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7. fever time(8)
닫힌 대표실 방문 앞.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면담은 끝나신 모양이군요.”
고개를 돌리자 등 뒤로 방금 전에 본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내 모습을 본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의 수행비서인 이우진이라 합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색 정장 패션과 이마를 훤히 드러낸 머리 스타일, 예의 바른 말투와는 대비되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그 껄떡대는 사장의 취향인지 외모가 꽤나 준수했다.
거기에 몸매도 이 세계의 남성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근육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비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니, 그래도 이렇게 생각하는 건 좀 실례겠지.
“아, 네.”
인사해오는 우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김수현입니다. 대표님께서 이후의 업무에 대해서는 비서님과 상의하라고 하시던데.”
“……또입니까.”
내 말에 이우진이라 칭한 사내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후……. 하긴 그렇겠죠. 그 인간이 제대로 하는 꼴은 본 적이 없으니.”
“네?”
“혼잣말입니다.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아, 예…….”
설마 지금 내 앞에서 대표 욕을 한 건가?
그것도 수행비서가?
“일단은…….”
모든 상황을 파악한 비서가 나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묘하게 달관한 표정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 아뇨, 아직.”
“그럼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건 어떻겠습니까?”
서늘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미는 우진.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모습이다.
혹시 화난……. 건가?
“예, 그러면…….”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악수를 받았다.
그런 나에게 우진이 우아한 몸짓으로 손짓했다.
“그럼 가시죠.”
***
여기가 역전세계라는것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런 내 마음가짐도 아직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서라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하는 줄 아는 모양이죠?”
여자가 한을 맺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그걸 남자가 눈앞에서 풀고 있다고 상상해 봐라.
절로 팔뚝에 소름이 으스스 돋을 지경이다.
“하, 비서의 역할은 엄연히 업무 지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대표라는 사람이 새로 들어오는 직원 업무 역량도 파악하지 않고 비서에게 모두 맡기는 꼴이라니! 자기 회사라는 자각은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 네…….”
비서가 씩식거리며 대표에 대한 험담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았다.
같은 남성이라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이래가지고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음,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면서 억지로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수행비서라는 작자가 알바인 나에게 험담을 늘어놓을 정도라.
그 대표라는 작자, 내가 본 그대로 정말 어지간히 인망이 없는 거 같다.
……진짜 능력 있는 거 맞아?
“그보다 여기 음식 엄청 맛있네요.”
일단은 생각보다 말이 많은 이 청년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릴 목적으로 입을 열자,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우진이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저희 회사의 유일한 자랑입니다.”
“유일이요?”
“대표가 먹을 걸 엄청 밝히는 분이거든요. 덕분에 식당 복지만큼은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습니다.”
“어……. 그렇군요.”
와, 이 인간 아주 작정했구나.
무슨 얘기를 해도 대표 욕으로 끝이 나네.
뭐, 이렇게 된 거 정보 파악한다는 생각으로 들어주는 수밖에.
결국 반쯤 포기한 나는 비서가 화가 풀릴 때까지 욕받이노릇을 해야 했다.
“흥, 차라리 먹을 거나 밝히고 끝내면 다행이죠. 식탐만 그러면 몰라, 아주 남자 보는 눈빛이 진짜 더러워서…….”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사장의 능력에 의문이 들었다.
피버 에이전트의 입장에서 나는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 일반 사원도 아니고, 최측근인 수행비서가 내 앞에서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니.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다.
아니면 내가 외부인이라서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건가?
오히려 내부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쉬쉬할 수도있으니까.
“저기, 비서장님.”
아무튼 언제까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낼 순 없는 노릇이다.
음식을 먹느라 잠시 말문을 멈춘 틈을 타 나는 재빨리 본론을 꺼냈다.
“제가 여기서 해야 될 일이라는 건 뭡니까?”
내 말에 꿀꺽 음식을 삼킨 그가 말했다.
“글쎄요……. 일단 현수 씨가 할 수 있을 정도의 일감은 세 가지 정도겠네요.”
“제가 고를 수도 있는 겁니까?”
“일단 들어보시겠어요?”
비서가 포크로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첫 번째로 일단 매니저…….”
“패스하겠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매니저는 아니지.
아무리 문외한인 나라도 매니저가 얼마나 극한직업인지는 잘 알고 있다.
“즉답이시네요.”
곧바로 대답하는 내 모습에 놀란 듯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그래도 이건 너무 빨리 대답했나.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확실하게 말씀해주시는 쪽이 편하거든요. 그리고…….”
그리 말한 그가 들고 있던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분명 첫 인상은 꽤 차가웠는데 보면 볼수록 가벼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가 말하긴 했지만 사실 저도 매니저 업무는 그다지 추천 드리지 않아요. 후보 중 하나일 뿐이지.”
“그럼 두 번째는 뭔가요?”
“잡무입니다.”
”잡무요?“
”쉽게 말하면 수행비서인 저의 하위직이 되는 거죠.”
”그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문서 복사나 처분, 대표와 손님을 위한 간식 준비, 자재 정리 등등……. 말 그대로 잡무를 의미합니다.“
수행비서의 비서를 하는 건가.
