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0화 〉7. fever time(1) (60/152)



〈 60화 〉7. fever time(1)

쓰리썸 이후로 며칠 뒤.
모델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 나는 막간을 이용해 카페에서 최다슬과 만나고 있었다.

“진짜 죄송해요…….”

이미 톡으로 수십 번도 더 했던 사과를 입으로 꺼내는 최다슬.

참고로 그녀가 사과하는  말도 없이 클럽에서 사라졌던 건에 대해서다.
나도 그걸 묻고자 이렇게 시간을 내서 그녀를 만난 것이었고.

“이제 그만 사과해도 된다니까.”

아메리카노를 쪼르륵 마시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슬이 계속 기가 죽은 상태로 눈치만 살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무리한 요구였잖아.”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깨달았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정조역전 세계라 해도 최소한의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갱뱅을 할 리가 없으니까.

사실 최다슬은  정조역전세계에서 참으로 드문 ‘평범한 여성’이었다.
적어도 다른 섹파들에 비하면 그렇다는거지만.

나는 다른 섹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쓴웃음을지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멀쩡한 여자가 없네.’

 만남부터 잠자리를 가진 주화연, 변호사라는 직업이 있음에도 치한질을 하는(본인 말로는 원하는 남자만 고를 수 있다고 하지만)박소진, 돈지랄을 하면서 섹스파티도 아무렇지 않게 할 것 같은 고혜진과 임승화…….
생각나는 여자들  명만 해도 이 모양이다.

이 세계는…….
하나같이 섹스에 미친 여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 여성들 가운데에서도 다슬의 경우에는 상당히 이성적인 여자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날과 같은 부적절한 상황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정도의 이성은 있다는 얘기니까.

심지어 날 다슬은 꽤나 술을 들이킨 상황.
참고로 술이 들어간 다슬의 음란도는 모든 섹파들 중에서도 최고봉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날의 유혹을 참아냈다.
다슬은 그 날 당장이라도 터뜨리고픈 성욕을 꾹 참아내고 눈물을 머금으며 나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도 극한의 이성을 발휘해서.

……지금 보니  못할 짓을 했구나, 내가.
생각할수록 오히려 내가 미안해 죽을 지경이다.

나는 풀이 죽은 다슬을 향해 재차 말했다.

“딱히 화난 것도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무심한 표정 연기가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일까.
한참을 눈치만 보던 다슬이 마침내 슬쩍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정말요?”
“정말로.”
“휴우…….”

내 대답에 다슬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사과하고 싶은 것은 나이건만.

“역시 불편했던 거지?”
“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
“사실…….”
“응?”
“오늘 보자고 할  엄청 걱정했어요.”
“왜? 보자마자 뭐라고 화낼까봐?”
“화보다는……. 실망하게 될까 봐요.”

여전히 내 눈치를 살핀 채 다슬이 말을 이었다.
그런 다슬의 눈빛에는 아직도 일말의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사실 저희 관계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가 제안한건 정상 범위를 한참 넘어간 거였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걸 수락 안 했다고 해서 뭐라고 했으면……. 아마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내심 오빠한테 실망했을  같아요.”

그야말로 정론이다.
역시 제정신이 박힌 몇 안 되는 여자다운 발언이다.

물론 그녀의 말이 올바를수록 나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쓰리썸이라는 미친 제안을 한 게 나였으니까.

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구나.”
“아, 그래도 오해하진 마세요. 오빠가 여기서 화를 냈어도 전 딱히 아무 말도 안 했을 거예요. 속으로나 그렇게 여겼을 거란 얘기지.”
“……그게 더 무서운데?”
“사실 이런 말도 할 수 있다는 상황이 돼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음, 이건 좀 뻔뻔했나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헤헤.”

기막혀하는  모습에 다슬이 혀를 내밀며 장난스레 웃었다.

확실히 다슬의 이런 대범함은 내가 아는 섹파들 중에서도 단연코 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게 그녀의 매력이긴 하지만.

“뭐, 저도 술도 마시고 하다 보니 잠시 미쳐서 오케이 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말한 다슬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도 진지할 땐 진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사실 아닌 건 아닌 거잖아요. 갑자기 그런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나는 상관없지만 말이지.”
“아, 물론 오빠 생각까지 강요하려는  아니에요. 그저 제 입장에서는……. 그렇단 거죠.”
“그래, 알았어.”
“그리고 너무 빠지면 집착할 거 같기도 하고…….”
“응?뭐라고?”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뭐,  상관 없겠지.

“아무튼 이제 됐어.”

화급히 손사래를 치는 다슬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내가 말했다.

“네 생각이 어떤지는 이해했으니까. 굳이 불편하면 더 얘기 안 해도 돼.”
“아, 네.”

내가 화를 내기라도 할까봐 어지간히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슬이 그제서야 자신 몫의 커피를 쪼르륵 마시기 시작했다.

“음, 맛있다. 아, 말 나온 김에 뭐 좀 물어봐도 돼요?”
“뭔데?”
“우선은…….”

그리 말문을  다슬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도 내 눈치를 살필 이유가  뭐가 있지?

“오빠…….  말고도 다른 여자들 있죠?”

뭐야.
설마 이런 거였나.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있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네요.”

내 즉답에 다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야말로 진짜 뻔뻔한 건 알고 있죠?”
“뭐 어때서. 우리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기가 막힌 눈빛이 나는 이해가 안 가는데.  몰랐던 것처럼 굴고 그래?”
“그래서  명이나 있는데요?”
“너까지 합치면…….”

주화연, 최다슬, 유진아, 그리고 어제 만난 고혜진과 임승화까지 합치면 5명인가.
머릿속으로 셈을 마친 내가 대답했다.

“5명이네.”
“무슨…….”

