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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10. 나 홀로 여행(4) (87/152)



〈 87화 〉10. 나 홀로 여행(4)

미리 봐둔 렌터카에서 차를 빌린 뒤 나는 그녀와 함께 시내로 향하기로 했다.

“그럼 일단 짐부터 내려놓고 갈까요? 근처에 식당도 많던데.”
“네. 어차피 근처니까 그래도 되겠네요.”

일단 우리 둘 다 숙소가 근처인 데다가, 같이 움직이면 빨리 밥도 먹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하긴, 시간도 얼추 저녁 먹을 시간이긴 하다.

뭐……. 설마 정말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인 건 아닐 테지.
아니리라 믿는다.

“출발할게요.”
“네~.”

옆 좌석에 앉은 송은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안전벨트까지 착용한  확인한 나는 곧이어 엑셀을 밟았다.

부우웅─.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고 있으니 도로변 옆으로 해변가가 훤히 보였다.
도로 주변에는 드문드문 돌하르방과 돌담 등, 제주도 특유의 투박하면서 정겨운 풍경들이 보였다.
창문을 열자 살짝 텁텁한 공기와 함께 도로 사이로 야자수가 휙휙 지나갔다.

확실히 풍경이 평소와 다르니 여행 온 실감이 나네.

“흐흥~.”

오랜만에 온 여행이라 그런가.
그냥 운전만 하는데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군.

“킥킥.”

운전대를 잡으면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옆에서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너무 대놓고 웃으시네.
뭐 별 상관은 없지만.

“크흠. 죄송해요.”

슬쩍 옆으로 시선을 던지자 눈이 마주친 송은지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되게 신나 보이셔서 저도 모르게그만.”
“괜찮습니다. 저도 너무 오랜만에 온 여행이라 들떴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여행 온  언제신데요?”
“언제더라…….”

그녀의 물음에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간  대충 입대 전이었나?
스무 살 때 학교에서 지원이니 뭐니 해서 일본으로 학교 동기들끼리 여행을 갔었지.
그리고 다음 학기  오랫동안 좋아했던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대차게 까이고, 대학생활은 완전 망해서 곧바로 입대…….

……괜히 떠올렸네.

“입대 전이었으니까 5년 정도 됐네요.”

애써 끔찍한 기억을 털어내고 말하자 송은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대요? 군필이셨어요?”
“네. 왜요?”
“어, 아니, 잠깐만요. 5년 전이면 지금 현수 씨 나이가……. 스물여섯?”
“맞는데요?”
“그……. 생각보다 나이가  있으시네요.”
“그래요?  살로 보셨길래?”
“아, 그게…….”

운전 도중에 슬쩍 본 옆모습에서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설마 군대도 안 간 핏덩어리로 생각한 건가?

하긴 뭐……. 지금 내 얼굴은 20대 중반이라고 보긴 힘들 정도로 깨끗한 모습이니까.
과장 안 보태고 거의 아기피부 수준이랄까.

지금 생각해보면 과거 내 얼굴은 그야말로 겉늙은이 그 자체였다.
속은 20대 중반에 불과하지만, 이전의 나는 군대에서 구르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폭삭 늙어버렸던 상태였으니까.

 왜, 못생기진 않았는데  보면 주름도 지고 얼굴도 거친 그런 애들 있지 않은가.

내가  그랬다.
못생기진 않았는데 묘하게 늙어 보이는 얼굴.

못생겼던 건……. 아닌 거 맞겠지?
기본형 업그레이드인 지금 얼굴은 나름 먹히고 있으니까.

아무튼.

무협으로 치면 지금의 나는 환골탈태, 혹은 반로환동한 몸이나 다름없는 상황.
어려보이지 않을 수가 없지.

“그래서  살로 보였어요?”

내 재촉에 그녀가 다시 슬쩍 날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내 모습을 스캔하듯이.

“음……. 스무 살?”
“왜 의문형이에요?”
“어어……. 지금 보니까 마냥 어리게만 보이진 않는  같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어디가요?”
“아뇨, 뭐. 그냥 분위기가…….”

힐끔거리는 그녀의 시선에서 나는 새어나오는 욕망을 느낄  있었다.

딴에는 안 들키게끔 눈만 슬쩍 돌리는데, 이미 내 가슴이나 아래쪽까지 훑는 게 느껴졌다.
운전 중이라 모를 거라 생각한 건가.

