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1화 〉 지원마법사 (111/139)

〈 111화 〉 지원마법사

* * *

후작가 영지는 전쟁을 준비하던 영지였다.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던 영지의 영지민은 다른 곳의 영지민보다 불행했다.

온갖 명목으로 부당한 세금을 거두었고, 정작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장정은 장정대로 징집당해, 끌려간 자도 남은 자도 고통에 허덕였다.

피골이 상접한 노모와 어린 손녀가 있는 집에 몰래 밀 한 포대 두고 오는 건 전혀 부담이 없었다.

바리스의 전투력을 올리는 비용으로는 아주 싸게 먹혔다.

가식임을 내가 알고, 바리스 역시 알고 있지만, 천천히 죽어가는 약자를 본 다음, 살이 피룩피룩 찐 세금징수관을 보면 주먹에 힘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

나는 바리스에게 약속을 하지 못했다. 바리스 역시 약속을 하지 않는 나를 이해했다.

모든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건, 신이라도 되지 않으면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와, 차라리 엘프들이 다스리는 것이 나을 같은데.”

“그럴지도. 최소한 창고에서 썩어가는 식량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수희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이 반가웠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에게서 소식이야. 시란느가 백작가로 소환되었군.”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에리가 보고 듣는 것을 나 역시 인지할 수 있다.

나와 바리스, 수희가 안토니오 후작가 영지에서 약탈하는 동안, 에리는 남은 이들과 훈련을 지속하고 주둔지를 보강했다.

“그럴만하지요. 우리가 한두 군데 터는 게 아니니.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는데, 그리 모아놓았을지 몰랐어요.”

영지를 누비는 우리를 후작가는 막지 못했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금은보석과 같은 작고 가치가 높은 것이 아니었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식량을 노렸다.

다른 도적이라면, 강자가 섞인 도적이라고 해도 흔적이 남고 따라잡힐 수밖에 없는 물품이었다.

이미 턴 양이 마차 단위를 일찌감치 넘었다. 마차라면 열악한 도로에 깊게 남은 흔적은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자신감을 본 시란느도 예상하지 못한 만큼. 백작가에서는 거짓으로 치부하고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소집된 군사는 군량을 소비하는 괴물이었다.

병사가 직접 드는 군량에는 한계가 있고, 수송 자원 역시 유한했다.

그렇기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가까운 후방에 식량을 모아두는 방법을 썼다. 제대로 된 주둔지를 곳곳에 건설할 수 없는 만큼 소규모로 여러 곳을 이용하는 방식이 택해졌다.

이를 기록한 문서를 분석하고 소모량을 계산하는 것이 보급을 담당하는 부관의 큰일이었지만, 안토니오 후작가­후켄스 백작가 전선에서는 이 업무가 필요 없어졌다.

약탈을 이었다.

소환당한 시란느가 약탈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복귀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상위 귀족에게는 원거리에서 통신하는 마법용품이 있지만, 백작가는 우리에게 그 이상의 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

“안토니오 후작이 백작님에게 선전포고를 선언했어요.”

철저하게 털고 복귀하는 나에게 시란느가 알려왔다.

영지에 가해진 대규모 약탈은 전면전 사유로 충분했다. 후작가가 명분을 만들던 작업을 멈추고 전쟁에 올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백작가 방어로 합류하기를 원하십니다.”

시란느는 주둔지를 지켜야 한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

백작가에 대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해도, 시란느의 권력은 백작가가 존재해야 성립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가 뒤를 쳐주지.”

합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첫 격돌을 받아내는 희생양이 될 생각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에서 적을 막으며 죽어간 자보다.”

“….”

“적의 등 뒤에 나타나 마지막을 장식한 자를 영웅이라고 부르지.”

시란느는 이번에도 나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 * *

* * *

고급의 천막. 그날 바로 세운 것임에도 테이블에서 의자까지 제대로 갖춰졌다.

천막 안의 남자들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집중되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에는 나무를 깍아만든 말과 보병 형태의 기물이 놓여져 있었다.

“진작 총력전을 펼쳤어야 했습니다. 뭐, 지금이라도 다행이지요.”

“그렇지.”

부관의 말을 받으며 후작가 기사단장 베리랑트는 미소지었다.

“이쯤 되면 저놈들이 고마워지는군.”

“하하. 그럴 지도요.”

“그 마그레 놈이 살아있었다면 여전히 후작님의 귀를 어지럽혔겠지.”

명예를 모르는 놈. 봉사하는 가문의 문장을 숨기기를 망설이지 않는 놈.

그런 주제에 자신의 자리, 기사단장 자리를 노리던 놈.

차라리, 결투를 신청하고 힘으로 밀어내려고 했다면 이처럼 거슬리지 않았을 것이다. 명예를 몰라도 실력이 있는 놈은 인정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놈은 정치질로 자신을 밀어내려 했다. 조직의 운영 능력이나 전투 지휘능력만큼 개인의 무력이 중요한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쉬운 전투는 되지 않을 겁니다. 참모진은 최소한 3명의 마법사를 예상합니다.”

“대지력을 부리는 마법사, 화염을 자유롭게 부리는 마법사 하나, 그리고 습격을 따라다닐 정도로 체력이 강한 마법사 혹은 마전사.”

