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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화 〉10. 나 홀로 여행(6) (89/152)



〈 89화 〉10. 나 홀로 여행(6)

숙소에서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약속했던 장소로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바깥은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여긴가.”

약속했던 장소는 일전에 송은지가 말한 근처의 평범해 보이는 고기국수 전문점.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름대로 제주도 특산물인 고기국수를파는 명물가게  하나라고 한다.

“현수 씨! 여기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도착한 은지가 손을 흔들며 맞이하는 게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스튜어디스 제복을 벗은 그녀의 사복 차림.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청색 핫팬츠에 흰색 나시, 그런 나시에  벌인 것 마냥 얇은 가디건, 테이블 위의 팔뚝 위로 풍만한 가슴골이 얹혀져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진짜 크긴 존나 크네.

“뭐 시킬까요?”

내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가 내게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고기국수가 유명하다면서요. 그거 먹을게요.”
“에이,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뭐, 더 시키게요?”
“그럼요. 좀 더 시켜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곧바로 직원을 향해 손을 들었다.

“이모! 여기 고기국수 두 개랑요. 아, 이거 맛있어 보이니까 이거하고, 그리고이거하고…….”

기분 탓인지 어째 전보다 조금 들뜬 느낌인데.
뭐, 나야 사준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지.

나는 신이 나서 다양하게 주문을 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시켜도 돼요.”

음식을 가져온 이모가 하나둘씩 테이블이 채우는 와중에도 그런 말을 하는 송은지.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먹을 걸로 꼬시려는 속셈인 거 같은데 말이지.

“국수 먼저 나왔습니다.”

가장 먼저 시킨 음식이 올라오고 우리는 젓가락을 들었다.
한 젓가락을 뜨기 전 내가 말했다.

“잘 먹을게요.”
“네. 많이 드세요~.”

흐뭇하게 웃는 그녀의 시선이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속셈이 너무 눈에 보이기에 더더욱.

에이, 모르겠다.
일단은 배부터 채우자.

“오, 맛있다.”

생각보다 괜찮은 맛에 나는 작게 감탄했다.

사실 워낙에 배가 고팠던지라 나로서는 일단 허기부터 채울 생각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원래 오늘은 좀 쉬고 진짜 시작은 내일부터라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렇죠?”

 말에 송은지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아직 한 젓가락도  뜨고 나 먹는 거 보고만 있네.

“나름 주변에 있는 곳 중에서 조사한 곳이에요.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렇군요. 은지 씨도 빨리 드세요.”
“네. 아, 현수 씨. 이것도 드셔 보세요. 여기 특산물이래요.”

그녀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아예 째로 내 앞으로 밀어냈다.
이건 뭐 아들 먹는 거 보는 엄마도 아니고.

“음식 나왔습니다.”

 와중에도 아직 주문이 끝나지 않은 음식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강건한 나라고 해도 다 먹긴 힘들 정도의 양이었다.

“…….”

이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버한 거 아닌가.

“왜 그러세요?”

테이블을 보며 기가 막혀하는사이  눈치를 보던 은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입에 안 맞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저만 먹는 거 같아서 좀.”
“에이, 당연히 저도 먹죠. 그런 걱정 말고 빨리 드세요.”
“아니, 그보다 이거  먹을 순 있어요?”
“못 먹으면  가면 되죠.”

그래. 그것도효율적인 방법이긴 하지.
그런데 굳이 처음부터 많이 안 시켰으면 되지 않을까?

‘보자, 영수증이……. 이런 미친.’

슬쩍계산서를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니, 무슨저녁 한 끼에 10만원을 쓰냐고.

뭐, 그만큼 많이 시켰으니 가격 자체는 불만이 없다.
허나 한 끼에 아무리 비싸도 3만원을 넘기지 않는 서민 의식을 가진 나로서는 쉽사리 넘어가기 힘든 금액이었다.

많이 먹는다고는 했지만 반쯤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더치페이 해야겠네요, 이건.”

