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주인공이 용사를 숨김 98화
헤스티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눈을 돌려 테이블까지 갖추고 작업 중인 머메이드 네리미아를 보았다. 싱긋 웃고는 오크 시체들 사이에서 쓸만한 것이 없나 수색했다.
네리미아는 정화의 능력을 가졌다. 다만, 그 성취는 사제급에 못 미쳤다.
일행이 치르는 실전에서는 정화로 활약할 기회가없었다.
주력 일행은 물론이고 엘프들을 오염시키려면, 적이 사제급 이상의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 이하의 오염은 집중을 요구하고 시간이 걸리는 네리미아의 ‘정화’보다 스스로 저항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후에는 압도적인 환영을 받았다.
네리미아가 앉은 테이블 옆에는 무기와 장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리고 준영이 소환해 온 깨끗한 물을 뿌리고 [정화]를 시전했다.
물기를 닦아내는 것은 엉겨 붙은 피와 진득한 사기를 제거하는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준영이 직접 종속할 때도 정화된 물건이 더 쉬웠다.
준영뿐만 아니라, 엘프들의 네리미아에 대한 호감이 쑥 올라갔다.
전리품을 미궁 5층 거점이나 미궁 밖 저택으로 옮길 때, 직접 종속하기도 하지만 엘프들의 몸에 딱 붙이고, 엘프들의 장비로 인식시키고 옮기기도 했다.
생사를 가르는 전투가 아닌 상황에서는 깨끗한 물건을 선호하는 것이 당연했다.
* * *
* * *
나는 바리스와 함께 아리나란, 아리시를 이끌었다.
칭얼거리며 달라붙은 아리나란.
나와 바리스는 아리나란을 제물로 삼았던 리버밸런스의 제단이 아니지만, 혹 제단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남아 있지 않을까 유심히 살폈다.
아리나란이 마음 편하게 제단 위에 걸터앉았다.
제단을 그저 내가 종속시킨 사물로 보았다. 근본적으로 영기를 띈 물건에 내가 집중력을 발휘한 만큼 더 편하게 여겼다.
“아리나란 이거 먹어볼래? 아리시도.”
바리스가 지하 15층 아래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상급 마석을 내밀었다.
“응, 좋아.”
아리나란은 평상시 몬스터에게 피막을 촉수처럼 박아넣고 영양을 흡수했다. 아리나란을 저리 만든 리버밸런스를 원망할지언정, 일행 중에 식사 방식 때문에 아리나란을 꺼리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식사를 바꾸려는 이유는 좀 더 정순한 기운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아리나란이 마석을 삼켰다. 아리시 역시 아리나란을 따라서 마석을 입안에 넣었다.
나쁘지 않은지, 아리나란이 미소지었다.
‘아리시의 성장을 꺼릴 이유가 사라졌다.’
아리시는 마법진에 봉인되어 있던 검은 날개 소녀의 잔해이다. 검은 날개 소녀는 마법진에 힘을 제한당하면서도 리버밸런스 사도급을 상대했었다.
검은 날개 소녀의 원래의 격은 사도와 신성 사이일 것이다.
‘잔해라서 내게쉽게 종속되었던 아리시가회복해, 사도 이상의 격을 되찾는다면….’
그녀를 다시 굴복시킬 유리한 전장이 필요했다.
‘신성 영역이라면 가능해.’
[신성 영역 창조]와 [리제너레이션]
이때까지 누적된 경험치와 오크 신성의 제단을 종속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두 개의 스킬이 새롭게 생겼다.
나는 아리시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머리를 조금씩 쓰다듬었다.
편하게 받아들이는 아리시.
아리나란처럼 친애의 표현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주는 주인에 대한 허락과 닮았다.
‘일행에게는 [리제너레이션]을 쓸 일 자체를 만들지 않을 거야.’
신성 영역이 신성에게 종속된 미궁층과 유사하다면, [리제너레이션]은 몬스터 리젠과 닮았다.
내게 종속된 존재라면 신성 영역 내에서 죽어도 리젠할 수 있다.
‘죽음이 나와의 인연을 어떻게 바꿀지 모르니까.’
다만, 아리시는 선 바깥에 있다. 강함과 유용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약한 우든 엘프와 다크 엘프들도 죽을 위기에 던지고 리제너레이션으로 리젠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 거니까.
*
일행은 빠르게 미궁층을 정리했다.
미궁 지하 16층 ‘오크 사냥터’의 제단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내게 종속되면서 영성이 거의 사라져 단순한 구조물로 변했다.
“미궁 밖 저택으로 간다.”
휘~익.
수희가 휘파람을 불었다. 다른 이들도 환하게 미소지었다.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휴식에 반가워했다. 미궁 지하 15층과 16층이 쉽지 않았던 만큼, 휴식은 더욱 달콤할 것이다.
“저택에 도착하면 푹 쉬어.”
신성 영역을 미궁 안이 아니라, 미궁 밖에서 창조할 생각이었다.
미궁 밖에서 만든 신성 영역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주목을 받을 것이다.
어버스나이트나 카이바린과 같은 신성뿐만 아니라, 사병을 가진 권력자와 탐색자까지.
단순한 저택과 다르게 미궁처럼 보일 신성 영역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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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으음-.”
헤스티의 가벼운 허밍.
미궁에서 나와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종속체 배치]로 이동이 불가능한 나와 바리스, 헤스티, 수희와 페로까지 함께 인간의 흔적이 가득한 길을 걸었다.
미궁 1, 2층에서 쌓았던 사소한 원한은 청산했다.
어렵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무릎 꿇린 다음 넉넉하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애초에 무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저 바리스와 헤스티에게 앙금이 남을까 봐 수고를 들였을 뿐이다.
