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6화 〉 난전 (116/139)

〈 116화 〉 난전

* * *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에드샤가 만든 요새를 노린 공격.

후작가 기사단이 산등성이로 돌진하는 가운데, 지원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했다.

거리가 있는 상황.

장거리 포격과 닮은 공격.

거리는 마법사에게 반격받지 않게 하는 장점이지만, 내리꽂힐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노예병들을 들쳐메고 피해라.”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지가 뛰어난 내가 화염구가 떨어질 지역의 엘프에게 의지를 전하기에 충분했다.

엘프들이 노예병을 들쳐메고, 옆구리에 끼고 즉시 뒤로 빠졌다.

화염구가 폭발하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사라진 곳에 마치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은 것처럼 굳건히 서 있는 요새 벽.

에드샤가 부서지기 무섭게 요새벽을 다시 세웠다.

“허거 어헉.”

노예병이 숨을 몰아쉬었다.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라 본능적으로 착각했다고 믿고싶어 했다. 하지만, 옆자리의 노예병 역시 자신처럼 멍한 것을 보고 착각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엘프님께서 살려주셨군요.”

그저 짧게 넋두리하고 훈련받은 대로 창을 꽉 잡았다. 뒤로 빼어진 채 텅 빈 요새벽을 바라보았다.

*

노예병은 자신이 할 역할을 다했다.

깃발과 인기척으로 후작가 기사단을 유인해냈으니, 굳이 전선에 밀어넣어 죽게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에리의 지휘 아래, 엘프들이 집결했다.

에드샤와 에리, 엘프들의 조합이면, 강자를 분리한 기사단을 사망자 없이 대응할 수 있다.

“미로 속에서 마주하라.”

에드샤가 대지 마법으로 지형을 변화시켰다.

완전히 분리하는 벽은 아니지만, 인간의 키만큼 솟아오르고, 키만큼 아래로 내려간 땅은 현재 인원에 상관없이 엘프들이 기사들을 포위 공격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상급 기사는 에리에게 막혔다.

나는 에리를 처리할 수 있는 적을 마주했다.

“네가 보스인가?”

“그렇다면?”

“난 베리랑트. 기사단장이지.”

그대로 돌진해 들어왔다.

“너는 훌륭한 기사 같아.”

하지만, 나는 기사가 아니었다.

나의 앞을 바리스가 막아섰다.

분노없이 덤덤하게 바리스를 상대하는 베리랑트. 베리랑트는 결투와 전쟁의 차이를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매 공격마다 바리스의 방패에서 광음이 터졌다.

빠르고 강력한 최고 수준의 공격이었지만, 굳건하게 막아냈다. 기괴함까지 더해지는 미궁에서도 안정적인 방어를 해내는 바리스에게 경험은 부족하지 않았다.

방어전에다가 후방에 약한 아군들­노예병들을 둔 상황.

바리스가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냈다.

방어만 하는 자는 이길 수 없다. 공격자가 방어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공격에 전념하면 공격력은 배가 된다.

하지만, 이는 1대1 결투의 이야기였다.

나는 레리아나의 검을 뽑아 들고 움직였다.

적이 여성이 아니라서 특수 효과가 발휘되지 않지만, 레리아나의 영혼이 나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검에 나의 기운이 강하고 치밀하게 맺혔다.

이는 검의 강도로 이어졌다.

창­.

베리랑트의 검과 검을 마주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격돌.

바리스를 상대할 때 자신감이 넘쳤던 베리랑트의 기세가 일변했다.

“퇴각해. 뒤로 빠져.”

호흡을 확보하자마자, 기사들에게 즉시 명령을 내렸다.

“이야.”

나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모험가와 다르게 기사단장은 순수한 무력만으로 오를 수 없는 위치.

오르면 오를수록 전장에서의 판단이 빨라지고 정밀해지는 무력과 달리, 정치력은 유리한 전장을 만드는데 기여할 지언정 전투가 시작된 전장에서는 정확한 판단을 방해했다.

단 한 번 검을 마주치고 후퇴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작가의 상급 기사들이 서로를 보조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에드샤와 에리가 후퇴를 방해했지만, 상당한 피해를 주는 데 그쳤다.

*

전장의 분위기가 다시 변했다.

기사단장과 주력이 움직였는데도 산등성이 요새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는 백작가 성에서 벌어지는 전투에도 영향을 끼쳤다.

후작가 기사단의 승리할 거라는 확신이 흔들렸고, 성벽에서 접전을 벌이던 기사들은 무의식중에 퇴로를 확인했다.

성벽에서 백작가 기사단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백작가 기사단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고 배수진을 친 데다가, 기사단의 전체 전력을 투입했다.

상황이 실력과 물량 차이를 줄였다.

*

“하아아아. 히힛.”

요사스러운 웃음소리.

이어서 터지는 폭음.

후작가 기사단의 본진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수희가 한 늙은이의 잘린 목을 들고 도망쳤다.

지원마법사 관리자의 목.

암살 후, 들켜버렸지만, 주변에 뛰어난 기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들어갔었다.

두 명의 지원마법사와 제대로 싸우면 이길 수 없지만, 기사단의 본진은 적진이었다.