아무리 그래도 이건 혼자 내게 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내 말에 은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아무래도 이렇게나 시키고 그냥 얻어먹는  좀 아닌 거 같아서요. 제가 부담이 돼서 안 되겠어요.”
“에이, 아니에요! 부담은 무슨!”

말도 안 된다는  은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제가 기분 좋아서 사는 거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 전~혀 없어요.  인간이랑 같이  먹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하하, 혼잣말입니다. 아무튼 사양 말고 많이 드세요!”
“……진짜 괜찮겠어요?”
“아, 물론이죠! 진짜! 전혀! 부담안 가지셔도 되니까요! 그냥 마음 놓고 드세요!”

이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도  말 없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거 같은데 아무튼 공짜 밥을 먹는 나로서는 나쁠 거 없지.

“뭐, 남으면 숙소에서 같이 먹어도 되니까…….”
“네?”
“아, 아니, 혼잣말이에요! 아하하!”
“아, 네.”

이 누나 은근히 혼잣말 자주 하네.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뒤로 한  나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내가 먹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쉰 그녀도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밥을 먹고 헤어졌느냐 하면.
당연히 대답은 NO다.

“2차 가시죠.”
“으, 응?”
“2차 가자고요. 어차피 서로 숙소도 거의 근처인데. 간단하게 술 한  해요. 내일 서로 여행 지장 안  정도로만 해서.”
“어, 어?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죠. 뭐, 누나가 싫으면 어쩔 수 없고요.”
“아, 아니! 저야 좋죠!”
“말 편하게 하라니까요, 누나. 식당에서도 먼저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라 한  누군데.”
“아, 그, 그랬나?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송은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먼저 2차 얘기를 꺼내긴 했다만 거절당할 거라는  애초에 생각도 안 했다.
이미 식당에서부터 은근슬쩍그윽한 시선을 보내던 그녀였으니까.

도리어 그녀야말로 속으로 ‘좋았어!’를 외치고 있는  아닐까 싶다.
그녀 입장에서는 헌팅을 당한 게 아닌, 헌팅을 ‘성공’한 셈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근처 술집에서 2차를 보냈다.

“아니, 그게 뭐에요! 푸하하!”
“야, 너 너무 크게 웃는 거 아냐?!”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서로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었다.

의외로 첫인상과 달리 송은지는 허당 같은 면모를 종종 보이면서 나를 웃기게 했고, 송은지는 이 세계 기준으로 상당히 대범한 남자인  모습에 꽤 놀란 눈치였다.

둘 다 더 긍정적으로 서로를보게 됐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다고 느꼈을 즈음.

“그럼 슬슬 나가자, 누나.”

나는 맞은편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꽤 마셨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아, 왜애. 조금만  마시자. 아직 시간도 얼마 안 됐는데에.”
“나야 그러고 싶은데 누나가 너무 취한 거 같아서.”
“으으…….”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재촉에 일어나는 송은지.
비틀거리는  같으면서도 눈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누나 연기 너무 못 하는데?

최다슬의  명품 취중연기에 비하면 턱 끝에도  미치는 어설픈 연기.
멀쩡한  뻔히 보이는데도 아닌 척 비틀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 참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크흠.”

나는 터지려는 웃음보를 참으며 겨우 그녀를 일으켰다.

“자, 일어나요.”
“으음…….”

내가 그녀의 허리엔 손을 감자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혼자 당황하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진짜 미치겠네.

“푸흡…….”

결국참지 못하고 순간 웃음이 픽 새어나왔다.
허나 다행히 내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 그녀는 여전히 어설픈 취중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겨우 웃음을 참으며 나는 그녀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자 은지가 빨개진 표정으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야, 술 같은  보통 여자가신경 쓰는 거라고오…….”
“뭔 소리?”
“그러니까 너는 내가 취하든 말든 신경 쓸 필요 없다 이거지이!”
“아무리 그래도 같이 마셨는데 어떻게 신경을  써요?
“착해 빠져서는.”