“충분히 쉴 거라고 하셨죠?”
“그래, 별일 없다면 한 달까지 생각 중이니까, 여유롭게 생각해.”
“흐으으-.”
헤스티가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적을 감지하는 데 방해받는 수준은 이미 지났다.
오크 사냥터 층을 공략 완료하고 성장하면서 [잠식 저항]까지 늘어났다. 특별한 운용을 하지 않는다면 30일 정도 미궁 밖에서 버틸 수 있다.
‘아마, 창조된 신성 영역에서 잠식 저항이 소모되지 않을 거다. 미궁 밖에서 활동이 더욱 자유로워지는 셈이지만.’
대가가 있다.
미궁 밖에서 [신성 영역 창조]를 쓰는 순간, 최소형 미궁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 되고, 신성들은 신성 후보의 등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미궁 밖 저택과 신성 영역은 권력자들에게 노려보거나 조사해야 할 대상이 된다.
나는 나들이하듯 콧노래를 부르며, 네리미아와 장난치며 걷는 헤스티를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
*
*
숲속 저택의 밤.
평온한 하루.
산처럼 많았던 전리품의 정리도 머메이드 네리미아를 위해 급히 확장한 저택까지 이어지는 물길 내는 공사도 일단락되었다.
경지가 높은 주력 일행은 물론, 환경에 영향을 받는 네리미아도 완전히 회복했다.
작은 숨소리.
잔뜩 긴장한 호흡과 약간의 긴장을 품은 호흡.
문밖에서 들리는 소음.
긴장을 풀라는 듯이 등을 토닥이는 소음.
똑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밤의 은근함이 흩어질까 조심하는 듯한 목소리.
“준영씨, 자요? 잠 드셨어요?”
“그래, 들어와.”
침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바리스와 헤스티는 아니었다. 바리스는 도착한 날 내게 안겼으니까.
“자, 가자.”
헤스티가 옆에서 잔뜩 긴장한 네리미아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주, 주인님.”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귓가의 비늘. 푸른 머리카락이 얇고 부드러운 잠옷에 흘러내렸다.
두려움보다는 기대를 담은 표정.
나는 웃었다.
네리미아가 저택으로 와서 들었을 이야기는 뻔했다. 헤스티는 네리미아의 스승에 가까웠다.
아마도 작은 잡담은 헤스티가 아니라 저택의 엘프들과 나누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저택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넓히고 보강하는 공사까지 했으니 엘프들과 잡담을 나눌 시간은 충분했다.
엘프들은 종족 번성이 염원이었다. 무엇보다 엘프들과 나와의 성은 엘프들에게도 즐거움이었다.
아마도 네리미아에게 잔뜩 바람을 넣을 것이다.
“잘 봐.”
이끄는 말이지만, 자신도 부끄러운지,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
침대로 다가온 헤스티가 두 팔을 내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
놀리고 싶은 마음이 뭉클 피어올랐지만, 그보다 헤스티의 부끄러워하는 아름다움이 더 컸다.
나 역시 헤스티의 몸에 팔을 두르고 입을 가까이했다.
찌르-. 습기를 머금은 두 혀가 엉겨들었다. 부끄러워했던 혀는 은근히 밀려들지만, 끊임없이 올라가는 성감에 굴복했다.
긴 키스가 끝났다.
“하아-.”
성감에 물든 달디단 숨. 나만을 바라보는 눈동자.
숨을 가다듬기 무섭게 다시 다가오는 입술.
나는 짙은 엉김을 원하며 다가오는 헤스티의 입술을 장난처럼 톡 건드리고 머리를 뒤로했다.
의아해하며 내가 물러난 만큼 파고드는 헤스티의 몸.
“헤스티.”
“아.”
내가 조용히 부르자, 그제야 깨달았다.
성감에 붉어졌던 얼굴이 또 다른 이유로 붉어졌다. 키스의 감미로움에 잊고 있던 네리미아를 떠올렸다.
“흐으.”
민망한 지 내게만 보이게 혀를 삐쭉 내밀었다.
이번에는 내가, 내민 혀를 입술로 물어 장난치려 하자, 몸을 뒤로 뺐다.
“네리미아, 이리로.”
“네, 헤스티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에 네리미아를 앉혔다.
기대로 반짝이는 눈, 아직 성감을 모르기에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뺨.
이미 눈으로 본 것만으로도 신체가 반응한 것인지 네리미아가 두 다리를 스스로 비볐다.
“으읏.”
당황해 뿜어내는 숨결. 엘프들에게 야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을 텐데도 마냥 머뭇거리는 혀.
시원한 감촉.
나는 자세가 불안정한 네리미아를 꼭 껴안고 혀로 그녀의 혀를 만끽했다.
성감에 몽롱해지는 두 눈.
헤스티도 성감에 물들어 나의 몸에 기대어왔다.
긴 키스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완전히 풀린 네리미아는 내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는 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나의 남성이 그녀의 아래에 닿고 나서야 뜨거워진 숨을 토해내었다.
“아아. 아-아 하읏 윽.”
느리게 전진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의 한 순간.
작살을 맞은 물고기처럼 파릇 떨었다.
“아흑, 흣 속았어. 아프잖아. 흐읏. 피리레 거짓말쟁이. 흐읏 흑.”
혼잣말 같은 흐느낌.
하지만, 이미 내게 고정된 상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헤스티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거 외에 네리미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천천히 끝까지 밀어 넣었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아픔에 잔뜩 찡그린, 찡그려도 아름다운 네리미아를 즐기며 다시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으 으으.”
어느새 신음이 변했다. 나를 밀어내듯 잔뜩 힘줬던 네리미아의 팔이 어느새 수줍게 나의 몸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