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7. fever time(2)
그로부터 30분 뒤.
나는 패션몰 근처의 호프집 안에서 멀뚱히 앉아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장소는 피버샵의 ‘첫 회식’ 자리.
네 명 중 가장 여유가 넘치는 내가 먼저 와서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즉, 이 자리는 나와 대표님 단 둘만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
“쩝.”
어째 내가 생각했던 상황이랑 다르네.
이왕이면 대표님과 단 둘이서 보고 싶었는데.
이 세계에 온 지도 어언 두 달이 다 되어 가는 시점이건만, 아직도 대표님과는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사적인 만남을 가지고자 노력했지만 워낙 철벽이어야지.
실제로 호감도도 그다지 변화가 없었고.
꼭 연예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략 불가 히로인을 공략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불러주기에 조금 기대했는데…….
“어떻게 해야 한다…….”
나는 홀로 자리를 지킨 채 대표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생각을 몰두했다.
분명 음란도 수치만 보면 일단 성적(性的)인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이 두 달간 대표를 관찰한 결과, 그녀가 이성과 사적인 만남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원래 세계에서 펜스룰을 지키는 남성 정치인 마냥.
심지어 친한 대학교 후배이자 직장 선임인 진아 씨마저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해 간접적으로 토로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설마 동성애자는 아니겠지?
실없는 생각을 거두며 나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다들 늦네.”
참고로 현재 시간은 오후 6시.
이미 퇴근시간의 피로함을 달래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북적거림 속에서, 나는 홀로 민망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
특히 아닌 척 하면서 나를 힐끗거리는 여성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이 세계 기준으로 술집에 홀로 온 남자가 흔하진 않으니까.
“크흠.”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날 보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화들짝 놀라 딴 곳을 바라보는 척 하는 여성들이 보였다.
좀 적당히 보지, 사람 민망하게.
관심 받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네.
“잘생긴 것도 피곤하구나…….”
“갑자기 무슨 재수 없는 소리예요?”
내 중얼거림에 대꾸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연주의 모습이 보였다.
크흠, 민망하게 왜 혼잣말 할 때 등장하고 있어.
이렇게 된 거 그냥 뻔뻔하게 나가자.
“자기 입으로 그런 소릴 하고 싶어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와, 진짜 재수 없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보는 연주 양.
얘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단 말이지.
아주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됐으니까 좀 땡겨 봐요.”
갑자기 내 옆으로 온 연주 씨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니, 맞은편에 안 앉고 왜?
“왜 옆에 앉아요?”
“왜요? 싫어요?”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뭔가 2:2로 앉아야 될 거 같아서요.”
아, 그런 뜻이었나.
하긴 직원들에게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으니까.
기왕 앉을 거면 이렇게 사원 대 직원으로 앉는 게 나을지도.
그보다 다들 많이 늦네.
흠, 이렇게 된 거 심심한데 이 여자 좀 놀리면서 시간이나 때울까.
“뭐 한다고 이렇게 늦어요.”
“일 도와준다고 늦은 거잖아요.”
내 말에 연주 씨가 날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투정은.”
“제가 그걸 왜 해요? 직원들 일인데.”
“어휴……. 어차피 회식할 거 같이 하고 빨리 끝내면 좋잖아요. 사람이 뭐 이렇게 정이 없대?”
“아~. 연주 씨는 정이 많아서 처음부터 그렇게 꼽을 주셨구나~.”
“아무튼 한 마디를 안 진다니까……!”
살살 놀리는 내 말투에 연주 씨가 이를 악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 없이 실실 웃어줄 뿐.
첫 만남 때 투닥거린 이후로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꽤나 돈독해진 상태.
보기에는 그저 싸우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사실은 나름대로의 친분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외로 툭툭 치면서 놀리는 맛이 있는 여자였다.
“대표님이랑 진아 씨는요?”
“곧 올 거예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연주 씨가 대답했다.
“둘이서 얘기할 게 있다나 뭐라나.”
“얘기할 거?”
“대충 예상은 가요.”
“뭔데요?”
“모르겠어요?”
거기까지 말한 연주 씨가 피식 웃었다.
“저 사교성도 없는 대표가 굳이 이런 자리까지 만들 이유가 뭐겠어요?”
“대표님 없다고 그렇게 막 얘기하는 거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할 수 있는데요?”