피식 웃은 그녀가 내 어깨에 양 손을  올렸다.

“현수야아.”

연기라 해도 취기가 오른  자체는 사실인 걸까.
그녀의 행동은 이전과는 달리 꽤나 대담해진 상태였다.

덕분에 가뜩이나 노출도가 있던 그녀의 가슴골이 내 눈앞에서 완전히 적나라하게 비춰졌다.

오우야, 가슴   보소…….

“사회생활  하다 보면 말이다아. 이렇게 취할 필요도 있는 거라고오.”
“왜요, 오늘  힘들었나봐요?”
“그거야 그 상사 새끼 때문에……!”
“응?”
“……아니, 아무것도.”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송은지가 눈을 돌렸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취한 탓에 실수로 나와 버린 모양이다.

도와줄 겸 일부러 나는 화제를 돌려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그건 어떡하려고요?“
”으엥?“

 말에 그녀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아까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포장한 봉지가 손에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들고 다닐 셈은 아닐 테고.“
”아, 이거어? 당연히 호텔가서 먹어야징. 으흐흐.“
”그 징그러운 웃음소리는 어떻게 안 되나…….“
”야, 내 웃음소리가 뭐가 어때서어!“
”에휴, 됐다. 어디 가서 스튜어디스란  하지나 말고.“
”우이씨!“
”그래서 그거 혼자 다 먹을 셈이에요? 숙소 가서?“

사실 속아주는 척 그녀의 꼬임에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재밌을  같지만.

솔직히 이젠 나도 한계다.

가뜩이나 오른 취기에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계속 내 앞을 가로막는 상태가 되다 보니 이미 내 아래쪽도 피가 잔뜩 몰린 상태였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렇게 많은데 혼자 먹을  있겠어요?“
”뭐, 그거야 너  나눠주면 되지이.“
”그래요? 뭐, 누나가 괜찮으면 같이 먹자 하려고 했는데.“
”……어?“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잠깐만……. 나 진짜 많이 취했나보다.“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모습은 이전까지의 연기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꼬인 척하던 그녀의 말투도 어느새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고개를 홱홱 돌린 그녀가 다시 한 번  향해 물었다.

”현수야,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제대로 못 들어서.“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거 같은데.

나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 번 말했다.

”호텔가서 같이 먹자고요.“
”호, 호텔? 어, 어디 호텔?“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내가 잡은 숙소 말하는 거죠.“

내 말에 그녀가 입을 떡 벌렸다.

”…….“

남자 혼자 사는 곳에 여자를 초대한다?
아무리 쑥맥이라도 이런 신호를 눈치채지 못하면 그건 문제 있는 거다.

다행히 눈앞의 송은지라는 여자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어, 어……. 그러니까…….“

말문을 찾는 그녀의 눈빛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욕망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의심, 당황스러움.
그리고 그걸 한참 뛰어넘는 욕정.

그래. 누나도 하고 싶지?
나도 다 알거든.

나도 이 세계의 ‘여성성’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니까.

”……진짜로? 혀, 현수 네 방?“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라는 뉘앙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능청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대로 헤어지면 아쉽잖아요. 둘이서 얘기나 더 하자고요. 술집은 시끄럽기도 하고.“
”아니, 그건 좋은데……. 정말로?“
”왜요? 아까 누나가 같이 먹자고 해놓고는."
"어? 드, 들었어? 혼잣말이었는데……."
"아, 그리고 저 술 마시면 라면이 땡겨서. 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라면도 사 가죠. 제가끓여줄 테니까.“

아직 의심스러운 기미가 느껴지는 그녀를 향해 나는 더욱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라면 먹고 갈래요, 누나?“

참고로 이 세계에서도 이 은어는 여전히 통하고 있다.

뭐…….
사실 라면보다는 더 중요하게 사야  게 있지만 말이지.

”…….“

멍하니 있던 은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씨익 웃었다.

”그럼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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