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지원마법사, 네리미아
* * *
무언가를 느낀 네리미아는 시란느를 향해 손가락질했고, 손가락질에 시란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네리미아, 그건 예의가 아니에요.”
헤스티가 네리미아에게 충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덮어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미궁 탐색자는 상황에 따라서 예의를 벗어던질 준비가 되어있다.
에드샤, 에리는 물론 교단에서 정치적인 외줄타기를 해왔던 페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네리미아는 인간의 예절을 모를 뿐, 본능적인 감각은 더 뛰어났다. 이 본능에는 자신보다 강한 자나 자신의 보호자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차리는 능력이 포함되어있다.
“이것 봐요.”
네리미아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자신의 가슴 앞쪽 공간에 손을 두고 손가락 끝을 위로 향하게 했다.
허공에 작은 물 덩어리가 생성되었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마법.
모여있던 마법 계열 일행에게는 별다르지 않았다. 계열이 다르지만, 각자의 계열에서 모두가 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하.”
하지만, 이어진 변화에 에드샤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네리미아의 물 덩어리가 순수한 구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여있던 이들은 단순히 형태만이 순수한 구가 아님을 알았다.
이물질은 물론 이력마저 차단했다. 이는 공기의 흐름은 물론 중력과 증발마저 차단했음을 뜻했다.
이는 네리미아에게도 쉽지 않은 듯 확연하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심스럽게 네리미아가 시란느를 향해 손짓했다.
다른 마법 계열 일행처럼 마법을 느낄 수 없지만, 분위기에 압도당한 시란느는 네리미아가 손짓하는 대로 다가갔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팔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변화가 일어났다. 물이 구 형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시란느를 향한 쪽이 짙어졌다.
시란느가 침을 꿀꺽 삼키고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숨기고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어머니의 유품. 그렇기에 일어나는 현상은 목걸이 자체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알아낼 기회였다.
팟.
꿈이 깨듯이 네리미아가 만든 물방울이 사라졌다.
“휴우.”
네리미아가 힘들었다는 듯이 크게 한숨 내쉬고 테이블 중앙에 있던 찻주전자에 손을 뻗었다.
그대로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잔은 따로 쓰지만, 주전자는 함께 쓰기에 예의가 아니지만, 이번에는 헤스티도 예의를 말하지 않았다.
대화가 멈춘 가운데, 각자 생각에 빠졌다.
갑자기, 헤스티와 페로가 테이블 옆에 쌓여있던 마법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몰두하는 둘에게 다른 이들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리미아가 주둔지와 떨어진 천에 물놀이 하러 간다면서 떠났다.
에리와 에드샤도 자신의 할 일을 위해 떠났지만, 시란느는 한쪽 끝에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 * *
* * *
나는 주력 일행 전부에 우든 엘프 드리아데와 다크 엘프 피리레까지 소집했다.
다시 한번 물로 이루어진 순수한 구를 구현하고 늘어진 네리미아를 두고 회의를 시작했다.
“지원마법사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먼저 페로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시란느가 미간을 좁혔다. 페로는 혼란스러워하는 시란느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예 정반대 쪽에 가깝다고 할까요.”
페로의 말에 네리미아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네리미아에 헤스티가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관련이 없는 것 같지 않아요. 아예 다른 계열은 각자의 줄기로 개별 전개하는 방식이지요. 그것과는 또 달라요.
괜히 네리미아가 시란느의 목걸이를 느끼고 지원마법사라고 한 거 아니에요. 어쩌면….”
“어쩌면?”
나는 헤스티의 추측을 기다렸다.
페로가 예전에 교단의 마법사 파벌에 있으면서 다른 마법과 관련 정보를 접한 경험이 많다고 해도, 헤스티는 직접 화염과 중력 마법의 조합을 추구하고 이루었다.
직관을 기대할 만했다.
“순수한 물질을 바탕으로 의도적으로 쌓아 올린 것이 지원마법사일지도요. 네리미아는 내가 읽어주는 마법서에 있던 이론 중에 순수한 물질에 대한 부분을 이해하고, 시란느에게 지원마법사가 아니냐고 물은 것이고요.”
“흠.”
나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헤스티와 눈을 마주했다.
“마법사는 의지를 부리는 존재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의지 아래에 규칙을 두려고 하지.”
나는 예전 회차에서 접했던 경험과 마법사였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마법사는 순수할 수 없다. 아무리 순수한 것을 다루더라도 자신이라는 그릇에 담지. 그리고 그 자신은 인간이다. 인간은 복잡한 생물이야.”