“세 번째는 정체를 확정하기 까다롭습니다. 소각에 특화가 된 마전사일 수도 있지만, 최상급의 마법용품이나 제물을 바치는 신성을 믿는 사제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도한 놈이지. 식량을 없애버리다니.”

적은 보급 창고를 습격했다.

적에게 운송능력이 있다면 가져갔을 테지만, 수송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처리했다고 봐야 했다.

일반적인 처리방법은 불태우는 것이지만, 화재는 멀리서도 습격을 알아차리게 한다.

빠른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습격자는 특별한 처리방법을 사용했다.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했다는 면에서 쉽게 볼 수 없습니다. 습격으로 우리에게 점진적인 장기전을 배제시켰습니다.”

“덕분에 후작님께서도 과감한 결단을 내리셨지. 후작가의 주된 전력 전부를 모으셨어. 반드시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게.”

“그 때문에 후작님께서 습격자의 정체와 처분에 대해 국경을 마주한 다른 영주님과 공유하기로 약속하셨죠. 덕분에 국경 쪽에 병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습격자가 너무 화려하게 저지른 덕분이야. 그자를 후작가에서 잡아서 그 힘을 그대로 이용한다면 다른 영주의 뒷골이 서늘해지니까.”

후작이 마그레에게 원한 바가 그 습격자와 같은 역할일 것이다.

잡히지 않고 후방을 휘젓는 특수 부대. 강자로 추정되는 만큼, 추적대를 넓게 퍼트려서 상대할 수도 없다.

기사단장과 같은 강자가 직접 다리품을 팔아야 손해를 줄일 수 있다.

문제는 기사단장과 같은 강자가 나서도 그들의 본진으로 유유히 도망쳐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사단장과 같은 최강 전력을 헛되이 운용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적에게는 이득이 된다.

“하지만, 그 운도 여기까지야.”

“본진이 털려버리면 끝이니까.”

후켄스 백작가와 안토니오 후작가.

작위 이상으로 가진 전력 차이가 컸다. 무엇보다도 안토니오 후작은 변경백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 미궁에서 터져 나온 몬스터에 미궁 인근은 물론 왕국 하나가 초토화되어 버렸다.

몬스터가 돌아가고, 미궁 주변에는 미궁 탐색을 방해하는 권력자의 병력 배치가 제한되었다.

왕들에게는 악몽이었다. 왕들의 불안은 미궁 주변 병력 배치 금지라는 수동적인 대응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안토니오 후작가에 변경백의 위상을 부여했다.

미궁이 경계하는 거리 밖의 영주에게 이종족이나 이민족을 상대하는데 특화하는 변경백의 위상을 부여했다.

세금의 감면과 무엇보다도 왕국의 견제를 받지 않기에 감면된 세금을 기사단과 군대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고 해도, 안토니오 후작가와 왕이 맺은 봉건 계약은 바뀌지 않았다.

“본진을 잃으면 한낱 도적 떼가 되어버릴 테지.”

도적은 군대를 이길 수 없다.

도적 떼에 강자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에게는 지원마법사가 있었다. 지원마법사는 재능과 운이 아니라, 자금과 장기적인 육성으로 길러지기 때문이다.

* * *

* * *

켐프텐 주둔지 중앙, 재건된 건물에 일련의 인물이 모였다.

에리와 에드샤, 헤스티, 페로, 머메이드 네리미아까지.

“으, 어려워요.”

네리미아의 칭얼거림에 헤스티가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네게도 어렵네. 나 역시 마법 성취를 학문으로 이룬 것이 아니니까.”

근처에 앉은 페로 역시 인상을 쓴 채 유심히 책을 보았다. 에리와 에드샤는 아예 네리미아처럼 마법사 독해를 포기하고 헤스티가 읽어주는 내용을 외우고 되새겼다.

“아무래도 지원마법사분을 모셔왔어야 했나 봅니다.”

백작가 이상 영주의 전면전이 되면 지원마법사가 움직이는 만큼 그에 대해 알아야 했다.

하지만, 백작가에서 보유한 지원마법사를 주둔지로 보내줄 리 만무했다. 그저 백작가 지원마법사가 당장은 보지 않는 서적들을 빼내 와서 일행에게 보여주는 것이 다였다.

“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

본능에 따른 마법을 쓰는 네리미아가 투덜거렸다. 다른 이들도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서 발견하는 마법서와 지원마법사들의 마법서는 달랐다. 이해하기 힘든 관념에서 시작해서 돌을 쌓아 올리듯 전개되는 마법 이론에 다들 혀를 내밀었다.

일행의 마법사들은 스킬로 시작해서 미궁의 시스템으로 성장하고 깨달음으로 조율했다.

“그냥 시란느가 보여줘. 시란느는 지원 마법사지?”

“네?”

무심하게 던지는 네리미아의 말에 시란느는 멍하니 반문했다.

그녀에게 지원마법사냐고 묻는 말은 그녀의 어머니가 창녀라고, 마녀라고 놀리던 모욕보다 어이가 없었다.

원하는 반응이 아니자, 네리미아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시란느는 물의 힘을 가두고 있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 아, 너무 약해서 숨기는 거였나. 아흐,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네리미아는 오히려 시란느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가락 끝은 시란느가 옷 안에 감춘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목걸이를 향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