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4. 두 번째 히로인(3)
전철을 나온 우리는 곧바로 근처에 있는 모텔로 향했다.
‘근데 진짜 다 쳐다보네.’
나란히 걷는 나와 소진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남자들은 혼혈 미녀인 소진을.
여자들은 아마도 나를.
“뭘 두리번거리고 그래.”
아직은 좀 어색한 나와 달리 소진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했다.
‘하긴, 정조역전이든 뭐든 외모가 예쁘면 장땡이니까.’
아무리 남성이 우대받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예쁜 여자도 이 세상에서는 충분히 대접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원래 세상에서도 외모 피라미드의 정점은 의외로 여자가 아닌 남자.
둘 다 압도적으로 예쁘다고 할 때, 아마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예쁜 여자가 더 높은 취급을 받을 확률이 컸다.
‘거기다 혼혈이기까지 하니.’
소진은 캐나다인의 피가 섞인 서구적인 외모와 동양적인 자연스러움이 섞인 얼굴형이다.
거기에 평소에 관리를 열심히 하는지 몸매도 훌륭.
이렇게까지 예쁜 미녀라면 다소 성적 욕구가 덜한 이 세계의 남자들마저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애초에 성욕의 문제가 아니다.
극한의 아름다움 앞에서는 누구라도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자유분방한 성격이라고 했었지.’
그녀와 길을 걸으며 나는 소설 속 소진의 성격을 떠올렸다.
소설 속 히로인들 중에서 박소진은 가장 개방적이고 털털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진은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도 상당한 편이었다.
히로인 중에서는 나이도 제일 많았음에도 인기투표 시에는 항상 5위권 내에 들었으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녀의 바다 같이 넓은 성적 취향.
일반적인 체위는 물론이고, SM에 팸돔에, 아무튼 하고 싶은 건 다 하려는 여자가 소진이다.
그리고 내가 본 소설의 주인공인 정기발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섹스에 미친 놈이었고.
그 둘의 시너지가 터지는 순간은 뭐…….
아주 댓글창이 폭발나는 거다.
솔직히 나도 그런 걸 기대하고 이렇게 만나려고 애를 쓴 거기도 하고.
‘화연이나 다슬이도 예쁘긴 하지만……. 좀 아쉽단 말이지.’
지금까지 만난 여성들, 주화연과 최다슬의 경우에는 조금 순한 맛이라 할 수 있었다.
주화연이야 뭐, 원래 성격이 소심한 편이다보니 그렇다 쳐도 최다슬도 은근히 강하게 나가면 약해지는 2퍼센트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여성상위니 뭐니 해도 결국 두 사람과 하다 보면 원래 세계나 여기나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쉽지 않은가.
‘기왕 정조역전세계에 왔는데 여자한테 당해보기도 해야지!’
내가 소진의 섹파로 바라는 게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사실 이 세계에 와서도 나는 이곳이 정조역전세계관이라는 실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좆같은 기상예보 볼 때만 빼고.
“평소에도 이런거 자주 해?”
생각에 잠긴 내게 문득 곁에서 걷고 있던 소진이 물었다.
“이런 게 뭔데요?”
“에이, 먼저 선수니 뭐니 얘기했던 게 누구였더라?”
아, 그 얘기였나.
“자주……. 는 아닐 겁니다.”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시선의 소진을 보며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소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건. 자주면 자주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글쎄요, 저도 뭐라 답해야 될지 애매해서. 뭐, 첫 만남부터 이렇게 한 경우는 드문 편이죠.”
“그럼 첫 섹스는 여친이랑?”
“……아뇨.”
그러고 보니 내 아다를 떼 간 사람이 주화연이었지.
그것도 첫 만남에 말이지.
그 날을 떠올린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여친은 아닌데……. 아무튼 지금도 만나긴 합니다.”
“에이~. 그럼 아닌 게 아니네. 그래놓고 지금 청순한 척 하는 거?”
“아니, 청순하단 얘기가 아니라……. 그래도 그 쪽만큼 가볍지는 않다는 거죠.”
“어머, 내가 어떤 줄 어떻게 알고?”
“얼굴값은 하실 거 같아서요.”
“……그거 칭찬이야?”
“반반이죠.”
“뭐, 그렇게 말하는 그쪽도 충분히 얼굴값은 하는 거 같은데. 남자치고는 기도 세 보이고.”
그리 말하는 소진의 말에 문득 궁금증이 피어났다.
과연 이 세계의 남자들은 평소에 어떤 성 관념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다른 남자는 어떤데요?”
“다른 남자?”
