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96화
아리나란이 아리시를 챙겼다. 아리시는 에리가 주었던 방패를 꼭 잡고 아리나란을 따랐다.
아리시는 멍하게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방패술을 쓰는 전투는 가능했다.
기술보다는 생존 본능에 따른 반응. 아리나란이 피막을 펼쳐 날 때, 몸쪽을 향한 화살을 막아줄 수 있는 만큼 전투 인원으로 포함되었다.
‘아리시에게 경험치가 가는 것이 나쁘지 않아.’
원래 존재인 검은 날개 소녀는 아군이 아니지만, 아리시는 아리나란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생존이 아리나란에게 얽매여졌다.
아리나란이 피막을 거두면,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는 것이 전부였다.
바리스는 아리시에게도 마음을 열었다. 아리나란에게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아리시가 없었다면, 아리나란의 정신이 이렇게빨리 회복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다.
*
음습한 골짜기, 산등성이에 오르자 골짜기 사이에 놓인 제단이 보였다.
특별한스킬이나 장애물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적을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적도 우리를 볼 수 있다.
이때까지 수희나 에리는 물론, 마법사까지 모습을 보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법사도 시야를 확보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고, 무엇보다도 마법사가 노려지더라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바리스만 모습을 드러낸다.”
바리스가 결의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오크 신성의 제단이 있는 영역으로 들어섰다.
나는 바리스에게 신호를 보냈다.
‘방어 준비.’
피를 머금은 옷을 입은 오크 사제가 우리를 보았다. 험상궂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단검을 쥐었다.
“미혹 속에 떠도는 망령이여, 신성의 글레이브 아래에 찢어질 것이다.”
적은 견제가 아니라 시작부터 강력한 수를 내밀었다. 그럴 만했다. 일행의 강력함은 초반의 요새 방어전에서 경험해봤을 테니까.
거기다가 오크는성격상 유인이나 매복 전술을 펼치지 못한다.
[오크 신성 헤토르칸의 주시]
오크 사제가 자신의 피를 제단에 뿌리며 권능을 발휘했다.
사냥감을 보는 잔혹한 시선이 바리스에게 이어졌다.
“크흣.”
바리스가 신음을 흘렸다. [분노의 일격] 전에 이루어지는 [신성의 주시]부터 압력이 가볍지 않았다.
“내가 뒤에 있다.”
나는 바리스의 뒤에 섰다. 바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신성은 현상에 쉽게 개입할 수 없다.
미리 확보한 인과가 아니라면, 일반인 하나 죽이는데도 신성은 인과율을 소모했다.
일반인도 부담이 되는데, 바리스를 비롯해 일행처럼 운명을 개척하는 이가 되면자신의 존재를 흔들만한 자해가 되어 버린다.
[신성의 주시]는 격의 차이로서 대상을 압박하는 동시에 대상에게 개입할 인과를 얻는다.
이는 오크 신성만의 특징이다. 오크는 싸우기 위해 태어난 종족.
오크의 사냥감이 됨으로써 오크와의 인과가 성립되고, 오크와의 인과가 성립하면 오크 신성과도 인과가 성립된다.
그 때문에 제단을 이룬 오크 사제는 신벌과 같은 체계를 가지는 [분노의 일격]을 끌어낼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신성의 주시]와이어지는 [분노의 일격]을 감당할 수 있다. 신성들과 충돌하면서 나의 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바리스는 원래부터.’
나는 사도를 처치하면서 사도급이 되었다. 하지만, 바리스는 인간이면서도 격에 얽매임 없이 결과를 도출한다.
‘용사가 굳건한 마음을 품었을 때, 격의 차이가 무의미해진다.’
“준영씨.”
바리스가 [주시]를 받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뒤에 있는 나를 느꼈다.
“그래, 함께 한다.”
“네, 준영씨.”
바리스가 압박 속에서도 미소지었다. 바리스와 나누었던 교감이 마음을 이끌어내고 마음을 육체에, 의지를 보호막에 담았다.
나의 허리에 매달린 레리아나의 검에 핑크빛이 얼굴을 붉히듯이 머물렀다. 핑크빛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훔쳐보는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분노의 일격]
피할 수 없다. 신성의 격을 담은 일격이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 들이닥쳤다. 신성의 도끼가 들어 올려지는 고점에서 내리찍어 닿는 바리스까지 공간이 무시되었다.
시작된 순간 이미 몰아쳤다. 내리찍는 동작은 있으나, 걸리는 시간이 삭제되었다.
충돌.
땅이 파이고, 키가 작아 장애물이 되지 못했던 식물들이 끊어지고 흩날렸다.
나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
바리스의 등에 닿은 손에 바리스의 걱정하는 마음이 전해져왔다.
막대한 충격에 바리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를 걱정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제단을 바라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스는 [분노의 일격]을 막아냈다.
나는 등에 멨던 창을 잡았다.
엘프들에게 창을 가르치면서 나 역시 창을 수련했다. 예전 회차에 이미 익숙한 무기이지만, 첨예하게 갈고닦았다.
바리스의 등 뒤에서 벗어났다.
분노의 일격을 막아내는 것, 그 자체가 신성에 대한 접근이고 극복해내면 그만큼의 성장이 뒤따르기에 바리스를 앞세웠었다.
“나머지는 우리를 믿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아리나란을 불렀다.
아리나란의 피막은 나의 영역으로 소환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이면서, 감싸는 존재를 외부의 충격에서 보호하고 자극에서 격리하는 내부이기도 하다.