병사들이 지원마법사가 싸울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보다 빠르게, 수희가 병사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

베리랑트가 검기를 흩뿌렸다. 견제를 위한 공격.

“이런.”

혼자서 전선을 형성해 다른 상급 기사들의 후퇴를 보조하던 베리랑트가 짧게 호흡을 터트리고 빠르게 빠졌다.

“바리스, 헤스티, 시란느.”

““네.””

“우리도 간다.”

에리와 에드샤에게 상급 기사와의 접전을 맡기고 베리랑트를 추적했다.

나는 헤스티를, 바리스는 시란느를 들쳐멨다.

지원마법사와 베리랑트에게 쫓기면 수희라도 위험했다. 적 병사들이 있는 만큼 급하더라도 마법사들과 함께 가야 했다.

머메이드 네리미아와 엘프들은 이동 후에 소환하면 되기에 들쳐멜 필요가 없었다.

*

수희가 비웃으며 다시 병사들에게 파고들었다.

“왜 그리 화를 내는 거야? 얘네들, 너희들 동료 아니야?”

수희가 있던 자리로 날아드는 마법.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급히 피하면서도 의심을 놓지 않았다.

지원마법사의 반응이 너무 과격했다.

마치 구석에 몰린 맹수처럼.

* * *

* * *

‘늙은이 그 작자가.’

베리랑트는 달려가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안토니오 후작에게서 직접 인계받은 목걸이.

지원마법사를 통제하기 위한 아티펙트.

지원마법사 운용에는 지원마법사의 관리자가 중요했다.

그리고 중요한 만큼,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관리자가 사망하더라도 지원마법사는 기본 규칙에만 의존하지 않고, 목걸이를 가진 자를 따르게 되어 있다.

하지만, 통제 목걸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관리자가 사망하면 지원마법사는 즉시, 통제 목걸이를 가진 자에게 달려와야 하지만, 지원마법사는 그 자리에서 전투를 지속하고 있다.

‘관리자 새끼가 수작을 부렸군.’

더 지독한 건, 수작을 부리고 적에게 암살당했다는 것이었다.

* * *

* * *

“흠.”

나는 급히 달려가면서도 침음을 흘렸다.

적의 본진에서 마구 움직이는 두 명의 지원마법사.

모습도 능력도 달랐지만, 유사한 상황이 떠올랐다.

미궁에서 강제된 운명에 의해 반복되는 움직임을 취하던 몬스터들.

두 지원마법사의 움직임은 미래를 그리면서 싸우는 마법사가 아니라, 미궁에서 죽으면 부활하던 몬스터와 닮았다.

*

“수희. 여기로.”

수희의 퇴로가 막히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바리스, 헤스티, 수희, 시란느는 내게 종속되지 않았기에 [종속체 배치]를 이용한 긴급 회피를 쓸 수 없다.

“저기 물이 있어요.”

강과 강보다 작은 물줄기인 내는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지형 요소였다.

백작가 성 앞에는 내가 있다. 성의 해자를 채운 물줄기이기도 했다.

다만, 백작가에서는 성 밖의 물줄기를 전략적 요소로 활용하지 않았다.

성벽보다 변수가 많았다. 원거리 공격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도하를 막으려면 물줄기 전체를 커버해야 하는 등 성의 방어력에 따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최상급의 지형 요소였다.

머메이드 네리미아뿐만 아니라, 시란느 역시 물의 힘을 담은 목걸이를 통해 마녀를 느꼈고, 헤스티 역시 편린을 보았다.

수희 역시 이를 알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접근하자, 내를 장애물이 아니라 탈출구로 삼았다.

두 명의 지원 마법사 푸른 머리의 오노르와 붉은 머리의 엘레나.

폭주하는 도중임에도 눌러쓴 로브에 달린 후드는 벗겨지지 않았다. 그저 머리카락이 그녀들의 머리카락 색을 알려줄 뿐이었다.

오노르의 손에 붉은 화염이 맺혔다.

수희가 내로 뛰어들었다. 아직 거리가 있지만, 헤스티가 지팡이를 물에 담그는 것과 소환된 머메이드 네리미아가 물에 뛰어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워러웨이]

먼저 헤스티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내는 수심이 깊지 않았다. 허리 정도의 깊이라, 별다른 도하 장비 없이 말과 인간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몸통보다 조금 큰 물의 길을 내기에 충분했다.

손으로 던진 투사체와 비슷한 속도로, 물속에서 물의 길이 만들어졌다.

수희의 몸이 닿자마자 물회오리처럼, 물의 길은 수희를 빨아들였다.

그대로 헤스티의 앞까지 끌어당겼다.

[워러 쉴드]

네리미아의 마법이 펼쳐졌다.

내는 강보다 작았다. 그렇기에 화염 마법의 폭발력은 물 자체를 흩날려버릴 수 있다.

네리미아의 권능과 닮은 마법이 내의 표면을 덮으며 보호했다.

제대로 맞부딪히면 물줄기가 있더라도 네리미아가 밀리지만, 지원마법사 오노르의 화염 마법은 애초에 물줄기가 아니라, 수희를 노렸었다.

수희와 내를 지킨 헤스티와 네리미아는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지원마법사 오노르와 엘레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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