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왕국
* * *
전쟁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오 후작가 영지, 킬덴에 왕국의 병력이 집결했다.
이제 우리의 성이 되어버린 후켄스 성 집무실에 일행이 모였다.
“킬덴이라….”
“미궁이 두렵지 않다는 걸까요?”
나의 중얼거림에 바리스가 의문을 드러냈다.
우리는 왕국이 침공하는 경로를 예상했고, 그중에는 킬덴에 집결해 전진하는 경로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낮게 보았다.
후켄스 성이나 우리가 확보한 기지인 켐프텐 주둔지, 숲속의 저택과 아랫마을을 압박하기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차라리, 미궁을 향하는 자들을 통제하기 좋은 위치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궁을 두려워하지 않는군. 피를 덮어쓴 역사도 시간 앞에서는 무뎌지는 건가. 왕국은 미궁을 도발해, 몬스터 웨이브를 일부러 일으킬 생각인 거다.”
왕국의 오판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쩌면 미궁을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나일지도 몰랐다. 한낱 몬스터나 층이 아니라 미궁 전체에 흐르는 불가사의한 의도를 떠올리면 몸마저 서늘해졌다.
왕국은 내게 그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왕국의 마도 기술이 집적된 오노르의 세뇌를 봐도 까다롭고 강한 적이라고 느낄 뿐이지, 막막하지 않았다.
“왕국은 미궁 탐색자의 성과만 본 거야. 미궁을 탐색해 성취를 이룬 초인급을 감당할 수 있으니 미궁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지.
그 아래에 깔린 시체는 보지 못하고, 탐색자의 절망에서는 시선을 돌리고.”
“오만하네. 실패한 자들은 무능해서 미궁에 먹혔다고 생각하는 걸까?”
수희가 의문을 토로했다. 그 옆에서 바리스가 입을 열었다.
“희생자들이 나오겠군요.”
바리스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였다.
“통치자로 용납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에요.”
시란느와 오노르도 킬덴 집결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고 심정을 밝혔다.
“교단들이야 피난 훈련이 되어있으니까, 전멸하지 않겠지만….”
수희가 바리스의 말에 좁아진 시야를 극복하고 넓게 생각했다. 강한 자들의 충돌을 중요시하는 수희 역시 일반인들을 떠올리고 동정을 표현했다.
어버스나이트 교단 출신인 수희는 미궁 주변의 교단에 대해 잘 알았다.
교단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때, 어떻게 후퇴할 것인가에 대한 작전 계획이 세워져 있다.
어느 파티가 어느 시점까지 막고, 그다음은 어느 파티가 몬스터를 저지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후퇴해낼 것인가를 고민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상 훈련까지 하고 있고 몇몇 콧대 높은 자들은 훈련에 참가하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교단이 웨이브 때 어떤 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숙지했다.
그러나 수준이 낮은 탐색자와, 탐색자들을 대상으로 모인 상인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비극을 피할 수 없다
“왕은 교단들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왕국민은 몰라도 귀족들은 설득하기 쉬웠을 거야.”
왕국의 미궁에 대한 도발은 미궁 근처 사람들의 목숨을 무시하기에 가능했다.
오히려 미궁 웨이브가 미궁 주변 교단을 쓸어버리기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권위는 무력에서 나온다.
왕과 귀족이 토벌하기 불가능한 위치에 자리 잡은 교단이 왕의 권위를 인정했을 리 없다.
오히려 교단의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귀족의 영지에 들어가서도 신앙을 전파하는 등의 도발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수희.”
“네. 준영씨.”
“어버스나이트 교단에 가서 경고해줘. 다른 교단과 경매장과 상단에게도.”
“알았어요.”
수희는 바로 움직였다.
내가 종속시킨 물건을 가지고 있으니, 변동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연락할 수 있다.
“시란느.”
“네. 준영님.”
“후켄스 영주와 함께 후켄스 영지민 모두를 숲의 탑 인근으로 모아.”
“전부를요?”
시란느가 놀라 반문했다.
백작령 영지민을 한곳으로 모으는 일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무력을 동원해. 시간이 없기에 걷는 속도를 늦추는 짐을 허락하지 마라.
후켄스 백작의 병력은 모두 영지민을 강제이동시키는 데 사용한다.”
이주 명령이 아니라 강제이동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짐만 허용하는 이동 명령에 영지민이 순순히 삶의 터전을 버릴 리 없었다.
상당한 규모의 병사들로 압박을 해야 한다
“숲속의 탑 인근에 수용할 수 있을까요?”
시란느가 현실적인 문제를 물어왔다. 공간만큼 중요한 문제는 식량이었지만, 안토니오 후작이 모았던 군량을 그대로 약탈해 왔으니 식량 문제는 크지 않았다.
“충분해. 숲속의 탑 내부에 지하층을 만들어 수용하면 되니까.”
숲속의 탑은 미궁과 유사한 신성 영역.
탐색자가 도전하다가 죽으면 숲속의 탑의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탐색자들을 유도해왔다.