확실히 이 두 번째는 여러모로 내 본목적에 부합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는 대표의 비리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
그렇다면 비서인 그의 밑에서 일하면서 그러한 약점을 더욱 쉽게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제안한 매니저 업무와 강도는 비슷할 겁니다. 시급도 피팅 모델을 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고요. 물론 노동 강도는 비교할 수 없이 힘들 테지만요.”
다만 이 모든 것들은 내 안위가 보장될 때의 이야기.
극한직업으로 알려진 매니저와 비슷한 강도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애초에 힘들게 싸울 일이 없게 하려고 변호사인 소진에게 힘을 보태달라고 했던 게 아닌가.
굳이 진흙탕 싸움으로 가게 될 여지를 내가 만들게 되는 걸지도.
이건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다.
말없이 고개를 젓자 우진이 세 번째 업무를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업무의 보수는 모델 때와 비슷할 겁니다. 저로서는 마지막 업무를 했으면 하네요.“
”저는 뭘 선택해도 되는 건가요?“
”네."
"그럼 한 번 들어나 보죠."
”혹시 ‘너 혼자 산다’라는 방송에 대해서 아십니까?“
예능을 보지 않는 나도 알만큼 인기 있는 유명 예능 프로그램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엄청 인기 있는 예능프로그램 아닙니까.“
”이번에 저희쪽 아이돌 가수 한 명이 출연권을 따냈습니다.“
”아, 네. 축하드립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설마 나보고 출연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거 보통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거잖아.
”거기에 현수 씨가 출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예능 방송에 출연하라고?
그것도 그런 인기 프로그램에? 이렇게 갑자기?
”어……. 잠깐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먹던 것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방송에 나오는 것 정도야 예상은 했다.
애초에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은 연예 기획사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거나, 아니면 지나가는 시민1 같은 역할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설마 시청률 30프로가 넘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 제의를 받을 거라고어떻게 상상하겠는가.
”…….“
음, 일단은 머릿속을 좀 정리해야 될 필요가 있겠는데.
식판에 올려둔 음식이완전히 식어버릴 때까지 나는 고민에 빠졌다.
눈앞의 비서는 그런 나를 본 채 차분히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한 나는 겨우 말문을 띄웠다.
”그, 일단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저 이제 이 회사 막 온 참입니다. 그런데도 출연을 하라고요?“
”원래 방송 일이라는 게 다 그런 겁니다.“
”아니, 하지만…….“
”어차피 다 짜고 치는 거예요. 대본대로 하면 문제될 거 없습니다.“
……그거 리얼리티 예능 아닌가?
”그러면 어째서 제가……?“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 질문에 비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스케줄이 있어서 그 시간대에 출연하는 게불가능하다더군요. 마침 저희 쪽에 제안이 와서 좋았는데 얼굴 비출 연기자가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연기자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인데요.“
”괜찮습니다. 출연 대상도 일반인이니까요. 물론 실상은 연기자지만.“
”…….“
”그리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대본대로 진행하면 문제될 거 없으니까요.“
”아니, 전 당연히 단역 같은 일부터 할 줄 알았는데…….“
”그건 힘들 거 같은데요.“
거기까지 말한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런 외모로 단역이 어울릴 거라 생각한 건가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비서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단역을 못 하는가 했더니…….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너무 튀어서 안 된다는 건가요?“
”꽤 뻔뻔한 면이 있으시네요.“
어이없어 하는 비서의 표정을 보며 나는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이곳에서의 나는 상당한 미남으로 변모한 상태.
그런 내가 거의 비중도 없는 단역으로 나온다면?
당연히 엄청나게 주목을 받겠지.
혹여나 거의 비중도 없는 단역이 주연보다 너무 튀게 된다면 그것도 여러모로 낭패일 터.
설마 이런 걸로 제약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라…….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지.
”그럼 대답은 언제쯤 드리는 게 좋을까요?“
”내일까지 얘기해주시면 됩니다.“
거기까지 말한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네?“
”내일까지 생각해 보시고 천천히 연락 주세요.“
”어, 오늘 제 일정은요?“
”원래 첫 날은 하는 거 보면서 눈으로 익히는 거 모르세요?"
"아니, 하지만."
"괜찮으니 오늘은 회사 견학하는 느낌으로 사옥이나 한 번 둘러보시죠.“
아니, 나 일 하러 왔다니까?
눈으로 익히고 나발이고, 뭘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는데?
황당해 하는 나를 뒤로 한 채 유유히 자리를 뜨는 비서.
나는 그런 비서의 뒷모습을 어이없는 기분으로 바라볼 따름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회사야 여기.
”도대체 뭐가 뭔지…….“
”뭐가요?“
”그러니까 갑자기 방송 출연을 하라고…….“
윽, 실수할 뻔했다.
순간적으로 대답하려는 입을 틀어막으며 홱 고개를 돌렸다.
”헐, 대박.“
거기에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연주의 모습이 보였다.
”방송 출연? 진짜로요?"
“…….”
나를 바라보는 연주의 눈빛이 호사가 마냥 초롱초롱 빛났다.
그걸 보는 순간 앞으로의 일들이 대충 예상이 갔다.
아, 이건 무조건 소문 퍼지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