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8. 연예계의 사정(3)
윤화정과의 관계를 쌓기 위한 내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사실 계획이라고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방송 출연을 위해 며칠 동안 의무적으로 얼굴을 마주보며 친분관계를 쌓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굳이 내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그녀와 만남을 끈덕지게 잡고 늘어지거나 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아무튼 나는 주어진 3일 동안 이런 저런 말을 해 가며 화정을 유혹했다.
다만 내 예상만큼 쉽게 진행된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첫 날에는 호감도를 약간 올리는 정도로 끝내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잘 웃어주는 것같으면서도 막상 확인해보면 제자리걸음인 호감도 수치를 보면서 내심 몇 번을 좌절했는지 모른다.
겉으로는 살갑게 사람을 대하지만 내심 벽을 두고 있는 여자.
그것이 화연에 대한 내 첫 감상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날.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누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술 몇 잔과 별 거 아닌 내 위로 몇 마디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 세계는 단순히 정조만이 역전된 게 아니다.
원래 세계에서 남자들이 지고 있던 각종 짐까지 여자들이 지게 된 세상이니까.
이 세계가 여자에게 각박한 세상이란 건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중에서도 유별났다.
대화를 하면서 그녀의 인생사가 남들 못지않은 고충과 아픔이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멋대로 내 인생을 재단하는 건지!”
도대체 그 동안 얼마만큼의 울분을 감추고 있었던 걸까.
그렇게 철벽을 치던 여자가 고작 술잔 두번 마주친 걸로 내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고민했던 게 허무할 정도로.
“에휴.”
화정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한숨을 푹 쉬었다.
이래서 이 세계 남자 놈들은 정이 안 간다니까.
이렇게 가녀린 여자 하나 위로하지 못한다니 기가 막혀서 코웃음도 안 나올 지경이다.
물론 이러한 화정의 약해진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원래 세계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나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세계 여자들의 가치관을 백분 이해할뿐더러, 이 세계의 남자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허심탄회하게 먼저 풀어나갔으니까.
“내가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도대체 네일아트가 뭐가 어때서……!”
“그러게요.”
그 날, 나는 한 시간 넘게투정을 부리는 화정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받아주기로 했다.
첫 만남 때 보여준 그녀의 여성스러운 성격은 타고난 것이었다.
정조역전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말이다.
왜, 어릴 때 활기찬 공룡 장난감보다 귀여운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남자애들도 있지 않은가.
나쁜 건 그녀가 아니다.
세상이 그녀를 ‘여자답게’ 살라는 프레임으로 가득 씌워져 있었을 뿐.
결국 역전세계라고 해도 근본적인 건 그대로라는 건가.
“확실히 주변 사람들이 화정 씨를 너무 몰아세운 모양이네요. 남녀 간에 구별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 건지 원.”
“훌쩍, 현수 씨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요.”
“그, 그렇죠?”
“뭐, 전 속물이라 얼굴은 보지만요.”
“네?”
“예쁘고 잘생기면 뭘 하든 다 용서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말은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코나 풀어요.”
“크흥.”
나는 중간 중간 그런 화연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호감도를 쌓았다.
뭐, 장난도 좀 치긴 했지만 아무튼 호감도 수치는 올랐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인 셋째 날.
나는 완전히 긴장이 풀려 정신줄을 놓은 화정을 보며 한쪽 눈을 감았다.
호감도 수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4라…….”
이 세계 기준으로 그렇게 높은 수치는 아니다.
하지만 20 정도의 수치라면 최소한 이성으로서는 봐 준다는 얘기다.
그리 생각하니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좋았어.”
애초에 3일 만에 갑자기 사람을 홀리는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다.
수치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화정 씨 매니저시죠? 네.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같아서요. 네.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 괜찮습니다. 천천히 오세요.”
연락을 마친 나는 자리에 앉아 화정을 바라보았다.
“으으음…….”
테이블 위로 쌕쌕 소리를 내며 무방비하게 잠든 화정의 모습이 보였다.
잠꼬대를 하는 화정을 보고 있자니 절로 아빠 미소가 새어나왔다.
“예쁘긴 예쁘네.”
나는 세상모르고 잠든 그녀의 발그스름한 볼을 툭툭 건드렸다.
연예인 아니랄까봐 자는 와중에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느낌이다.