“…….”
이 싸가지 없는 성격은 나한테만 적용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뭐랄까, 눈치가 없는 건 아닌데…….
굳이 그걸 유도리 있게 대처하는 걸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하긴, 생각해보면 또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나이도 어린 만큼 아직 사회생활도 얼마 안 했을 테고, 여러모로 미숙할 수밖에 없겠지.
그 덕에 첫 만남 때 그렇게 지지고 볶고 지랄발광을 떨었을 테고.
아무튼 사과도 받았고,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니 별 상관없는 일이다.
나한테만 지랄 안 하면 그만이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는 연주 씨와 함께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헤엑! 느, 늦어서 죄송해요!”
가게 문을 벌컥 연 진아 씨가 헐레벌떡 테이블로 다가오며 말했다.
얼마나 뛰었는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급하게 올 필요까진 없는데…….
괜히 속으로 닦달했던 게 미안해지잖아.
“후, 힘들다…….”
“좀 천천히 오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두 분 붙잡은 게 저희인데 기다리게 두면 그렇잖아요. 헤헤.”
“일단 앉으시죠.”
“아, 네!”
쾌활하게 웃은 진아 씨가 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진아 씨의 그 뒤로 나는 뒤이어 오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아, 여기에요!”
거기에는 무심하게 서 있던 최수민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대표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시 가만히 선 채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표님.
“…….”
그렇게 뻘쭘하게 있지 말고 뭔가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색한 침묵에 나는 참지 못하고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저, 대표님도 일단 앉으시죠…….”
“……그럼.”
내 말에 그제서야 대표가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그녀의 표정에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생긴 건 진짜 딱 내 취향인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원.
모델 알바도 한 달이 넘었건만 이 사람과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진아 씨랑은 꽤 친해졌는데 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대표에게 시선을 거두고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연주와 이야기꽃을 피운 채 활짝 웃고 있는 진아 씨의 모습이 보였다.
“와, 이 귀걸이 진짜 이쁘다!”
“그쵸?”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아, 제가 자주 이용하는 브랜드가 있는데…….”
나는 물끄러미 내 맞은편의 두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직장 동료와 능숙하게 대화를 잇는 후배.
오른쪽에는 사진 촬영 외에는 제대로 된 이야기도 하지 않는 선배.
저 둘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친해진 건지 모를 조합이란 생각 밖에 안 든다.
오히려 너무 다르니 없는 부분에서 끌리는 걸까?
“기다리게 했군요.”
그리 생각하는 사이 대표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처리해야 할 작업이 좀 남아 있어서.”
“괜찮습니다.”
내게 양해를 구한 대표가 곧이어 내 옆의 연주 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주 씨에게도 폐를 끼쳐 버렸군요.”
“에이, 괜찮아요.”
딱딱하기 그지없는 대표의 말투에 연주가 넉살 좋게 손을 내저었다.
“대표님한테 처음 얻어먹는 거잖아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바로 본론부터…….”
“잠깐, 언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려던 수민을 향해 홱 끼어드는 진아 씨.
“……왜?”
그런 진아 씨의 끼어듦에 대표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뭐, 못마땅하다고 해봤자 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딱히…….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언니만 그렇거든요?!”
오, 방금 그 말은 나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어.
무심한 대표의 모습에 진아 씨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오기 전에 제가 분위기 좀 풀면서 얘기하자고 그랬잖아요! 두 분 다 긴장한 거 안 보여요?”
“그렇습니까?”
거기서 그렇게 돌아보면서 말하면 누가 그렇다고 하겠냐고.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누가 그렇다고 하겠어요!”
마치 내 마음의 소리를 읽은 것 마냥 진아 씨가 처절한 심정을 내뱉었다.
우리 후배님이 마음고생이 심하겠어.
갑자기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을 사이로 나와 연주는 그저 뻘쭘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아하하…….”
이연주 이 여자, 언제는 말 못할 게 뭐가 있다더니.
막상 이런 상황이 오니 그녀도 평소와 달리 어색한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어쩔 수 없지.
더 어색해지기 전에 나라도 총대를 메야겠다.
“저, 일단은…….”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연주를 뒤로 한 채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뭐라도 시키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본론이고 뭐고 간에…….
지금은 배고파 뒤지겠다 이것들아.
