숙한 우든 엘프와 제작에 익숙한 다크 엘프를 갈궈서 다섯 여섯 명은 함께 잘만한 침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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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네 번의 밤이 지났다.
침대 완성 후 첫 번째 밤은 바리스가, 둘째 밤은 헤스티를, 그리고 세 번째 밤은 수희가 함께 했다.
우든 엘프들과 다크 엘프들은 침대가 어떤 용도인지 알아차렸다.
드리아데도 알아차렸다.
네 번째 밤을 함께 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드리아데는 지난밤을 떠올렸다.
바르게 생장하기 위해서 잘라내야 하는 가지를 모아 만든 침대. 자투리 나뭇가지를 모아 큰 가구를 만드는 일은 우든 엘프에게 쉬운 일.
그래서, 우든 엘프가 보아도 기분이 좋았던 침대.
햇빛과 바람에 바싹 말린 부드러운 이불.
그 위로 자신을 이끌던 강한 수컷.
예감하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했다.
우든 엘프 수호자의 종족 번성의 당부가 없더라도 드리아데 역시 종족을 위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거기다가 준영씨가 말을 해주지 않았지만, 다크나이트에게 희생되었던 혼을 구하는 데도 연관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을 줄이야. 처음은 고통스럽다고 들었는데.’
오래된 문헌을 보면 외부에 나갔다가 돌아온 엘프의 이야기가 있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채 돌아와 다른 엘프에게 경계를 당부했었다.
‘마치 구름 위를 떠도는 것 같았어. 몽글몽글하고 행복한 것이 마구 막.’
드리아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마치 아름다운 숲을 그리워하듯 지난밤을 떠올렸다.
‘그가 내 어깨를 잡고 깊숙이 눌렀을 때는 정말 놀랐지.’
자신의 몸에 타인이 들어오는 감각, 고통과도 닮았지만, 구분할 수 없는 파고들여지는 감각.
몸 안으로 느꼈던 확실히 존재감.
‘뜨거웠어.’
그때,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
괜찮냐고 묻는 질문이지만, 귓가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마냥 들뜨게 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드리아데는 자신이 했던 대답은 기억 안 났지만, 준영의 행동을 통해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발을 그가 잡고, 어깨 위로 올리니까, 아래의 거기가 그대로 올라와서, 그대로 강하게.’
“하아.”
드리아데는 자신이 내뿜은 한숨에 자신이 놀랐다.
준영씨에게 안긴 여자들이 행복해하는 이유를 알아낸 것만 같았다. 기분이 점점 더 엄해졌다.
다시 사랑받고 싶어지는 기분.
“흐으, 그래도 복기를 해야 하는데.”
준영씨는 자신을 단순한 욕망의 배출구로 대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자상하게기운을 운용해, 드리아데를 덥히고 간지럽혔다.
드리아데의 수준에서는 넘볼 수 없는 경지. 자신의 몸을 향해 이어지는 운용이라 배움으로 가꿀 수 있는 자극.
드리아데는 무릎 사이에 턱을 올리고 부끄러워했다.
‘어쩔 수 없잖아. 자극이 너무 감미로웠단 말이야.’
꿈에 빠지듯이 성감에 몰입하고 말았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들이며 흐느꼈다.
그 때문에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와서 준영이 떠나버린 침대 위에서, 받았던 감각을 성장으로 이끌기 위해, 혹 잊을까 봐 자리조차 옮기지 않고 복기를 했다.
그래서, 자신의 손이 준영이 지나갔던 길을 되새기고 있음을, 마치 어젯밤의 여운에 자위하는 풍경을 만들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
“물 가지고 왔어.”
드리아데는 재빨리 손을 당겼지만, 이미 들켰다.
준영이 웃는 것이 보였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으으, 네.”
드리아데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턱을 들어 올리는 손짓에 순응하며 곧 파고들 준영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