에드샤와 헤스티, 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중에 순수함 그 자체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
헤스티가 ‘아’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마녀라고 부르지. 인간이 담을 수 없는 순수가 되려다가 미쳐버리는 이들.”
시란느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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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끝내고 홀로 있을 때 수희가 찾아왔다. 다시 길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어버스나이트는?”
수희가 내게 물었다.
혼돈이기에 순수를 갈구한다.
어버스나이트 교단의 신성한 행위에 대한 어구.
“순수가 되려는 것은 순수를 갈구하는 것과 달라. 굳이 억지로 연관시키자면….”
“추측이라도 부탁해.”
“어버스나이트는 마녀를 지키는 자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교단의 이름이 설명되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희에게 설명을 이었다.
“나이트는 지키는 자를 뜻하는 고대어야. 어버스는 혼돈을 뜻하지. 순수가 되려 하지만 아직 순수하지 못한 것을 뭐라고 부를까?”
“…. 혼돈.”
“그리고 마녀라고 부르지. 다만.”
나는 수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한가지 요소를 더 발견했어.”
“지원마법사?”
“그래, 지원마법사가 성립하는 이유가 뭘까. 순수한 것을 쌓아 올려 순수함을 가리는 것. 인간이 미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조를 잡는 것, 질서.”
“순수, 혼돈, 질서.”
나는 수희를 꼭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헤스티를 지켜줘. 그녀의 직관이 예사롭지 않아.”
페로는 걱정되지 않았다. 카이바린 신성의 신벌의 낮은 단계인 ‘짜증’을 받아 늙은이가 되었다.
그의 원래 성격과 변해버린 상황이 결합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헤스티는 아니었다.
‘헤스티가 이때까지 추구하고 고민했던 것이 헤스티를 지탱할 수 있기를.’
헤스티는 조합을 추구해왔다.
나는 수희의 읊조림에 한 가지를 더했다.
‘순수, 혼돈, 질서,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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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전투를 준비하는 가운데, 나와 헤스티, 네리미아, 수희 그리고 시란느는 후방으로 빠졌다.
네리미아가 쉬러 가곤 하는 천의 상류로 올랐다.
건강한 나무와 매끈한 돌, 상쾌하게 흐르는 작은 천에 도착했다.
“좋은 곳이에요. 좀 작긴 하지만요.”
“하류에는 마을이 있으니까, 집중하기 어렵지.”
네리미아와 헤스티의 대화를 들으며 시란느를 살폈다.
길을 나서기 전만 해도 혼란에 가득 찬 모습을 보였던 시란느는 한결 정리되었는지, 담담한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왔다.
‘시작하고 나면 그럴 수 없겠지만.’
“여기로 해요. 여기가 좋아요.”
작고 활기찬 소리를 내며 흐르는 천에 손을 넣어 장난치면서 네리미아가 웃었다.
그녀의 말에 수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난 주변을 경계할 테니까.”
“그래, 수고해줘.”
시도해볼 것이 있어서 후작가 기사단과 병사들이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후방으로 왔다.
“위험하진 않은 거죠?”
은근히 긴장한 시란느가 물었다.
“물론,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전투에서 쓰기 어려워서 그렇지, 집중하면 물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해낼 수 있어.”
시란느는 네리미아의 말을 듣고도 믿음이 가지 않는지 나를 보았다.
“강해지고 싶지 않은 거야?”
나를 향하는 시선을 끊고, 내가 대답하기 전에 헤스티가 시란느에게 조용히 물었다.
“두렵다면, 목걸이만 빌려줘. 그만한 보상을 할 테니. 하지만, 너는 계속 상황에 끌려다니겠지. 분명 이 시도에는 위험이 있어. 포기해야 할 것도 있고.”
“….”
시란느는 한결 진중해진 표정으로 목에 맨 목걸이를 꽉 잡았다.
“그럼, 준비하자. 옷을 벗어줘.”
“네?”
“야한 짓을 원했으면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하지 않아. 옷을 벗어야 물의 힘을 유도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
“저 저기, 준영님이 계시는데….”
“준영님은 타인의 신체 내의 이력을 유도하는 데 탁월하셔. 준영님과 함께하기에 실패할 가능성과 실패했을 때 위험이 극단적으로 줄어들 거야.
자세한 것이 말해줄 수 없지만, 에리도 과거에 준영님과 접촉하지 않았다면, 그저 나약한 소녀로 죽었을 거야.”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 접촉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