내 물음에 소진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일단은…….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한 번 정도는 빼지? 심지어 엉덩이까지 만졌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는 처음 봐. 그것도 지하철에서.”
“치한질 많이 하셨나 봐요.”
“에이, 날 뭘로 보고.”
“지하철에서 남자 엉덩이 만지는 치한요.”
“말해두지만 나도 사람 봐 가면서 만지는 거야.”
내 말에 소진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런 데 보는 눈이 있거든. 딱 받아줄 거 같아 보이는 애들만 만지는 거라고.”
“……그게 말이 돼요?”
“거짓말 같지? 근데 진짜야. 은근히 만져주길 바라는 애들이 있다니까?”
“안 믿기지만 뭐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러면 안 받아주는 애들 실수로라도 건든 적은 없어요?”
“딱 한 번 있었지.”
“그 때는 어떻게 됐는데요?”
“깜빵 갔지.”
“……범죄자였어요?”
“에이, 그런 게 아니라.”
어이없어 하는 내 모습을 보며 소진이 말을 이었다.
“동네 파출소 있잖아. 거기 안에 독방 마냥 철창 있잖아. 몰라? 거기 하루 정도 자 봤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형 집행까지 받은 건 아니라는 겁니까?”
“갑자기 살벌한 얘길 하네.”
설마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까지 할 줄이야.
그리 말한 소진이 작게 웃었다.
몇 번 웃은 소진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애초에 그 때도 무조건 잘못했다 빌었지. 좆 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괜한 사람 건드려서 피해를 준거니 솔직히 형 받을 생각도 각오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거 알아?”
거기까지 말한 소진이 씨익 웃었다.
“결국 나 신고했던 그 남자도 나중에 가서는 나랑 잤어.”
“거짓말…….”
말도 안 되는 전개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건 소설 속 내용에 없던 설정인데…….
이곳이 현실이니만큼 내가 모르는 과거설정이 추가된 건가?
작가님이 소설 속에서풀지않은 설정 중 하나겠지?
‘아니, 그렇다 쳐도 이게 말이 되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전개에 정신이 멍해진다.
성희롱한 여자랑 눈이 맞아서 결국섹스라니, 무슨 3류 야동도 아니고.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 인생도 소설 같은, 뭐 그런 건가?
“진짜라니까? 하, 참.”
믿기지 않아 하는 내 모습에 소진이 답답하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나는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러면 경찰서 가서는어떻게 됐는데요?”
“자기가 다시 생각해 보니 착각한 거 같다고 하더라. 덕분에 무혐의로 풀려났어.”
“그게 무슨…….”
“철창에서 반나절 시간 보내기도 하고, 꽤 신선한 경험이었지.”
아련한 표정을 짓는 소진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자유분방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이런 설정이 있는 여자였다니.
누가 소설 속 등장인물 아니랄까봐.
“그러니까 사람 봐 가면서 만진다니까 그러네.”
소설에 따르면 소진은 최소한 입 밖으로 낸 말 중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다.
거기에 소설 내에서도 주인공 못지않게 남자들과 놀이처럼 섹스를 하곤 했다.
그러니 아마 저 말도 사실이겠지.
어쩌면 정말로 야한 것에 대한 특이한 감각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뭐, 나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감각 같은 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입도 가벼운 건 알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소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아무렇지 않게 해도 되나.
기가 막혀하는 내 말에 도리어 소진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어봐서 대답했더니 웃기는 소릴 하네?”
“아, 그건 죄송…….”
“뭐, 아까 말했다시피.”
내가 뭐라 사과의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본 채.
“나도 아무한테나 들이대는 거 아니야.”
“…….”
“이런 얘기 하는 것도 그 쪽이 처음이라고.”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해?
“그보다 내 얘기 말고 아저씨 얘기도 좀 해 보자고.”
헷갈려하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진이 내게 물었다.
“그쪽도 여자 여럿 홀렸을 것 같은데. 그치?”
“노코멘트하겠습니다.”
“내 얘기는 다 들어놓고 치사하게 구네. 설마 밀당하는 거?”
“만나자마자 무슨 밀당입니까…….”
“뭐, 몇 번 하고 나면 아저씨가 알아서 나한테 달라붙을 테니까. 그리고 아까 전부터 신경 쓰이던 게 있는데.”
“말씀하시죠.”
“아까부터 왜 그렇게 존댓말 써?”
“첫 만남부터 반말하는 그 쪽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애초에 나이도 모르고.”
“몇 살인데?”
“스물여섯이요.”
“어? 생각보다 꽤 먹었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어째 날 보는 사람들마다 다 비슷한 소릴 하는 거 같은데.
지금 얼굴이 그렇게 어려 보이나?