***
각종 먹을거리와 술이 테이블에 놓이면서 다행히 분위기도 점차 풀어지기 시작했다.
진아 씨와 연주 두 사람을 중심으로 우리는 모델 관련 이야기를 비롯해 간단한 잡담을 나누었다.
역시 치킨이 진리지.
나는 치킨을 뜯으면서 잡담을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꺄하하하!”
“더 마셔요, 더어!”
술이 들어가면서 한층 붉어진 얼굴로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진아 씨와 연주의 모습이 보였다.
아주 죽이 잘 맞는군.
아니, 심지어 죽이 잘 맞다 못해 나와 대표님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실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득 대표님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왠 사과?
“예?”
“그…….”
반쯤 빈 500cc의 맥주잔을 꽉 쥔 채 그녀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민망하다고 해 봐야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제가 사실 이성한테 좀 서툽니다…….”
“……네?”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대표님이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름 대표라는 사람이 남자한테 서툴다고?
아니, 그래도 한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이성한테 서툴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는데…….
“그, 본사에는……. 남자 직원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대표님이 은근슬쩍 말을 덧붙였다.
“사적으로 본 적도 거의 없고 하다 보니…….”
“그, 그렇군요.”
“……실언이었습니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주시겠습니까.”
“예? 아, 네…….”
“…….”
도대체 여기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아니, 공적인 이야기는 평범하게 말 잘 하면서 도대체…….
심지어 촬영을 할 때는 소녀마냥 활기찬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 아닌가.
처음으로 보는 서툰 대표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랑 나이 차이도 두 살 밖에 안 나고, 여기는 여자도 군대를 가니까…….
원래 세계로 치면 남중남고공대군대 테크를 타고 취직한 케이스라고 봐야 하는 건가?
흠, 이거 어쩌면 사실 철벽이고 뭐고 선을 그은 게 아니라…….
이거 사실은 그냥 남자를 몰라서 아무 반응도 못한 게 아냐?
“여기요!”
내가 그리 생각하는 사이 대표가 큰 목소리로 직원을 불렀다.
기왕이면 나랑 대화할 때도 저렇게 크게 목소리를 내 주면 좋을 텐데.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세요!”
“예에!”
직원이 새로운 생맥주를 가지러 간 사이 대표가 반 남은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꿀꺽─. 꿀꺽─.
내가 멀뚱멀뚱 바라보는 사이 남은 맥주를 쉬지 않고 들이키기 최수민 대표.
목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흰 셔츠 너머로 그녀의 목구멍이 요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후우.”
잔을 비운 대표가 입가에 묻은 흰 거품을 슥 닦았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 나온 맥주가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너무 과음하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제가 주량은 좀 쌘 편입니다.”
“아, 네…….”
“…….”
“…….”
그러고는 다시 대화 단절.
이건 뭐 평생 가도 이야기가 진전이 안 되게 생겼네.
“내가 몸은 쬐끄매도 말이지이……. 이 나이 먹고 민증 보여달라는 거언 아니지 않냐고요오…….”
“진아 씨 정도면 어른이죠오! 자, 저희도 한 잔 더 하시죠!”
그러는 와중에 옆에는 아주 난리가 났고.
둘 다 얼굴 벌개진 거 보니 이건 뭐……. 도움 받긴 글렀군.
일단 옆에 있는 두 사람한테 뭘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거 같다.
결국 내가 어떻게 분위기를 푸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저, 그래서 하실 말씀이란 건…….”
“아, 그랬죠.”
화제를 전환할 겸 묻자 대표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대표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참고로 이건 연주 씨한테도 여기 오기 전에 슬쩍 귀뜸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후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그렇군요.”
“현수 씨.”
역시 공적인 부분에서는 똑부러졌다는 것일까.
어느새 대표는 평소대로의 무심한 듯 진지한 표정과 함께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상황을 전파하고 있었다.
사실 수민을 점찍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기도 했다.
확실히 가끔은 불편하고, 사적인 대화에서 민망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 귀엽긴 하지만…….
역시 지금의 모습, ‘패션몰 피버샵의 대표 최수민’의 모습이 제일 매력적이지 않을까.
“돌려 말하는 건 제 특기가 아니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죠.”
“혹시…….”
잠깐 뜸을 들인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바로 내가 예상했던 전개 그대로.
“연예 관련 직종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