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승리
* * *
켐프텐 주둔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시란느 산하 병력에는 손해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없었다.
전투 초반에 작은 부상을 입어 일찌감치 열외가 된 노예병은 있었지만, 중상자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노예병이라고 해도 엘프가 한 명씩 붙어서 싸웠다.
포로 중에 귀족가 연관이 없는 자들을 골라 노예병으로 들였다.
적 대부분이 공격당했고, 지휘관이 뒤쪽에 있어 항복 시점이 늦었기에 노예병 충원 수는 많지 않았다.
약한 노예병이 있는 엘프 쪽을 우선해서 인원을 충원했다.
“칫.”
수희가 애꿎은 돌멩이를 찼다.
“놓쳤군.”
“네, 그래요.”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손짓해서 수희를 끌어당기고는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보 통제는 실패했다.
이번 전투에서 수희에게 맡긴 일은 두 가지였다.
미리 우회 접근한 후에, 주둔지를 지휘하던 지휘관이 도망치면 그들을 처단하기.
또 하나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감시하는 별도의 첩자를 처치하기.
나는 적 지휘관이 더 고급 인력이라고 판단해서 이를 우선시켰다. 첩자 처치는 후작가에서 아예 주둔지 후방에 다수로 운용하면 놓칠 수밖에 없었다.
수희가 부족하지 않았다. 수희가 적 지휘관의 퇴로를 확보한 상태에서 첩자를 잡아냈는데도 도망친 첩자가 있었던 것을 보면, 후작가에서 이전 전투 시란느 습격에서 정보 차단에 충격받고 추가 투입을 한 것이다.
*
전장을 정리했다. 전리품을 수거하고 시체를 처리했다.
시란느는 백작가에 승리를 알렸다.
또한, 주둔지가 단순히 도적의 아지트가 아니라, 후작가의 병력이라는 증거를 찾아 보냈다.
시란느를 습격하기 위해 나섰던 부기사단장 마그레와 휘하 병사들은 작전에 나가는 만큼, 증거 인멸에 신경 썼지만, 주둔지의 예비물품에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질 리 없다는 방심이기도 했다.
“후작가가 급해졌어요.”
적당히 치운 주둔지의 통제실, 주력 일원과 시란느가 모였다.
적 지휘관이 남기고 간 차를 타서, 일행 모두에게 내놓는 시란느가 미소지었다.
명분상 주둔지의 권리자가 되지만, 실질적인 무력이 중요함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직접 차를 타주면서 알렸다.
“물론이지요. 헤스티님은 강하세요.”
쭐레쭐레 전장까지 따라온 머메이드 네리미아가 코를 잔뜩 세운 채 차를 음미했다.
전장 특성상, 헤스티의 짐을 짊어지고 따라오는 일만 했지만, 마치 자신이 싸운 양 으쓱거렸다.
헤스티가 웃으면서 네리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메이드이긴 하지만, 헤스티를 따르면서 제자를 자처하고 있으니 틀린 감정은 아니었다.
“네, 그렇습니다.”
시란느가 공손히 대했다. 정치적이지 않고 감정적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쉽게 볼 수 없었다.
헤스티는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이에게 냉정한 이가 아니었다. 네리미아가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대로 영향받을 것이다.
네리미아 능력 역시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능력은 전쟁에서도 유용했다.
‘성에는 해자가 있으니까.’
성벽 앞에 구덩이를 이어 파고 물을 채우는 방어시설.
수량을 감당해야 하기에 적절한 장소에서만 가능하지만, 억지로 물길을 당길 만큼 방어능력이 확실한 시설이었다.
네리미아는 머메이드인 만큼, 적은 힘으로도 해자에 간섭할 수 있다.
시란느는 네리미아에게 웃어 보인 후, 원래 화제를 이어갔다.
“백작님께 작업 인원 충원을 요청할까요? 켐프텐 주둔지를 보강해야 할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경계 방향을 바꿔야 하니까요.”
주둔지는 백작가 방향을 경계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제 반대로 후작가를 경계해야 한다.
“병사들에게 시키면 안 돼?”
“아무래도 이번 전투 참가한 이들은 계속 병사로 삼으려고 합니다. 주변 정리나 단순한 진지 보강은 몰라도 반영구적인 주둔지로 만드는 공사와 군사 훈련을 동시에 할 수 없으니까요.”
쉽게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네리미아가 묻자 시란느가 반가워하며 대답했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압도적인 활약을 한 만큼, 시란느의 발언권이 약해졌다. 그 상황에서 원하는 화제로 따라와 주는 네리미아가 기꺼운 것이다.
“작업 인원 충원은 쉽지 않을 거야.”
다만, 나는 의문을 보였다.
“이번 전투로 백작과 시란느 너의 사정이 달라졌으니까.”
“아.”
운을 띄우자 시란느는 바로 알아들었다.
아무리 우리 덕분이라고 해도 시란느는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공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 백작가로부터 작업 인원 충원은 쉽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작에게 주둔지는 적에게 점령당해서 언제든 백작가로 쳐들어올 수 있는 적의 전진기지만 아니면 된다.
“이번 점령으로 우회 공격로는 차단했지만, 주된 경로는 그대로지. 백작가가 방어 진지를 갖출 역량이 있다면, 본가를 강화할 거야.”