허나 이를 어쩐다.
모른 척해도  바보같은 행동이 자꾸 보이는걸.

그래, 원래라면 저걸 남자가 해야 되는 행동인데…….
여자가 저러는  봐도 봐도 묘한 기분이네.

과거 같은 입장에 서 있었던 나로서는 저런 모습들이 이해가 되기에 더 슬픈 기분이다.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또 짠하기도 하고…….

원래 세계에 있는 여성들도 남자한테 받는 시선을 보면서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으려나?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은지 씨는  살이에요?”

묘한 기분을 가슴 한구석에 치워둔 채 나는 잡담을 이어갔다.
 질문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몇 살일 거 같아요?”
“글쎄요…….”
“한 번 맞춰 보세요.”
“흐음.”

그 말에 나도 그녀가 했듯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물론 나야 운전 중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고.

“…….”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생각보다 거대한 가슴.

제복이 생각보다 헐렁해서 그런가, 처음 볼 땐 단순히  크구나 정도로 느꼈는데.
막상 가까이서 보니 가슴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크기만 보면 애가 있는 유진아 그 아줌마에 맞먹을 정도였다.
애가 생기면 보통 가슴이 커진다고 하는데 애는커녕 애인도 없어 보이는 송은지가 애가 미망인 유진아와 견줄 정도면……. 이미 말 다 했지.

내가 저 가슴에 오렌지 주스를 쏟은 건가.
그리고 잘하면 하얀색 주스도 쏟게 될…….

……크흠, 운전 중이니 자제하자.

“……스물넷?”

언제까지 가슴만 힐끔거리면서 눈치를 살피고 있을순 없는 노릇.
음란한 시선을거두고 대답하자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요? 그렇게 어려 보이나요, 제가?”
“대충  정도 될 거 같은데. 그래서 진짜 몇 살인데요?”
“스물여덟이에요.”
“정말요?”

스물여덟이라고?
솔직히 동갑이거나  살 적은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뭐, 가슴은 그 나이에 걸맞은 크기긴 하지만…….

아니, 가슴 생각은 그만하자.

“다 왔네요.”

그렇게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앞서 말했듯 나와 그녀의 숙소 거리는 정말 걸어서 10분 거리도  되는, 무척 가깝게 위치한 상태였다.
덕분에 나도 별다른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짐 내려드릴게요.”
“어, 자, 잠깐만요! 괜찮아요!”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나와 트렁크를 열려고 하자 은지 씨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무거운데 내려두세요! 제가 하면 되니까!”
“아니 뭐, 이 정도 가지고…….”
“아무리 그래도 오늘 초면인 남성분한테 이런 걸 시킬 순 없잖아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짐을 빼내는 은지 씨를 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분명  세계 기준으로 근력은 바뀌지 않았는데 어쩐지 이런 부분은 이상하게 바뀌어있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 건지.

읏차, 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내려든 은지 씨가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현수 씩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뭐 이런 걸 가지고.”
“덕분에 교통비도 굳었잖아요. 저야 당연히 고맙죠.”
“딱히 굳은  아닐 텐데요.”
“네?”
“저 밥 사 주신다면서요?”
“아…….”

생각지도 못했다는 말을 들은  멍해지는 표정을짓는 은지 씨.
허나 그것도 잠시.

“후후. 그건 아니죠.”

무슨 말이냐는 듯 은지 씨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래 보답할 생각이었으니까 그건 예외인 걸요.”
“그렇게 여유만만 했다가 나중에 후회합니다. 저 엄청  먹는다고요.”
“바라던 바예요.”
“정말이죠?  그럼 고무줄 바지 입고옵니다?”
“아하하!”

내 농담조에 그녀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꽤 뻔뻔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넉살이 좋다고 해 주시죠.”
“정말 못 말리겠네……. 아무튼, 그럼 조금 있다 여기서 봐요.”
“네.”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은지 씨와 나와의 숙소 거리가 거의 근처였기에 도착하는 데에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렌트카를 주차하고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서 오세…….”

순간 인사를 하던 말을 끊으며 잠시 말문을 멈추는 여직원.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다.

입을 헤 벌린 직원을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1인실 예약했는데요.”
“아, 저, 그, 네! 그, 서, 성함이……?”
“김현수입니다.”

헐레벌떡 수속을 마치는 직원을 보며 나는가만히 기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운터 안에 있던 다른 직원  명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내 얼굴 한쪽에 구멍이 나는  아닐까…….
행복한 고민이 따로 없네.

