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3화 〉11. 나 홀로 여행-2(1) (93/152)



〈 93화 〉11. 나 홀로 여행-2(1)

이름, 윤한솔.
나이, 20살.
현재 대한대학교 기계공학과 19학번으로 재학 중.

여중여고 테크를 거친 그녀로서는 대학 생활에 여타 새내기들과 다르지 않은 꿈이 있었다.
그것도  개나.

첫 번째, 고등학생 3년 동안의 아싸 생활을 청산하는 것.
두 번째, 남자친구와의 빛나는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는 것.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소망은 입학과 동시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번 19학번 새내기들이 하나같이 여자만 있었던 탓이었다.

“망했네. 어떻게 다 여탕이냐.”

예전 OT 때 중얼거리는 선배의 말에 한솔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동기로 들어올 남자가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남자가 한 명도 없는 거지?
그것도 하필 내 학번에서?
그래도 요즘은 남자들도 공대에 많이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어쩔  없지.’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여탕일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 아니었는가.

하물며 CC(캠퍼스 커플)란 것도 깨지면 남은 대학생활이 어긋나게 된다고 들었다.
굳이 같은 학과가 아니라도 동아리도 있고, 다른 학과와 미팅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일단 남자든 여자든 사람을 많이 사귀어야 해. 그러면 남자를 만날 기회도 생기겠지.’

애써 납득한 그녀가 우선시한 것은  번째 목표.
인싸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 생각한 그녀는 한 학기 동안 이런 저런 행사에 참여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학과 공부에 각종 행사, 심지어 등록금을 벌고자 알바까지 하자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하지만 한솔은 포기하지 않았다.

’또 고등학생 때처럼 찌질하게 있을 순 없어!‘

대학교에 와서까지 아싸로 지내고 싶진 않다는 간절한 마음.
그것이 그녀를 계속해서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한솔은 굳이 무리까지 해 가면서 이번 여름 MT에 참가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게 뭐야…….”

해변가를 보면서 동기들과 함께 들떴던 기분도 잠시.
곧이어 이어지는 선배들의 얼차려에 한솔을 비롯한 새내기들은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뿐이랴?
그런 선배들의 추태를 제지할 생각도 없이 이 상황을 가볍게 있는 학과 교수들, 술고래도 울고 갈 수준의 끔찍한 술자리, 그 외 기타 잡일 등등…….

고작 MT 하룻밤 만에 그녀의 정신은 한계까지 몰린 상태였다.

“너무하잖아,진짜…….”

생지옥 같은 상황에 한솔의 입에서 절로 푸념이 새어나왔다.

거친 MT가 될 건 어느 정도 각오했다.
한 학기 동안 자신의 선배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대충 느낀 바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남자라고는 선배나 다른 학과에서 함께 온 몇  뿐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집에 가고 싶다…….”

술 마시는 것까지는  보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얼차려는 진짜 선 넘었다.

공대 MT는  이런 걸까.

“하아.”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잠시 혼자 바깥에서 숨을 돌리는 상황 속에서 한솔은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뭘 그렇게 한숨을 쉬냐, 한솔아.”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한솔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선배님!”
“괜찮냐?”
“오, 오셨습니까!”
“야, 야. 하지 마.”

한솔의 말투를 들은 여선배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내 앞에서는 다나까  써도 돼. 진짜 듣기 거북하니까.”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담배를 꺼내드는 선배.
그런 선배를 보며 한솔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날 뻔했네.'

지금 눈앞에 있는 선배는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자신과 동기들의 편의를  봐준, 말 그대로 ‘선배’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이도 더 쳐 먹고 군대도  간 년들이 군대놀이는 오지게 하지 아주.”

그녀가 짜증난다는  중얼거렸다.

“군필 입장에선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다니까? 한심해 죽겠다 진짜.”
“…….”
“얼굴이 완전 죽상이네.”

풀이 죽은 한솔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그녀가 후 숨을 뱉었다.

“후우……. 나도 좆같은 거 아는데  말고 내 동기나 선배들 앞에서는 그러지 마라. 보니까 과 생활 좀 해보려고 참가한 거 같은데. 그냥 바보처럼 헤헤 웃으면서 넘어가. 그게 너한테도 편하니까.”
“네…….”
“뭐, 최선은 이런 병신 같은 모임에 참가 안 하는 거지만.”
“그런데 선배님은 왜…….”
“나? 나야 여기까지 인맥이니 뭐니 지랄한  아까워서 그러지.”
“인맥이요……?”
“학생회장 같은 거 말이야. 이런 데  나오고 해야지 가능성이라도 생기거든.”