“명상에 집중해.”
바리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나란의 피막으로 바리스의 몸이 가려졌다.
나는 창을 잡아 어깨 뒤로 당겼다. 발달한 근육이 힘을 압축하고 쏘아내는 한순간을 예비했다.
창이 공기를 갈랐다.
[분노의 일격]과 일격을 받아낸 바리스에 대한 경탄에 전장임을 잊었던 모든 이를 깨웠다.
*
깃발을 든 오크의 가슴을 꿰뚫었다.
지극히 세속적인 창,
신격과 인간의 이야기를 사냥과 사냥감의 이야기로 되돌렸다.
오크들의 본성을 일깨웠다. 사냥을 방해받은 사냥꾼의 분노를, 이빨을 드러낸 사냥감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게 만들었다.
아리나란이 몸을 부풀렸다. 와이번처럼 날개를 펼쳐 아리시를 붙잡고 바리스를 품어 먼저 뒤로 날아올랐다.
사냥꾼은 도망치는 사냥감을 쫓는다. 오크의 본성에 사냥꾼의 본능이 더해져 포효를 터트리고 달려왔다.
짐승과 다른 것은 전술적으로 쫓는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쫓느냐의 선택일 뿐이지.’
도발을 참고 웅크린다는 선택지는 없다.
산등성이를 넘었다.
미리 보아둔 지형.
아래로 급경사지만 우리나 오크가 뛰어내려도 상처 입을 경사가 아니다. 다시 뒤돌아 오를 때, 방해를 받으면 귀찮을 정도.
함정도수작도 없다. 그저 싸울 수 있는 전장.
접전의 승리를 자신하는 오크는 결코 함정으로 판단하지 않을 공간.
“아, 바리스 정말. 경지가 또 올라가면 어떡해. 기껏따라잡냐 했더니만.”
수희가 나신을 드러내며 두 개의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바리스의 활약에 경의와 질투를 보내면서 무심한 눈으로 달려드는 오크를 파악했다.
탱커의 위치를 잡았다.
우든 엘프 드리아데와 다크 엘프 피리레가 필요 이상의 긴장을 끌어올렸지만, 이전부터 함께 했던 멤버는 그저 전투를 준비했다.
드리아데와 피리레는 수희가 탱킹하는 모습을 파티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훈련에서밖에 보지 못했다.
수희가 바리스에게 탱킹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경쟁심을 품고 있음을 몰랐다.
“내가 보조한다.”
“칫.”
나의 말에 수희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입으로 투덜거리면서 나와 함께 탱킹 라인을 만들었다.
수희의 특기는 공격성.
진영 안쪽에 마법사를 보호하는 에리만 있을 때는 수희의 공격성을 발휘하기 위해 변화를 가미해도 좋지만, 두 엘프가 참가한 만큼,안정성을 낮출 수 없다.
드리아데와 피리레는 창으로 거리를 가지고 공격한다고 해도 접근전을 펼쳤다.
하지만, 내가 수희와 호흡을 맞추면 수희의 공격성과 두 엘프의 공격력까지 확보된다.
수희의 짧은 검이 내리찍는 오크의 도끼를 쳐냈다.
그 빈틈을 두 엘프가 짧은 기합과 함께 파고들었다.
딜러의 수희라면 도약해 오크에게 몸이 닿을 정도로 접근해 검을 깊숙이 찔러넣었겠지만, 쌍검 중에 긴 검에 무게를 담아 오크를 밀어내듯이 긁었다.
치명상은 없지만, 오크의 중심이 흔들렸다.
[워러 볼]
머메이드 네리미아의 마법. 물의 힘을 담은 물의 공이 오크의 뒤쪽을 향해 쏘아졌다.
네리미아의 수준과 경험이 떨어져 아군을 공격할 위험이 있다고 해도 과한 이격 거리. 맞추지 못한 공격은 하지 않은 공격보다 못하다.
페로의 아이스 스피어보다 느린 워러 볼은 오크가 맞을 리 없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헤스티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사이킥 쇼크]
극한에 달한 숙련도가 작은 동작에 묻어 나왔다.
수희에 의해 중심이 흔들리고, 두 엘프의 창격에 상처 입고, 수희의 밀어내기에 당한 오크에게 물리력이 가해졌다.
오크의 몸을 기괴하게 비틀어내는 힘을 가하면서 [워러 볼]의 도착지점으로 몰아넣었다.
“아흐. 역시 헤스티님.”
치열한 전장에 머메이드 네리미아의 환희에 찬 찬송이 울려 퍼졌다.
“어휴, 그래, 그래. 대단해.”
수희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두 개의 검을 오른쪽 끝으로 모았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빙글 돌았다.
이어지는 회전.
작은 회전이 두 개의 검 끝에서는 거력이 되었다. 그녀의 몇 배나 되는 오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떠오른 오크가 꿰뚫렸다.
페로의 아이스 스피어가 오크를 절명시켰다.
“훌륭해.”
“흐-.”
막상 내가 칭찬하자, 수희는 부끄러워했다.
단순히 오크를 띄우는 공격 하나를 칭찬한 것이 아니었다.
수희는 탱커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상대하는 오크의 호흡은 물론 페로의 준비를 읽었다. 작은 신호 하나만으로 페로와의 연계를 이루어냈다.
수희의 한계였던 좁은 시야를 일찌감치 극복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가자.”
오크의 수를 줄일 것이다. 번성하지 못한 오크는 오크가 아니다. 오크가 아닌 오크는 신성으로부터 기인한 힘을 이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