“여기 키 있습니다!”

멍하니 잡생각을 하는 사이 수속이 끝난 직원이 키를 건네며 말했다.

“2층이고 필요한 거 있으면 배치된 전화로 연락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 네.”
“그러면 짐은…….”
“아, 괜찮습니다. 제가 들고 가도 되니까.”
“그런가요…….”

내 말에 여직원이 티가 나게 축 쳐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여기 세상이라고 여자가 힘 더 쌘 거 아니잖아.
그래서 그냥 내가 들겠다는데 왜 이래.

그렇게 여직원의 아쉬운 시선을 뒤로 한 채 나는 예약해둔 방으로 향했다.

“오오.”

문을 열자 보이는 방 안을 둘러다 보면서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예약할 때 보긴 봤는데 실물로 보니장난 아니네.
역시 숙소는 비싼 곳이 짱이지.

“일단  씻을까.”

그럭저럭 깔끔한 숙소를 대충 확인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흐른 땀을 씻은 뒤 짐을 정리하고, 대충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기까지 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

가는데 10분이니 20분이나 빈둥거릴 시간이 남은 셈이다.

“엇차.”

푹신한 2인용 침대에 다이빙을 한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군.

“…….”

침대에 누운 채 나는 다시 한 번 여행의 목적을 상기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번 여행은 일종의 ‘수련’이다.
바로 이 세계에 적응하고 즐기기 위한 수련 말이다.

“송은지…….”

이번 여행의 첫 타겟의 이름을 나직히 불러 본다.

“괜찮을까?”

괜찮냐고 함은 당연히 오늘 만들어갈 잠자리를 말하는 거다.

그도 그럴 게.
지금의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여자를 꼬실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건 분명 내게는 특별한 일이었다.
아무리 역전세계라고 해도, 이렇게 첫 만남에서부터 ‘정상적’인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고 한 건 송은지 외에는 한 번도 없었으니까.

“뭐, 정상적인 걸 제외하면 처음은 아니긴 하지…….”

중얼거리면서 나는 지금껏 섹스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기 위해서.

일단 화연이나 소진이 누나는 뭐, 애초에 소설에서부터도 야한 설정이 있는 ‘등장인물’이라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최다슬 걔나 진아 아줌마 같은 경우에는 오랫동안 안면을 텄기에 가능했던 거고.

물론 등장인물도 아니고 첫 만남부터 그 짓을 했던 고혜진과 임승화의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예외.
애초에  둘은 ‘정상적’인 범주에 들어가는 경우가 아니니까.

“으음…….”

과연 지금 내가 하는 게 옳은 걸까.

……아니, 사실 옳다고 순 없겠지.

아무리 정조역전세계라고해도  세상의 사람들도  사람이다.
그저 성욕이 조금 더 강할 뿐.

여기에도 법이 있고 규율이 있다.
단순히 소설 속 세상이 아닌, 대한민국의 법과 유교사상, 일처일부제가 보통으로 남아 있는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또 소설 속 설정이남아있는 세상이기도 하잖아?

그런 세상에서 즐기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아깝단 말이지.

“뭐, 진짜 나쁜 짓만 하면 괜찮겠지.”

물론 나도 임자가 있는 여자를 뺏는다던가, 애만 만들고 튄다던가, 아무튼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선을 걸치는섹스 라이프를 즐기는 것.
이게 내 모토다.

아, 물론 이 세계에서 남자로써 혜택을 받을 수야 있겠지.
범죄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거부할 생각은 없다.

“더 뻔뻔하게 나가야지, 차라리.”

어차피 대놓고 섹파 투성이로 살 거라면, 그냥 아예 얼굴에 철판 깔고 살아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뻔뻔해져야 주변도 덜 흔들릴 거다.
오히려 미안해하고 불안해할수록, 주변 상황에 휩쓸릴 여지가 생겨날 테니까.

이번 여행을 굳이 ‘수련’이라 여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좀  유연하게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맺는 연습을 위해서 말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애초에 작가도 즐기라고 했었잖아?

솔직히 이렇게하라고 만든 세상인데, 뭐 나쁠 게 어디 있겠어.

나는 잘못한 거 없다.
음, 그렇고 말고.

그렇게 나름 합리화를 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가볼까?”

시간을 확인한 나는 마침내자리에서 일어났다.

 풍만한 가슴을 마음껏 주무르는 것.
그것이 오늘  유일한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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