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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화 〉 15층 공략 (5) (126/139)

〈 126화 〉 15층 공략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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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으로 솟구친 촉수가 수면을 긁듯이 휘둘러왔다. 파도를 일으키며 배의 옆면을 노렸다.

“이것도.”

바리스가 묘기를 부리듯이 움직였다.

물에 친숙한 전사는 떠내려오는 나뭇가지 하나만 있어도 그 위에서 싸울 수 있다. 바리스의 모습은 그런 전사를 떠올리게 했다.

배의 옆면에 비스듬히 붙은 바리스가 휘둘러오는 촉수를 향해 양손검을 휘둘렀다.

파앙­.

격돌한 충격에 물보라가 휘날렸다. 배가 다시 쭉 밀려났다.

“저기 앞쪽 부서졌어.”

배 안에서 아리나란이 칭얼거리듯이 말했다.

배는 한 곳만 부서져도 전체가 가라앉는 탑승물이었다. 바리스가 받은 충격량을 배가 뒤로 밀려나면서 경감시킨다고 해도 파손을 피할 수 없었다.

아리나란은 이때까지와는 다른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피막이 부서진 부분을 향해 쭉 뻗어져 나갔다. 부서진 부분을 메웠다.

동시에 소환한 우든 엘프들과 다크 엘프들이 움직였다.

엘프들은 아리나란의 피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역을 확보 못 했을 때, 아리나란의 피막 안으로 소환된 적도 있었다.

이번 배 위에서도 마찬가지.

엘프들은 아리나란의 피막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믿고 배의 파손 부분을 감싸고 있는 피막에 달라붙었다.

가지고 온 나무와 흙으로 수리하고 다시 [종속체 배치]를 통해 미궁 밖으로 귀환했다.

수희가 움직였다.

배와 바리스에 신경이 팔린 촉수에 상처를 만들었다.

촉수의 크기에 비하면 그저 작은 생채기와 같은 상처.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크라켄 본체는커녕 촉수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을지 의심되는 상처.

그저, 크라켄을 분노하게 할 뿐인 상처.

하지만,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일행 중에 물에서 가장 강한 헤스티가 준비하고 있기에, 수희의 얕은 공격은 다음으로 이어내는 훌륭한 도발이 되었다.

배의 정중앙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헤스티는 다른 공간에 있는 것만 같았다.

흩날리는 물보라도 침입하지 못하는 헤스티의 주변은 소리마저 사라진 듯했다.

압도적인 마력이 집중되고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바리스가 촉수의 공격을 막아내고 수희가 사소한 상처를 입힐 때도, 헤스티의 마력은 누적을 반복했다.

“드디어.”

“저놈의 인내심이 바닥났군요.”

배가 마구 흔들렸다.

네리미아와 시란느와 오노르가 최선을 다해도 다스리기 힘든 물의 파장, 충격파처럼 밀려드는 파도.

거대한 부피와 질량이 움직이면서 만드는 순수한 힘의 여파.

멀리 뻗은 촉수로는 우리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 내린 크라켄이 드디어 움직였다.

수면을 향해 부상했다.

“아리나란 준비해.”

“응.”

아리나란이 일어났다.

일어난 아리나란에게서 흘러내리는 피막이 배의 갑판을 덮었다. 이어 배의 뒤쪽 외벽을 덮었다.

그리고 수평을 기준으로 아래뿐만 아니라 위로도 피막으로 덮었다.

또다시 소환된 엘프들이, 아리나란이 배의 뒤쪽 절반을 덮듯이 싼 피막을 거푸집 삼아 배를 덮는 윗부분을 만들었다.

바닷물이 갈라졌다. 섬이 태어나는 것 같았다.

끈적하고 어스름한 크라켄의 표면에 빛마저 먹혀들어 세상이 어두워진 것만 같았다.

크라켄의 눈동자가 질척한 분노를 담고 일행을 노려보았다.

“저놈 저거 드디어 나왔네.”

하지만, 누구도 압도되지 않았다.

수속성의 네리미아, 시란느, 오노르마저도 이제 끝이 보인다는 희망을 품었다.

절망하기에는 가까이에 있는 이의 존재감이 너무 강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헤스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크라켄을 해저 동굴에서 나오게 한 후로 계속 한 명상을 드디어 끝냈다.

“멈춰주세요. [정체]”

한순간을 위해 준비한 마법이 헤스티에게서 퍼져나갔다.

배를 넘어 수면을 장악하고 사방으로 퍼졌다. 수면을 넘어 수중까지 변질시켰다.

물이 물이 아닌 것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그대로 멈췄다.

[종속체 부유]

나 역시 힘을 발휘했다.

내게 종속된 배를 멈춰버린 바다 위에서 공중으로 까마득한 높이까지 띄웠다.

[물의 길]

네리미아, 시란느, 오노르가 헤스티가 예외로 허락한 물에 남은 모든 힘을 부었다.

공중으로 떠오른 배 아래에서 크라켄에게까지 이어지는 물의 길을 만들었다.

산사태가 일어날 비탈을 떠올리게 하는 각도로.

[프로텍트 위드]

바리스가 보호막 스킬을 진화시켰다.

배의 선두에 굳건하게 서서 배 전체를 보호하려는 아리나란의 피막에 보호막을 공명시켰다.

보호막이 피막을 밀어내지 않고 융합해 더욱 강력하게 결집했다.

“돌격한다.”

단단한 금속은 방어구로 이용된다. 그리고, 무기가 된다.

바리스의 굳건한 방어력은 날아가는 작살의 창두가 된다.