“아, 그렇군요. 켐프텐 주둔지는 주 경로와 우회로를 동시에, 양동으로 공격할 때 의미가 있는 요지지요.”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싸웠지.”
“그게 왜….”
“침략자 입장에서는 방어 병력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유리해.”
“음.”
“후작가 입장으로 생각해봐. 우리 쪽에 대해 추가된 정보는 요새를 무력화할 수 있는 화염 마법사.
그 마법사가 지키는 쪽을 뚫어낼 구성과 병력이면 백작가 본가를 노리는 것이 더 낫지. 그렇게 생각하면 더 이상 이쪽으로 공격할 병력의 상한선이 존재해.
백작은 후작을 도발할 생각이 없고, 작은 이득을 가져간 다음 종전을 생각한다면 주둔지를 강화해선 안 돼.”
“목 아래 겨누어진 비수….”
“그래, 백작가에 켐프텐 주둔지가 비수인 것처럼, 후작가에게도 거슬리는 비수지. 백작가만큼은 아니더라도.”
“하지만, 백작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이 켐프텐 주둔지를 저의 거점으로 인정하겠다고.”
“너의 호위대와 동원 병사들이 1/3 이상 사망하면서 점령했다면, 추가 병력과 정비 인력을 보냈을 거야.
후작가에서 보기에 거슬리지만, 역으로 침략당할 위험이 없는 허름한 요새. 뚫을 수 있지만, 병력 소모와 병력만큼 중요한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요새.”
후켄스 백작과 시란느의 이간질은 중요했다.
“그 이상이 되지 못해. 그 이상이면 작은 이득 후에 종전이 아니라 섬멸전으로 가야 하니까. ”
백작을 위해 움직이는 시란느보다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시란느가 우리와 함께하기에 좋았다.
“….”
시란느는 침묵했다. 반박하지 못했다.
애초에 시란느에게 준 명분과 권리는 부서질 것을 전제한 권리였다. 백작가를 위하는 백작이라면 당연한 선택이지만, 당사자가, 특히 백작가를 위해 노력한 당사자가 되면 다르게 와닿는 법이다.
“그리고 나의 목적 또한 달라. 최소한 메밍엔 경작지와 경작 마을을 가져가야겠어.”
“후작가에서 내놓지 않을 거예요.”
나의 말은 더 큰 확전을 일컫는데도 시란느의 어투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전쟁은 확대될지언정 켐프텐 주둔지는 안전해지고, 주둔지가 후방이 되기에 백작이 시란느에게 부린 말장난은 말장난이 아니게 된다.
아예 후방이 되기에, 주둔지 이름을 시란느 마을로 바꾸고 주둔지에서 마을로 전환해도 된다.
그리고 나도 시란느도 후켄스 백작은 확전을 원하지 않을 거라는 언급을 수면 아래에 묻었다.
우리를 이용하고, 우리와 접촉하는 시란느를 이용할 뿐, 시란느를 완전한 심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백작의 잘못일 뿐이다.
앞으로의 방침을 시란느와 공유하지 않은 백작의 탓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 진행하실 건가요?”
이번 전투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에리가 물었다.
“약탈을 할 거야.”
“약탈을요?”
바리스가 수심에 물든 얼굴로 물었다.
반면에 시란느는 특별히 꺼리는 반응이 없었다. 그 자체로도 비극이고 또 다른 비극을 양산하는 약탈은 제대로 된 보급이 없는 전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바리스, 걱정하지마. 일반적인 약탈이 아니니까. 이제 첫 실전을 치른 부대를 데리고 약탈했다가는 규율이 무너질 거야.”
이제야 조직의 모습을 갖춰가는 노예병과 엘프들을 데리고 약탈을 했다가는 규율이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이다.
약탈은 자신이 자란 고향이나 자신 가꾼 밭에서 행해지면 안 된다. 노예병 중에 메밍엔 경작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후작가에 끌려오고 다시 우리에게 잡힌 이도 있었다.
노예병은 이종족 아래지만, 충분한 장비와 난전에서도 생존을 보장해주는 전투에 감탄하고 통제에 따랐다.
하지만, 그런 노예병도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곳을 약탈하는 엘프들을 보면 엘프들을 몬스터로 여길 것이다.
“엘프들과 노예병은 주둔지 정비와 훈련을 부탁해.”
나와 눈이 마주친 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승리까지 경험했으니 노예병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할 것이다.
“나와 수희, 바리스는 후작가의 영지인 메밍엔 경작지로 들어가서 세금징수관 저택과 창고, 촌장과 마을 유지의 저택을 약탈할 거야.”
“그런 거라면…. 우리도 군량을 확보해야 하니까요.”
바리스가 약자에 대한 폭력을 싫어하긴 하지만,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투쟁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강도질이나 도둑질이 아닐까요?”
나를 모르는 시란느는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에 의문을 나타냈다.
3명이 가서 직접 들고 올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오면 강도질이 되지만, 싹 털어오면 약탈이 된다.
세금징수관을 굴복시키기만 해도 그의 저택에 있는 전부를 [종속화]하고 숲속의 저택으로 [종속체 배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