“아무튼 내가 스물일곱이니까 반말해도 되는 게 맞았네. 그치, 동생?”
“결과적으로나 맞을 뿐이잖아요. 애초에 그런 접근방식 자체가 좀 이상한…….”
“에이, 나도 아무한테나 이러지는 않는다고. 몇 번을 말해?”
기가 막혀하는 내 표정에 소진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지겨운 듯했다.
“만나서 바로 반말 찍찍 내뱉을 만큼 싸가지 없는 여자는 아니야. 이것도 다 분위기 풀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선수면서 그것도 몰라?”
“아, 예에…….”
나는 그런 소진을 향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소설에 기가 세다는 묘사를 봤던 기억이 나는데 딱 그 말대로다.
뭐, 나야 나쁠 거 없다.
이거라면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어째 반응이 시큰둥하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진.
그런 소진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 반응해야 될지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흐음…….”
그렇게 잡담을 하는 사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잠시 모텔 입구에 선 채 가만히 거리를 바라보았다.
오후 6시.
해가 긴 여름밤의 하늘은 아직 주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텔 거리의 네온사인은 그것을 모르는지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중.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텔을 제외한 홍등가 주변의 불빛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이런 거리는 참 언제 와도 묘한 기분이란 말이지.
“잠깐만.”
모텔에 들어가기에 앞서 소진이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A4용지로 보이는 것을 꺼내든 소진이 입을 열었다.
“뭐,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것도 이상하긴 한데, 일단 이런 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으니까.”
“말씀하시죠.”
“너 나랑 자고 싶은 거 맞는 거지?”
“맞습니다.”
“즉답이네.”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요.”
“뭐, 그것도 그런데.”
소진이 들고 있는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런 건 확실하게 넘어가는 주의라서 말이야.”
저 태도만으로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꽃뱀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나는 그런 소진의 태도를 십분 이해했다.
아무리 코끼리 심줄의 소진이라 해도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실제로 깜빵가지 갔다 올 뻔 했던 그녀가 아닌가.
실수 한 번으로 범죄자가 될 뻔 했으니 오히려 이런 조심성이 없는 게 이상하다.
“좀 증거를 남겨줬으면 하거든.”
“뭐, 그러죠.”
“진짜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내가 이렇게 곧바로 허락해줄 줄은 몰랐다는 듯이.
“휴, 다행이다. 싫다고 하면 어쩌나 했거든.”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보다 영상으로 찍는 게 확실하지 않을까요?”
”아, 뭐……. 그것도 좋긴 한데 그렇게까지 하면 너도 찝찝하잖아. 그냥 사인만 해 주면 돼. 이 정도로도 괜찮다고도 그러고.“
”누가요?“
”아까 말한 파출소 갔다 온 뒤로 법률 상담 한 번 들어본 적이 있거든.“
역시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을 겪었는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거기다 이건 소설의 주인공에게도 있었던 전개 중 하나다.
이 정도는 이미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다.
”주시죠.“
”응.“
나는 그녀가 건네준 종이에 곧바로 사인을 했다.
종이에는 ‘이 종이에 사인을 할 시에는 그녀 박소진과의 성교행위를 본인의 의사대로 행했다는 것에 동의함을 의미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밑으로는 각종 법률 용어가 나열된 말들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이거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철저하네…….
“직접 만든 겁니까?”
종이를 건네주며 내가 묻자그녀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뭐, 자문은 조금 받았지.”
“그 날 이후로 이렇게 준비하고 다니는 거군요.”
“응.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인데 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 무드가 깨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뭐, 그렇긴 하죠…….”
“그래도 그쪽은 무드는 별로신경 안 쓰는 모양이고.”
“저도 나름 신경 쓰거든요.”
“아, 그래?”
내 말에 소진이 키득 웃었다.
그러더니.
“뭐…….”
소진이 갑작스레 내앞으로 확 다가와 뒷목을 붙잡았다.
“어어……?”
당황한 내가 뒤로 슬쩍 물러나기 무섭게 그녀는 그 힘을 이용해 내 허리를 살짝 젖혔다.
그 때 넘어지려는 내 등을 붙잡는 손길.
순간적으로 마치 춤을 추다 허리를 끌어안은 동작을 취한 자세가 되었다.
이거 탱고에서 본 그 동작 같은데.
“그러면.”
쓰러지려는 나를 지탱하는 자세 그대로 내 코앞까지 당도한 소진.
흥분한 듯 콧등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이 뜨거웠다.
“확 달아오르게 만들어줘야지.”
그리 말한 소진이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즐거운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미소였다.
이거 오늘 제대로 한 판 뜨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