거기까지 말한 선배가 피식 웃고는 한솔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평소 그녀의 거친 성격을 알고 있는 한솔로서는 그것이 그녀 나름의 애정표현임을 알  있었다.

“뭐, 겸사겸사  같이 어리버리한 애들도 좀 봐주고.”
“…….”
“농담이야 새끼야.풀 죽기는.”

낄낄 웃는 선배를 한솔이 힐끗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한솔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뭐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주무셨잖아요.”

웃고는 있지만 눈 밑에 다크써클이 장난 아니다.
그리고 한솔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번 MT에 참여한 후배들 한 명 한 명 보살핀답시고 한숨도 못 잔 탓이었다.

어젯밤 얼차려 행사 이후로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눈앞 선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훤하다.

 모습을 떠올린 한솔이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좀 있다가 나가서 논다고 하던데…….”
“난 또 뭐라고. 걱정하지 마. 이거  대만 피고 자러 갈 거니까. 교수님한테는 허락 받았어.”
“아…….”

순간적으로 한솔의 눈빛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이 선배가 종종 봐준 게 있어서 그나마 편한 감이 있었다.
한솔로서는 가능하다면 좀 더 옆에서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 한솔의 마음을 눈치챈 여선배가 피식 웃었다.

“야,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나도  쉬어야지.”
“아뇨,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에 다 써 있구만.”
“……죄송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선배들이 다 병신이긴 해도 그 정도로 병신은 아니니까. 대낮에 사람들  있는 데서 지랄하진 않을 거다.”
“그럴까요…….”
“새끼. 소심해가지고는.”

담뱃재를 툭툭 턴 그녀가 한솔의 어깨를 탁 쳤다.

“그럼 이 언니는 자러 간다.”
“아, 네.”
“적당히 눈치 보면서 빠지라고.”

그리 말한 선배가 손을 휘휘 흔들며 떠나갔다.

"하아."

그런 그녀를 보면서 한솔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순간적으로 뻔뻔하게  뻔했던 자신의 생각이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면 안 되지.’

이제부터는 스스로 처신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한솔은 몸을 움직였다.

***


“가자, 얘들아!”
“네, 선배님!”
“빨리 빨리 움직이자. 빨리 빨리.”
“시정하겠습니다!”

어젯밤 난리가  방을 청소하고, 수십 명 분의 라면을 끓이고, 숙취에 정신을 못 차리는 이들 몇 명을 쉬게  뒤.

그제서야 한솔을 비롯한 동기들은 해변가를 나설 수 있었다.

‘차라리 술에 약한  나았을지도.’

사실 동기라고 해봤자 한솔 자신을 비롯해 겨우 세 명 뿐.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자신이나 옆의 두 명이 술이 상당히 쌘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숙취에 뻗은 이들을 데리고 물놀이를 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여선배의 말대로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진짜 내가 이러려고 여기들어왔나…….”
“야, 야. 듣잖아.”
“들으라지. 시발. 쌍팔년도 군대도 이거보단 낫겠다. 미친 새끼들.”
“…….”

물론 그리 생각하는 건 나뿐인  같지만.

툴툴거리는 동기들을 겨우 달래며 텐트를 세우고 준비를 하는 사이에도, 선배들 몇 명은 아예 대놓고 끼리끼리 모여 하하호호 잡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열불이 뻗칠 지경이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학교  줄 아나.

“…….”

한솔은 저 멀리서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3인방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머리를 잔뜩 금발로 물들이고 피부를 살짝 태운 호피 무니 비키니의 금발 태닝 양아치.
170 중반은  법한 키와 탱크탑으로도 가리지 못하는 거대한 가슴을 지닌, 순한 얼굴과 달리 흉악한 몸매와 근육을 지닌 헬창녀.
얇은 티셔츠에 짧은 핫 팬츠를 입은, 셋 중에는 그나마 가장 예쁘고 순진해보이는 얼굴로 남자를 유혹하는 얼굴마담까지.

“진짜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저 멍청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그런 감상이 튀어나왔다.

나름대로 컷이 높은 대학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겉모습과는 달리 역시 공부를 잘하는 걸까?

그래도 저런 인간들이랑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니 수치스러운데…….

“윽.”

이런, 눈 마주쳤다.

서둘러 텐트를 치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세  중  명, 금발의 선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야, 민지야.”

금발 선배의 말에 함께 텐트를 치던 민지라 불린 선배가  혀를 찼다.
앞의 선배처럼 후배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양아치 3인방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아닌, 그냥 평범하게 자기 일 하는 선배였다.

“왜.”
“애들 한 명만 좀 데려간다.”
“지금 우리 텐트치고 있는 거  보여?”
“아, 뭐  살  있어서 그래. 진짜 필요한 거라고. 교수님이 부탁하신 거야.”
“……데려가든가 말든가.”