배는 아리나란의 피막과 보호막으로 완전히 덮었다.

이 순간에도 엘프들은 소환과 귀환을 반복하면서 배 갑판의 높이 위로 외벽을 만들고 이었다. 물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배로 만들었다.

3명의 만든 물의 길 속에서 배가 가속했다.

배는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대형 작살이 되어 크라켄을 노렸다.

꿈틀거리는 크라켄.

크라켄의 움직임에 비친 것은 분명 공포였다.

다시 물속 깊은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으로 위해,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강력한 장악력을 발휘하기 위해 준비한 헤스티의 마법 [정체]에 방해받았다.

선원들은 배가 육지를 떠나는 그 날부터 악몽을 꾼다.

배가 좌초되고 부서지는 악몽.

그리고 운명처럼 다가와 버리는 죽음. 아무리 바닷길을 잘 알아서 좌초를 피해내는 선원도 긴 촉수로 배를 옭아매고 가라앉혀버리는 해양 괴물은 피할 수 없다.

짙은 악몽 속에서는 선원들은 헛된 꿈을 꾸곤 한다. 말이 안 되는 소망, 소망을 품는 이조차 가능성이 없어 망상이라고 치부하는 소망.

언젠가 인간의 기술이 발달하고 발달하면 배로 해양 괴물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 망상은 이야기가 되어 세상에 떠돈다.

충돌.

배의 선두가 크라켄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강인한 크라켄의 피부가 연한 푸딩처럼 뭉개졌다.

하늘 높이 떠올려 얻은 중력에, 내가 더한 힘, 그리고 [물의 길]을 통과하며 얻은 속도가 돌파력이 되어 크라켄을 꿰뚫었다.

쿠오오오­ 오오오­.

세상에 울리는 울음.

하지만, 아무리 크고 묵직한 울음이라도 사냥당하는 것의 울음은 사냥꾼을 압박하지 못한다.

크라켄을 꿰뚫은 배는 수중에서 수면으로 올랐다.

“푸하, 으으, 징그러.”

몸서리치는 몸짓을 하며 미소짓는 수희, 그 미소는 잔혹했다.

사냥의 시간임을 알아챈 미소. 자신이 준 상처가 가벼워 도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어 짓는 미소.

“큰 놈이니까, 약점도 크겠지.”

수희의 쌍검이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배에서 벗어나 달려나가는 수희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나 역시 바리스와 함께 달려나갔다.

헤스티는 크라켄과 물에서 영역 싸움을 해낼 수 없다.

다른 것에 분노한 크라켄에게서 한순간만을 잡아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행의 배에 꿰뚫린 크라켄이라면 달랐다. 깊은 물 속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의도마저 헤스티가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이 되었다.

멈춰진 배 위에서 마력의 영역 싸움을 이어나갔다.

크라켄에게, [물의 가호] 덕분에 물 위를 달려오는 전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켄의 촉수가 그토록 튼튼했던 것은 크라켄의 의지가 이력이 되고 촉수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수문 위로 드러난 크라켄의 몸을 수희의 쌍검, 바리스의 양손검이, 나의 레리아나의 검이 갈랐다.

수희가 비릿하게 웃었다.

“약점이 여기 있네.”

굳이 숨겨진 약점을 찾기 위해 헤맬 필요 없었다.

꿰뚫려 체액을 토해내는 상처 자체가 약점이었다.

수희의 쌍검이 움츠려 상처 크기를 줄이려는 크라켄의 의도를 파훼했다. 더 크게 찢고 갈라냈다.

헤스티의 [정체]에 구속된 크라켄.

헤스티의 [물의 가호]에 물 위를 마음껏 뛰어다니는 일행.

크라켄을 침묵시켰다.

*

전투가 끝났다.

“영차.”

네리미아가 약한 사람을 흉내 내며, 크라켄의 몸을 위에 올랐다.

물속으로 가라앉으려는 크라켄의 사체는 헤스티가 수면 위에 유지시켰다.

“와아, 이거. 평생 먹어도 못 먹겠어요.”

입맛마저 다시는 네리미아에 바리스와 수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때는 미궁 속의 풀마저 씹어먹던 둘이지만, 고급 입맛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미궁 속에 있어도 숲속의 저택을 오갈 수 있으니, 신선한 재료에 사람의 수고가 들어간 음식은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

다만, 엘프들의 반응은 바리스와 달랐다.

전투가 끝나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온 에리와 에드샤 역시 마찬가지, 처치한 크라켄은 음식으로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거 그냥 먹어도 되려나?”

네리미아가 물로 긴 검을 만들어 크라켄의 표피를 갈라내고 속 부분을 뜯어내 유심히 살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로 실망하는 네리미아.

“마력이 강해서 조리를 하지 않으면 취할걸.”

바리스나 수희와 달리 네리미아와 에드샤, 엘프들이 크라켄의 고기에 끌려 하는 것은 마물 고기에서 마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가 끝나면, 네가 그만할 때까지 먹여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흐흐.”

마물의 고기는 마물을 처치한 자가 소유를 포기하면 사라졌다.

미궁 속으로 녹아 없어진다.

크라켄 사체 역시 우리가 떠나면 미궁에 녹아 없어질 테지만, 나에게는 운반할 수단과 저장할 공간이 있다.

엘프들은 부지런히 크라켄의 고기를 잘라내고 잘라낸 고기를 ‘숲속의 탑’으로 옮겼다.

‘숲속의 탑’은 나의 의지 아래의 공간이기에 녹아도 탑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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