탐색자 유인은 웨이브가 터진 이상 끝났다.
숲속의 탑이 미궁과 달리 내게 종속되어 있음이 알려지지만 상관없었다.
미궁에서 웨이브가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탐색자들이 여유 부리며 숲속의 탑으로 탐색하러 올 리 없었다.
탐색자 유도를 못 한다고 해서 아쉽지 않았다. 미궁에서 터져 나오는 몬스터를 잡아 집어넣으면 될 뿐이다.
“네, 알았어요.”
“부탁해.”
시란느가 그대로 예를 표하고 달려나갔다.
나는 남은 일행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왕국군을 상대한다.”
*
*
*
처음 계획은 후켄스 성까지 왕국군을 허용할 생각이었다.
성은 기본적으로 방어를 위한 요지에 위치했다. 또한, 마법 부여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마법을 부여하기 쉬운 자재들을 이용해 건설되어 있다.
하지만, 미궁 웨이브 가능성은 병력 운용 변경을 강요했다.
한번 접전이 시작되면 세밀한 통제가 불가능한 후켄스 백작의 병력은 영지민의 피난에 사용하는 것이 더 나았다.
엘프들의 지휘를 받는 우리의 상비군은 후켄스 성에 대기시켰다.
왕국군에서 대놓고 수를 이용하는 작전을 펼치면, 물러나서 상비군과 합류하면 된다.
직속 일행의 이동력은 우수하고 엘프들은 종속체 배치로 즉시 이동할 수 있다.
“백작령 경계를 넘는다.”
일행과 엘프들이 조용히 뒤따랐다.
빠르게 이동했다.
*
킬덴의 넓은 평원은 거대한 주둔지로 변했다.
수십 개의 고급 막사와 천 개에 가까운 일반 막사.
“승부를 걸었군요.”
백작령 하나를 먹기 위해서 저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가는 제 몫을 얻지 못한 휘하 귀족의 반란을 마주할 것이다.
많은 것은 병력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인원이 방어 시설을 건설 중이었다.
“괘씸하군.”
나의 말에 바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군은 우리를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다. 후켄스 성으로 진군조차 고려하고 있지 않다.
킬덴 평원에서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의 후켄스 영지와 켐프텐 주둔지는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릴 테니 공격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준비는 나쁘지 않지만.”
인간이 인간을 막기 위해 세운 성은 거대 몬스터가 포함된 몬스터 웨이브에서는 한계가 있다.
높은 지대에 세워진 성은 인간이 적이라면 올라가면서 전투력을 소모하지만, 몬스터는 아니었다.
차라리 은밀한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평원이 나쁘지 않았다.
“대포는 안 보이는군요.”
“숨겨뒀겠지.”
하지만, 예상이 가능했다.
“풀 플레이트로 무장한 기사단이라….”
그리고 드러낸 무력.
왕국 기사단.
완전히 금속으로 말까지 덮은 기사단. 말의 가벼운 움직임은 갑옷과 무기에 대한 마법 부여뿐만 아니라, 말 역시 강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인간에게 그 짓을 하는 놈들인걸요.”
오노르가 자조하듯이 비웃었다.
나는 오노르를 확 잡아당겨 품속으로 끌어안았다.
아기를 다루듯이 토닥토닥했다.
“으으, 부끄러운데.”
“시란느도 없잖아.”
“훗.”
오노르는 조용히 꼼지락거리며 나의 체온과 일행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겼다.
희귀한 존재인 마녀에게조차 실험하고 세뇌하는 왕국이었다.
평민과 무슨 짓을 해도 떠들지 못하는 동물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국의 전략은 파악되었다.
미궁을 도발해, 웨이브를 터트린다. 웨이브는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궁 주변 교단들과 나를 처리할 것이다.
왕국으로 밀려드는 몬스터는 킬덴 평원에서 기사단을 비롯한 병력과 대포와 세뇌한 화속성 마법사들을 이용해 막아내고 흩트린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왕국과도 몇 가지 조약을 맺어놓았을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의 확대 차단이라는 주제는 몇 안 되는 공감하는 주제니까.
“시발.”
나는 욕을 토했다.
우리 일행이 왕국군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들킬 수 있다는 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 멀리 미궁의 위치에서 검은 기둥이 솟아올랐다.
거리가 있는데도 크게 보이는 기둥.
하늘을 꿰뚫었다. 상처를 내고 물속에 담근 손목에서 피가 퍼져나가듯이, 검은 어둠이 퍼져나갔다.
마치 하늘이 흘리는 피처럼, 검은 어둠이 세상을 덮었다.
해가 사라졌다.
“아아, 아아.”
바리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바리스.”
용사 바리스가 흘린 피눈물.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다.
바리스의 옷을 찢듯이 벗기고 꼭 끌어안았다. 바리스를 안고, 오노르를 이불을 덮쳐 쓰듯이 함께 껴안았다.
“넌 내 것이다. 내 안에서 너는 무너지지 않아.”
검게 변한 세상에서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