나름대로 여성 외모의 상향평준화가 된 이 세계에서도 연예인을 할 정도의 얼굴이니 말 다 했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착한 나도 참…….”
워낙 대단한 여자들과 섹스를 해서 그런가.
이제는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을 외모의 그녀를 봐도 그러려니 할 뿐이다.
이러다 나중에 불감증이라도 걸리는 건 아닌가 몰라.
딸랑.
“아, 죄송합니다!”
“오셨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헐레벌떡 뛰어오는 매니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왔다.
“으쌰.”
샤워까지 마치고 그대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였다,
마지막으로 기절해있을 화정에게 안부용 카톡을 남긴 뒤 눈을 감았다.
“흐음…….”
술기운과 함께 아쉬운 기분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사실 뻗어버린 화정을 본 순간 나쁜 생각도 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의 성범죄는 범죄로 취급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리 생각하니 유혹에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만.
“사람 인생 망쳐서까지 그럴 순 없지.”
이 세계에서 화정이란 여자는 상당히 유명한 연예인이다.
내 욕심만으로 그녀를 취하는 순간 많은 것이 어긋나게 될 심산이 컸다.
뭐, 몰래 하는 것도 나름 스릴이 있긴 할 테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말하지는 않는 걸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면서.
나는 그대로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들었다.
***
빠바밤~♪
“으음…….”
다음날 아침.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힘겹게 핸드폰을 낚아챘다.
으, 이 시간에 뭔데…….
“여보세요…….”
“혀, 현수야.”
“어엉? 누구세요?”
“나 화연인데……. 자고 있었어?”
“어? 어어……. 크흠!”
잠긴 목소리와 멍한 정신 상태에서 가까스로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화연이야? 오랜만이네.”
참고로 최근에는 바빠서 섹파를 만날 틈이 많이 없었다.
그토록 밝히는 화연이마저도 못 볼 정도로.
“아……. 응. 그러게.”
“그보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어, 그게……. 너 지금 일어난 거면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네.”
“갑자기 뭔 소리야?”
“저기, 일단 TV 좀 켜봐. 그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거야.”
“TV?”
“채널은 21번.”
아침부터 갑자기 연락해서는 뭔 소리래.
의아한 심정으로 리모컨 전원을 켜고 말한 대로 채널을 21번으로 돌렸다.
“그럼 다음으로는 따끈따끈한 연예계 소식인데요.”
그녀가 말한 채널에서는 나도 눈에 익은 유명한 연예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허나 다음 진행자의 말에서 나는 화연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자, 이 사진을 보시죠.”
진행자의 말과 함께 배경화면으로 사진 한 장이 떠오른 것이다.
다소 어두운 술집 내부.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든 윤화정,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얼굴이 가려진……. 한 사내.
틀림없다.
저건 분명 어제 나와 화정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기자 분 말씀에 따르면 어제 윤화정 씨와 다른 일반인 한 명이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거군요?”
진행자가 맞은편의 기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팩트만 말씀드리면 그렇다는 거죠.”
“특별한 관계일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겠군요.”
“지금 상황에서 단언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직접 두 사람의 모습을 본 기자의 말에 따르면 저 두 사람이 꽤나 각별한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매니저를 불러 돌아갔다는 걸 확인했고요.”
“네. 그러니 섣부른 추측은 금물……,”
기자의 말을 다 들을 새도 없이 나는 바쁘게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창을 켜기 무섭게 실검 1위로 윤화정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윤화정 일반인, 윤화정 꽐라, 일반인 정체, 일반인 모델, 일반인 외모 등등…….”
클릭하기 무섭게 올라오는 각종 연관검색어도 눈에 띈다.
기사? 기사야 이미 클릭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썸네일에 모자이크된 나와 화정의 다정한 모습이 떡하니 박혀 있었으니까.
모든 사태를 파악한 뒤에야 나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음…….”
어, 이건 좀 당황스럽네.
방송에 나가면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직 방송도 안 나갔는데?
“여보세요? 현수야?”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화연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듣고 있어.”
“방송 보고 있는 거지?”
“응.”
“남자 쪽 얼굴은 가려져서 잘 안 보이긴 했지만…….”
거기서 말을 끊은 화연이 잠시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약 2초 정도의 침묵이 있은 뒤에야 화정이 말을 이었다.
“그거 너 맞지?”
아무리 그래도 저 실루엣은 나를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이건 발뺌도 못 하겠는데.