다만 문제는 앞의 선배처럼 자기주장도 약하고 성격도 훨씬 유약하다는 것.

외면하며 다시 텐트를 치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한솔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데려가서 뭔 짓을 시키려고.

“거기 너.”
“저, 저 말입니까?”
“그래. 이리로 와 봐.”
“…….”

모른 척 하고 싶지만 아예 지목까지 하는데 그럴 순 없는 노릇.

쭈볏거리며 다가가자 금발 태닝이 물었다.

“너 이름이 뭐랬지?”
“기계공학과 19학번 윤한솔입니다!”
“그래, 한솔아. 언니들이랑 재밌는  하고 싶지 않니?”
“무, 무슨 말씀인지 잘…….”
“뭐, 보면 알아. 따라와.”
“…….”
“안 따라오냐?”
“가, 가겠습니다!”

진짜 망했다.

마지막 미련을 담아 슬쩍 뒤를 돌아보았지만 동기들은 슬슬 시선을 피하기만했다.
민지라는 선배는 어느새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결국 포기한 한솔이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심부름이었으면……. 엄한 짓은  시켰으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한솔은 별 인사도 없는 세 사람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한솔을 따라오게 시킨 세 사람은 한솔을 무시한 채 자신들끼리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한솔이 의아해할 즈음.

“와.”

순간적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금발 선배의 목소리에 한솔이 축 쳐졌던 고개를 들었다.

“야, 야. 저기 좀 봐봐.”
“뭔데?”

동기들을 부르며 한쪽으로 시선을 모으는 선배.
그런 선배의 모습에 한솔도 자연스레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

그 순간 한솔의 입에서 방금 금발 선배가 한 감탄사와 똑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질 정도의충격이었다.

키는 180 정도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이상?
특히 얼굴이 대박이다.
국내 탑스타 남자 배우와도 견줄 정도의 외모의 소유자였으니까.

몸매는 말할 것도 없다.
자신감 있게 단추를 풀어헤친 하와이안 티셔츠 안으로 탄탄한 복근과 떡 벌어진 어깨, 앙증맞은 유두까지 완전히 공개되어 있었으니까.

“…….”

한솔이 멍하니 그림 같은 사내를 감상하는 사이.
이미 스캔을 마친 앞의 3인방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시발. 몸매보소.”
“심지어 얼굴도 잘생겼는데?”
“가슴  벌어진 거 봐라, 진짜 좆되네. 존나 따먹고 싶게 생겼지 않냐?”
“큭큭, 미친 새끼.”
“연예인인가?”
“멍청아, 연예인인데 저렇게 혼자 다닐 리가 있겠냐.”
“그래도 지망생이나 모델이긴   같은데.”
“여친은……. 일단 지금은 없는 모양이네. 설마 혼자 여행 온 건가? 남자 혼자서?”
“그럼 우린 존나 땡큐지.”

순간적으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한 한솔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인간들은 머릿속에 뭐가 든거지?

“야, 너.”

물론 그것도 아주 찰나일 뿐.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선배들의 모습에 한솔이 언제 그랬냐는  방긋방긋 웃었다.

“네, 선배님!”
“가서 말 좀 걸어봐.”
“……네?”
“꼬시면 너 대학생활 내가 책임져 준다.”
“제, 제가요? 아니, 제가 말입니까?”
“그럼 너지 누구겠냐 임마.”
“…….”
“뭐하고 있냐. 선배 말이  같지 않아?”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솔에게 다가온 금발남이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잘 생각해라. 대학생활 무탈하게 보내고 싶으면.”
“…….”

고민도 잠시.
한껏 위협적인 선배의 표정에 한솔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해, 해보겠습니다.”
“그래야지.”
“잘 해봐라.  되면 술   사줄테니까.”
“네가? 퍽도.”

낄낄거리며 배웅하는 세 사람.
그런 세 사람을 뒤로 한 채 한솔이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까짓 거 쪽 한  팔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두 번  사이도 아니고.

아무튼 자신이 계속 봐야 할 인간들은 저 미남이 아닌 저기저 재수 없는 3인방인 것이다.

한솔이 다가갈수록 사내의 모습이 더욱 명확해진다.
사내의 모습이 더욱 빛이 날수록 한솔의 자신감은 뚝뚝 떨어졌다.

명백히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고개를 돌려 한솔을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차분한 듯 시원시원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솔의 등에서 땀이 줄줄 새어나왔다.

‘으으, 미치겠다.’

아무리 거절당할 생각이라고 해도 남자와 말 한 번 섞지 못한 한솔이 이런 미남에게 말을 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한솔이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1