내 말에 다슬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넘어서서 아예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어이없어 하는 다슬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갑자기 왜 웃는 거예요…….”
“아니, 미안. 니 얼굴이너무 웃겨서.”
“그런 소릴 들으면 보통은 이런 표정을 지을 걸요……?”

그것도 그런가.
원래 세계를 기준으로 해도 5명이나 되는 섹파가 있는 남자는 흔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오빠 진짜 그렇게 많아요? 섹파가 5명이나 있다고요?”
“어.”
“태클   한 두 개가 아니긴 하지만…….”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닫은 그녀가 빨대로 음료를 빙빙 저었다.
 눈치를살피던 그녀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럼일단 하나만 물어볼게요.”
“뭔데?”
“5명이나 되는데 감당할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말이에요.”
“뭐, 매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나는 애들은 너나 다른 애 하나 뿐이야.”

참고로 최다슬 외에 자주 만나는 또  명은 주화연을 말한다.
다른 섹파들과는 그래봤자 한 번 몸을 섞었을 뿐이고.

“흐음…….”

내 대답에 다슬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빨대 너머로 음료가 쪼르륵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저도 유력후보  하나다 이거네요…….”
“응?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순식간에 라지 사이즈의 음료수 하나를 비운 다슬.
내게서 묘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다슬이 테이블에 잔을 탁 내려놓았다.

왠지 내려놓는 게 묘하게 힘이 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보다 오빠 어디 실험실에서 탈출한 빌런 같은 거 아니에요?”
“내가 뭔 나쁜 짓을 했다고 빌런이냐.”
“여자들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고 있잖아요, 지금!”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네.

버럭 소리를 지르는 다슬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에 눈치가 없다는 소릴 듣는 나지만, 지금 그녀가 왜 이러는지는 아무리 나라 해도 잘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질투하는 거겠지.

왕자병 같아서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이지만, 지금의 내 외모는 엄청나게 상향된 상태.
그러니 이런 생각 정도는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으리라.

거 참, 원래 세계였다면 꿈도 못 꿨을 일인데.

“혹시 경멸했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짓궂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 내 물음에 다슬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만나는 여자가 5명이라는데 경멸 안 하는 게 이상하죠!”
“싫으면 이대로 헤어져도 되고.”
“……사실 그게 문제예요.”
“문제?”
“오빠가  막 굴리는 거 엄청 싫은데…….”

쓴 것이라도 삼킨 싫은 표정을 짓는 다슬의 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괴로운 표정을 짓던 다슬이  것을 삼키듯 내뱉었다.

“오빠랑 헤어지는 건……. 더 싫단 말이에요……!”
“그거  골치 아프네.”
“남 일인 것처럼 말하지 마요! 누군 이것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자고 있는데!”
“하하하.”
“웃지 마요!”

분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다슬의 모습에도 입가에 진 미소가 지워지는 일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어떻게 안 웃고 배기겠는가.
존재만으로도 여자를 홀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데.

“그래서 물어볼 건 그게 끝이야?”
“……에휴.”

한동안 날 가만히 노려보던 다슬이 포기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느니 뭐니 해도결국 내가 싫어하는 짓에는 집착하지 않는 부분에 있어서 최대한 간섭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다.
뭐, 나중에 가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원망스럽다는 듯 날 노려보던 다슬이 말을 이었다.

“사실 하나  있긴 한데……. 대답을 들어도 별로 의미는 없을  같네요.”
“일단 궁금하니까 물어보기나 해 봐.”
“그러면…….”

다 마신 컵을 툭툭 치며 다슬이 무심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오빠 혹시 진지하게 여친 사귈 생각 없어요?”
“그건 왜?”
“저랑 사귈 생각은 없어요?”
“뭐…….”

속으로 얼마나 생각하고 던진 질문인지는 묻지 않아도 비디오다.
이미 은근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으니.

“못 사귈 것도 없지.”
“진짜요?!”
“응.”

벌떡 일어난 다슬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상큼한 미소였다.

“내가 다른 여자들 만나는 걸 괜찮아한다면 말이야.”
“…….”

 발언에  말을 잃은 다슬이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빠진 눈초리로 다슬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진지하게 사귄다고 할 수 없는 거 같은데요…….”

하긴 대놓고 양다리를 하겠다는 선언이니 어이가 없을 만도 하다.
정확히는 양다리가 아닌 5다리지만.

“에휴, 됐어요.”

테이블에 고개를 푹 쳐박은  다슬이 작게 중얼거렸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내 말 한 마디에 잔뜩 풀이 죽은 다슬을 보며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감당 안 될 걸  물어보고 그래.

***

그렇게 다슬과의 미묘했던 사이도 얼추 정리가 끝나고 일주일 뒤.
나는 다음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세계는 현실이면서도 소설 속인 세상.

내가 본 작품대로라면…….
슬슬  다른 이벤트가 나타날 때였다.

“수고하셨어요.”
“네, 진아 씨도 수고하셨어요.”
“그럼 내일 봬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패션몰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이제는 완전히 선임 격이 된 김진아와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와중이었다.

“현수 씨.”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수민이 여느 때와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민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야기가 길어질  같은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읽기 힘든 표정.
하지만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 관찰을 거듭한 결과, 이제는 저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을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보였다.

뭔가 진지한 이야기라도 할 생각이로군.
그렇다면…….

“혹시 본사 쪽 이야기입니까?”

내 물음에 수민의 표정이 한층 달라졌다.
이전과 달리, 확연하게 감정이 드러난 모습으로.

“……어떻게 아셨나요.”
“아니, 그냥요.”

그런 수민을 보면서 모른 척 작게 미소를 지었다.

슬슬 온 건가.
연예 쪽 여자들과몸을 섞을 수 있는 기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