“누구한테 말하진 말고.”
사실상 인정한 내 대답과 함께 화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그런 화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괜히 내 기분도 거북해졌다.
딱히 나쁜 짓도 안 했는데 묘하게 불편하네…….
“어, 그런데 옆에 누구 있어? 엄청 소란스러운데.”
“화린이. 지금 울고 있거든.”
“어…….”
“너인 거 바로 알아보고 나한테 먼저 방송 보라고 한 것도 동생이야. 지금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야. 네가 이걸 좀 봐야 되는데.”
“아니, 뭐……. 일단 네가 좀 잘 달래줘.”
“알았어.”
“…….”
“…….”
그리고는 다시 어색한 침묵.
어째 화제를 돌리려고 했는데 도리어 더 불편해져 버렸다.
……미치겠네.
아니, 딱히 바람피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얘한테는 처음부터 자주 이런 식으로 살 거라는 얘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얘랑은 하도 몸을 섞어서 그런 건가?
“……저기.”
“응?”
아무리 그래도 계속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
평소와 같은 화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괜찮은 거지……?”
“뭐가? 내 동생?”
“그러니까, 화린이 말고…….”
“아, 나?”
내 물음에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갔다.
“당연히 괜찮지! 오히려 감탄했다고! 내가 이 정도로 능력있는 남자랑……. 그랬구나 하고.”
“……비꼬는 걸로 들리는데?”
“아니, 전혀? 칭찬이야, 칭찬. 이야, 진짜 가문의 영광이라니까? 연예인도 꼬시는 남자의 첫 경험을 내가 땄다? 자랑도 이런 자랑이 없지. 지금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
“저어어언혀!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기분 좋은걸!”
누가 봐도 연기라는 게 느껴지는 말투.
꼭 3류 연극이라도 하는 거 같다.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화연의 웃음소리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거 내버려두면 두고두고 기억하겠지.
이런 부분은 남녀다를 거 없이 짜증날 테니까.
그보다 이런 부분까지 원래 세계의 남자를 닮을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야, 일단 나중에 다시 설명할게. 일단은 내가 좀 바빠서…….”
“아, 그러시겠죠! 바쁘시겠죠! 제가 바쁘신 분 붙잡으면 안 되는데! 공사가 다망하신 분한테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젠 대놓고 비꼬는구나…….”
이건 안 되겠다.
지금 풀지 않으면 진짜 나중에 어떤 식으로 폭탄이 터질지 모른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야, 주화연.”
한숨을 쉬고픈 것을 참으며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들어봐.”
“뭐?! 바쁘다며?”
“일단 진정 좀 하고 10초만 있어 봐. 설명할 테니까.”
차분한 내 말투에 화연의 목소리가 그제서야 그쳤다.
물론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여전했지만.
나는 그런 화연을 향해 순식간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했다.
“나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일 관련해서 만난 것뿐이야.”
내 말이 끝나고도 화연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화연에게 재차 강조하고자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진짜 맹세고 없었어.”
“……딱히 신경 쓴 적 없는데.”
“아, 그래.”
좋아.
이 부루퉁한 목소리는 대충 풀렸단 얘기거든.
일단 발등의 불 하나는 대충 끈 거 같다.
“아무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다.
“나 진짜 바쁘니까 끊는다.”
“나중에 얘기해줘야 돼.”
“신경 안 쓴다며.”
“닥쳐.”
“……진짜 끊는다.”
“야, 잠깐만.”
서둘러 통화를 끊으려는 나를화연이 다급히 붙잡았다.
어느새 진지해진 목소리로 화연이 말했다.
“너 그거 하나는 기억해야 돼.”
“또뭐.”
“네 첫 여자.”
“뭐?”
“네 첫 아다 가져간 사람이 나라는 거.”
“…….”
너무도 진지한 화연의 목소리에 순간 빵 터질 뻔했다.
참자. 여기서 웃으면 진짜 피곤해진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그거 하나만큼은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어……. 그, 그래.”
여러 번의 난관을 겨우 헤쳐나간 나는 가까스로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진짜 여러 가지 의미로 미치는 줄 알았네.
곧이어 나는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답변을 해줄 만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비서장님.”
“연락이 빠르시네요.”
“상황은 알고 계시죠?”
“물론이죠.”
피버 에이전트의 2인자 이우진.
전화기 너머의 그가 만족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일단은 만나서 이야기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